2004년 부산 금정구에 맑은물교회를 개척한 하창완 목사. 그의 기구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부산을 찾았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하창완 목사(맑은물교회)는 1960년대에 태어났고,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50대 중반이니까 굳이 따지자면 '586 세대'로 분류할 수 있겠다. 나이와 외모는 세월을 따라 변했지만, 하나님나라를 향한 열정은 파릇했던 시절과 다를 바 없다.

추운 날씨가 한풀 꺾이고 봄기운이 느껴지던 2월 15일, 부산 금정구 맑은물교회에서 하 목사를 만났다. 건강한 작은 교회를 지향하는 하 목사에게는 눈에 띄는 이력이 있다. 그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앞장섰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서도 활동했다. 잇따른 건강 악화와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난 뒤 목회자 길을 걸었다. 기구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가난한 집 맏아들
학비 없어 '위장 취업'
IVF 통해 신앙 정립

부산이 고향인 하창완 목사는 가난한 집안 맏아들로 태어났다.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성과힘) 속 이야기와 비슷한 경험을 하며 자랐다.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산꼭대기에 있는 집이 강제 철거됐다. 녹지 사업의 일환으로, 부산시가 허물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교회에 나갔다. 순복음 소속 교회였다. 교회는 술과 담배는 절대 하면 안 된다 가르쳤지만 세상 문제에 무심했다. 대학 진학 후 학생운동을 하며 교회와 멀어졌다. 학비가 없어 대학교 2학년 때 신분을 속이고 공장에 취업했다.

순전히 학비를 벌기 위해 공장에 취업을 한 것인데 대학 동기들은 "창완이가 노동 해방을 위해 '위장 취업'을 했다"며 우러러봤다. 공장을 통해 다시 교회와 인연이 이어졌다. 한 여공의 인도로 교회를 따라갔는데 알고 보니 모교회였다. 그곳에서 만난 형과 함께 <민중과 교회>·<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기독교 문화관> 등으로 스터디를 했다. IVF(한국기독학생회)가 출간한 책이었다.

당대 세계관을 문제 삼는 책과 단체에 매료됐다. 1984년 복학을 했다. 마침 학교에 IVF가 생겼고 하 목사는 적극 활동했다. 사회문제를 신앙의 눈으로 바라봤다.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를 구별 짓는 이원론에 맞섰다. 교회가 세상의 권세에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칠 때 머리에 띠를 두르고 '독재 타도'를 외쳤다. 교회 안에서 어른들이 문제를 제기할 때면 "왜 학생운동을 하면 안 되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후배들을 데리고 시위에 참여했다.

이듬해인 1988년 인문계 여고 교사로 발령이 났다. 한 학급당 40~50명이 수업을 들었는데, 정확히 두 부류로 나뉘었다. 대학에 진학할 학생과 그렇지 않을 학생으로.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 없는 아이들이 훨씬 많았다. 하 목사 눈에는 이 아이들이 누군가의 '들러리'처럼 보였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하 목사에게 자라나는 아이들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기독 교사라면 아이들이 하나님이 준 은사를 발견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주입식 교육을 벗어나고자 했다. <한겨레>에 실린 북한 실상 사진을 보고 글을 쓰게 하거나, 볕이 좋은 날에는 숲에 들어가 작문을 했다. 학교 안에서는 젊은 교사들끼리 모여 '참교육'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하 목사는 동료 교사들과 전교조에 가입했다.

예나 지금이나 극우 세력은 '참교육'을 기치로 내건 전교조를 '빨갱이' 집단으로 매도한다. 1980년대에는 엄혹했다. 당시 군사정부는 전교조를 반체제·반정부 집단으로 규정했다. 문교부는 전교조 가입 교사들에게 탈퇴를 권고했다. 전교조는 반발하며 명동성당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하 목사도 당시 현장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 길이 정의로운 길이니 너와 함께하겠다'고 하셨거든요."

문교부는 탈퇴를 거부한 교사 1,500여 명을 강제로 해직했다. 하 목사 이름도 해직 명단에 올랐다. 정부는 말 그대로 해직 칼날을 휘둘렀고, 교회는 정권을 비호했다. 하 목사가 다니던 교회 안에서도 "전교조는 빨갱이"라는 말이 나왔다.

"교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정말 비참하더라고요."

자괴감이 밀려왔다. 하 목사는 6~7개월간 가나안 교인으로 살았다. 그를 위로해 준 건 IVF 후배들뿐이었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하 목사를 후원했다. 하 목사는 "그 덕에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하 목사는 우여곡절 끝에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건강 악화 등 잇따른 불행
시위로 다친 무릎, 자연 치유
기도원서 소명 찾아

해직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불행은 겹겹이 찾아왔다. 망막이 벗겨진 탓에 눈 수술을 받아야 했고, 시위 현장에서 몸을 사리지 않다 보니 양쪽 무릎 연골이 찢어졌다. 다행히 실명 직전까지 간 눈은 수술을 통해 회복됐고, 인공 연골로 대체해야 한다고 판정받은 무릎은 기적적으로 자연 치유됐다. 의사도 "신기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생계를 책임지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하 목사는 아버지 대신 1년간 소형 봉고차를 몰며 동네 슈퍼에 각종 물건을 배달했다. 아버지가 완쾌하자, 다시 전교조 활동을 이어 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학 시절부터 교제해 온 애인이 이별을 선언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이 그를 기도원으로 이끌었다.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대학 시절 작성한 QT 노트를 전부 들고 들어갔어요.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을 한번 정리해 보고 싶었거든요. 기도하면서 곰곰이 노트를 살펴보니까, 메시지가 보이더라고요. 하나님께서 풀타임(사역자)으로 부르는 걸 알게 됐어요. 신기하기도 해서 '이 길이 맞습니까' 질문했어요. 그랬더니 불안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어요. 내려가서 교회 담임목사님께 이야기를 했더니,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길을 정하고 나니까, 애인도 돌아왔고요.(웃음)"

그 길로 고려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목사 과정을 밟을 때 잠시 눈을 돌린 적 있다. 김영삼 정부가 해직 교사 복귀를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하 목사는 아내의 만류에도, 딱 1년만 학생들을 가르치고 오겠다며 복귀를 준비했다. 학교가 그리웠고, 무엇보다 장남으로서 부모님께 효도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운전 도중 큰 교통사고를 당한 뒤 마음을 고쳐먹었다. 차가 몇 차례 구르고 전복됐지만, 하 목사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차가) 데굴데굴 구르는 동안 교사로 복직해서는 안 된다는 신호가 왔어요. 그 순간 하나님께 다시 목회의 길을 가겠다고 기도했죠. 신기하게도 사고가 났나 싶을 정도로 (몸은) 멀쩡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목사가 됐다. 말 그대로 죽을 고비도 넘기고, 신기한 경험도 몇 차례 겪었다. 부흥사 명함 달고 간증하며 돌아다녀도 될 인생이었다. 그러나 하 목사는 기존 교회 체제 안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목회를 할 자신이 없었다. 개척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수련회에 참석해 기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교회 개척을 하고 싶습니다"는 기도를 올리자, "그래, 아빠가 도와줄게. 마음껏 해 봐"라는 음성이 들렸다. 하 목사는 "나만의 체험이자, 일반화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격려"라고 표현했다. 함께 기도하던 아내도 비슷한 격려를 받았다.

2004년 부산 금정구에 교회를 개척했다.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우연한 계기로 인연을 맺은 한 장로가 예배당 전세금을 마련해 주고, 인테리어까지 해 줬다. 1년간 하 목사의 사례비를 지원했다.

교회 개척 일사천리
13년간, 6개 가정 교회로 거듭
담임목사 아닌 '목자' 중심

맑은물교회는 6개의 가정 교회로 이루어져 있다. 사진 제공 하창완

맑은물교회는 대학가에 밀접해 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산대학교를 포함 부산가톨릭대학교, 부산교대가 있다. 자리를 잡자 청년들이 교회 문을 두드렸다. 하 목사는 IVF에서 배운 대로 '함께 공유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권위주의를 내려놓고, 함께할 목자(리더)를 양육했다. 또 형식적인 예배 문화에서 벗어나 삶이 곧 예배가 될 수 있게 노력했다. 교회 구성원들이 밀접한 관계를 맺도록 돕고, 담임목사가 아닌 '목자' 중심의 가정 교회를 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고 봐요. 성도 개개인의 일상이 하나님나라가 되게 하는 거죠.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평화, 공평을 실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격려하는 것이죠. 말하자면 교회는 훈련소이자 병참기지이자 따뜻한 공동체예요. 처음에는 소그룹 형태로 해 나가다가, 가정 교회로 자리를 잡았죠."

현재 맑은물교회에는 가정 교회가 6개 있다. 주일예배가 끝나면 목자 자택으로 가거나, 예배당에 남아 따로 예배하고 삶을 나눈다. 한 가정 교회마다 10명이 넘는데, 8개로 늘릴 예정이다.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대학생 그룹은 따로 모임을 갖는다.

맑은물교회는 담임목사가 목자를 키우고, 그 목자가 그룹 구성원을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목자는 가정 교회 교인을 케어하고, 일을 도와주고, 모든 일을 책임진다. 물론 목자는 철저한 훈련을 거친다. 하 목사와 목자들은 매주 금요일 밤 9시에 모여 자정까지 성경을 공부한다.

"이제는 목자가 양육의 멤버가 아닌 저의 동역자로 느껴져요. 같이 한 멤버를 놓고 기도하고, 삶을 나누고, 활로를 모색해 나가는 재미가 쏠쏠해요. 때로는 저도 지칠 때가 있는데, 힘들다고 솔직히 말해요. 가끔씩 '목사님 그러면 안 됩니다'라고 야단을 맞기도 하고요. 13년을 이렇게 지내니까 진짜 친구가 됐어요."

맑은물교회 특징 중 하나는 '영성'이다. 세이비어교회처럼 내적인 영성과 외적인 영성을 강조한다. 내적 영성을 위한 하나의 일환으로, 하 목사는 하루에 한 번씩 QT 팟캐스트를 한다. 다른 교회와 달리 맑은물교회에는 새벽 기도, 수요 예배, 금요 예배가 없는데, 이를 대체할 목적으로 하고 있다. 교인뿐만 아니라 해외 선교사 포함 400~500명이 청취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침묵 기도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아침까지 진행하는 '침묵의 오솔길'을 비롯해 사순절 기간에는 7개 죄악을 한 주 단위로 묵상한다. 고난주간에는 아예 예배당에 묵상 처소를 만들어서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기도를 올린다.

외적인 영성은 주로 외부 강사를 섭외해 강의를 듣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기독교 공동체를 일궈 가는 이들과 시민단체를 초청해 이야기를 듣는다.

맑은물교회는 '건강한 작은 교회'를 지향한다. 6년 단위로 담임목사 재신임 투표를 하고, 교인들은 3년 단위로 직분을 맡는다. 목회자와 교인, 교인과 교인 간의 수평적 관계는 기본이다. 그렇다고 수평적 관계가 절대적으로 좋은 건 아니다. 의견이 취합되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목소리 큰 사람 뜻대로 될 때도 있다. 하 목사는 완전할 수 없다며 대안을 찾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나라를 향한 열정은 뜨겁다. 대통령 탄핵 집회에 참석한 하 목사와 교인들. 사진 제공 하창완

맑은물교회 최근 화두는 생활 공동체다. 같이 살아 보자는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 공간 마련을 위한 토론도 몇 달째 해 오고 있다. 하창완 목사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도 좋지만, 하나님나라가 먼저라고 말했다.

"시골과 달리 도시는 하나님나라를 힘 있게 살아가는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아요. 기본적으로 성품 속에 정의·평화·사랑 마인드가 녹아 있어야 하고, 틈틈이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산다는 게 뭔지 고민해야 해요. 특히 교회는 커지려고 해서 안 되고, 사회문제에 공감대를 가지고 살아야 해요. 하나님나라를 향하는 교인이라면 세월호 참사에 아파할 줄 알아야 하고, 지금처럼 촛불을 들 줄 알아야 한다고 봐요. 맑은물교회 교인들은 하나님나라를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해요. 조만간 일 한번 내지 않을까 생각해요.(웃음)"

하창완 목사는 한 번의 임기를 마치고 60세에 은퇴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교회가 커지면 분립하고, 다양한 실험을 하며 교회 공동체를 일궈 나가고 싶다고 했다.

10여 년 전 청년이었던 교인들은 어느덧 부모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예배한다. 사진 제공 하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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