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고전 9:9-10)

빌립보서 4:12은 사역자가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다짐하고 적용하며 배워야 할 자세이지, 교회가 사역자에게 요구할 내용은 아니다. 교회가 가져야 할 자세는 그 아래에 있는 고린도전서 9:9-10의 내용이다.

먼저 빌 4:12에서 생계비에 관한 사도바울의 자세를 보자. 그가 늘 텐트메이커(자비량 선교사)로 사역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후원자로부터 넉넉하게 후원받을 때도 있었고, 그의 필요보다 훨씬 적게 후원받을 때도 있었다. 상황에 따라 그는 때로 풍요로움도 누릴 줄 알았다. 그러나 꼭 후원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기에 가난함도 수용할 줄 알았다.

바울이 원칙적으로 강인하고 독립적인 성격의 소유자이거나 특별하게 물질적인 훈련을 받아서가 아니다. 궁핍함 속에서도 그를 붙잡아 주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였더니 자신의 연약함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강함으로 변하는 것을 그가 늘 체험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집착이다. 내게 주어진 것들이 사라져도 다 주님의 것이니 '괜찮아!'라고 수긍할 수만 있으면 우리는 부를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역자 개인이 가져야 하는 자세이지, 교회가 져야 할 책임의 중요성을 덜어 주는 것은 아니다.

가난은 사역자 개인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미덕일 수는 있어도, 교회가 사역자에게 가난을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리란 말도 쉽게 하지 마라. 바울은 구약에서 하물며 '일하는 소'에게조차 멍울을 씌우지 말라고 했다. 신약에서 사역자들의 생계는 교회가 당연히 져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개교회가 아닌 교단 차원에서 이를 법제화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전 9:9-10). 마치 구약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를 이스라엘 공동체가 전체적으로 책임졌듯이 말이다. 사역자 개인은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문제다. 공적인 차원에서는 교회가 철저하게 사역자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물론 바울은 자신이 돈 때문에 사역한다는 구설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고전 9:12] 이 권리를 포기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극히 소수지만 유명한 사역자 중에는 교회로부터 고가의 외제 차와 일반인이 꿈도 꾸기 어려운 고가의 저택, 사례비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이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지나친 것은 늘 탐욕의 결과다. 풍요롭든지 가난하든지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적절하게 그가 가진 소유가,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는 좋은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영적인 사역자가 늘 가난해야 한다는 것도, 혹은 능력에 걸맞게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것도 다 싫다. 고생해야 사람 되고 영적이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젊었을 때 혹은 적당해야 통하는 말이지, 너무 가난하면 사람이 자신감도 사라지고 성격도 나쁘게 변하기 쉽다. 서양 목회자들은 보통 성격이 좋고 가정적이다. 우리나라 목회자들보다 풍요롭게 자라고 여러모로 고생을 덜하고 살기 때문이다.

사역자도 너무 오랫동안 생활고에 찌들면 그의 가정에 무책임한 해악범이 된다. 가난한 유학생 시절보다 지금 내 시각은 훨씬 덜 비판적이고 시야도 넓어지고 성격은 푸근해졌다. 최소한의 경제적 어려움이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사역자들에게 가난을 강요하지도 말고 사역자는 풍요를 정당화하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그냥 사역자들도 그 사회의 평균적인 삶 정도를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살면서 보니 부자가 된다고 다 타락하는 것도 아니다. 거만해지기보다 더 많이 베풀고 사회에 크게 유익한 사람도 보았고, 가난해서 더 이기적이 되고 죄악만 늘어난 이도 보았다. 이는 사역자도 마찬가지다. 사실 풍요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풍요로움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이 욕구에 대한 집착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풍요를 욕망한다. 사역자도 마찬가지다. 위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솔직하게 이 욕구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의 시각으로 볼 때 지나치게 누리는 수준이 아니라면, 사역자에게 풍요란 늘 베푸는 것을 연습하는 좋은 복이다. 채워지지 않을 때는 물론 자족을 연습해야 한다.

사역자도 취미가 있을 수 있고 살면서 가족과 함께 여유를 누리고 싶은 인간이다. 이 욕구를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거룩이나 영성이란 이름으로 사역자들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지 마라. 그가 특별하다고 지나치게 보상하려고도 하지 마라. 그럴수록 억압된 욕망에서 나오는 '싸이코' 사역자들이, 혹은 탐욕을 키운 '사욕자'(?)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사역자의 생계비에 관한 권리와 책임은 개인을 넘어선 교회 제도의 문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상당수의 신학대학원이 학교의 생존 혹은 성장을 위해 질적으로 미달인 학생을 거르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자격 미달 목회자들을 양산하면서, 사역자의 생활에 대한 책임은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돌리는 것은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사역자들도 사회와 마찬가지로 살아남기 위해 약육강식의 경쟁 체제와 생존 프레임 속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계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역하는 것은 생계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이는 교단의 차원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제도의 문제이다.

이 악하고 불평등한 제도 안에서, 사역자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개인적인 차원으로 적용되어야 할 말이 있다. "나는 다만 세상에서 청지기로 살아갈 뿐이다." 내 것이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든 물질이든 건강이든, 나는 이를 관리하는 청지기임을 늘 인지한다면 집착을 줄일 수 있다. 여기엔 인간관계도 포함된다. 사람 관계도 어쩔 수 없이 헤어지기도, 틀어지기도, 죽음을 통해 갑작스럽게 이별할 수도 있다. 사람은 변한다. 집착하지 않는다면 사람들과의 관계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개인의 심리적인 고통을 해결하고 덕을 쌓기 위해 소유에 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지금 꼭 필요한 것은 나눔과 평균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 개선이다. 모든 문제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사회나 교회는 절대로 바람직하지 않다.

현실적인 대안은? 아쉽게도 없어 보인다.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이해관계로 똘똘 뭉친 교계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자본주의에 물든 우리나라를 사회주의로 전환하는 것만큼 힘들 것이다. 큰 교회일수록 부를 파격적이고 과감하게 나누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에, 앞으로도 쭉 지금같이 갈 것 같다. 그럼 모자라는 생활비에 허덕이는 대부분의 사역자는 어떻게 모자라는 부분을 충당해야 할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대학원까지 나와 최하위층처럼 경제적으로 허덕이며 힘들게 살아가는 다수의 목회자와 그 가족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이게 어찌 하나님의 뜻이려나. 다만, 그럼에도 사역할 뿐이겠지. 이제 우리는 고민만 하지 말고 현실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학을 주장하는 것에 있지 않고 실현하는데 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내 교회 네 교회 구분을 넘어, 이젠 과감한 나눔만이 살길이다.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신앙, 그 오해와 진실>(새물결플러스) 저자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