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쁜 하나님' 소개의 말

오늘의 한국교회는 정치적 타락, 종교적 부패, 신학의 허약함으로 인해 파산 직전에 몰려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신학, 신앙, 교회의 위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너머에 치유를 위한 열망 또한 숨 쉬고 있음을 부정해선 안 될 것입니다.

치유와 소생의 가능성을 경험하기 위해 오늘의 한국교회를 지배한 기복과 왜곡된 순수의 풍경을 동시에 전망하는 문학적 시도는 어쩌면 필연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이러한 시도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교회의 본령을 회복하는 사상적, 신학적 갱신 의지와 흐름을 같이한다고 확신합니다. <뉴스앤조이> 연재 소설 '나쁜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궤멸적 징후를 극사실적으로 해부하고 그 너머의 희망, 치유, 소망의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 소설가 주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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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주원태

고동식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민규가 자신을 난처하게 바라보는 고동식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맞은편 벽면 상부에 걸린 그림을 응시했다. 화장의 수준을 넘어서서 거의 백미에 가까운 분칠을 한 여자 게이샤와 군복 차림의 남자가 정을 나누는 장면이 그려진 극사실주의 회화였다.

일본 군복에 욱일기가 그림의 배경이 된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지 민규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더 어색한 침묵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고급스런 인테리어로 무장한 3층 건물의 2층, 그중에서도 호사스러움의 극치를 과시라도 하는 듯한 룸으로 인도한 고동식과 마주보고 앉은 민규는 넓디넓은 일본식 좌탁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사전에 어떤 말이라도 해 두었으면 모르겠다. 자신은 일식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고. 아니, 좋아하지 않는 편이 아니라 횟감을 비롯해 일식과 관련된 어떤 식감도 민규는 느끼지 못했다. 그렇지만 고동식이 저녁 식사 약속이라며 민규를 일방적으로 이끈 곳은 '도코모토'란 상호가 내걸린 일식집이었다.

서빙을 보는 직원이 계속해서 갖가지 먹을거리들을 정성스럽게 내왔다. 하지만 민규는 바로 앞에 놓인 저분에 손조차 대지 못했다. 대신 애꿎은 보이차만 삼켰다.

일식을 먹지 못해 낭패를 겪는 건 하지만 민규가 직면한 난처함의 일부였다. 진짜 난처함은 일방적으로 저녁 약속을 잡아 놓은 당사자가 오지 않는 현실이었다. 식사 자리의 주인공 김인철 장로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랫동안 노심초사하던 고동식의 좌탁 위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계속해서 전화를 걸며 애타하던 고동식에겐 진동이 울리자마자 곧바로 전화를 받을 만도 했지만 그는 애써 침착하고, 그만큼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 예. 의원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사안이 사안인지라…

스마트폰 너머 상대의 고함 소리가 맞은편에 앉은 민규에게까지 들려왔다. 고동식의 붉게 상기된 얼굴은 그 덤이었다. 고동식은 상대가 보지 않는데도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해 보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상대의 노기가 조금 가라앉은 틈을 타 상대인 김인철 의원을 향해 자신의 용건을 밝혔다.

- 의원님. 금일 7시 저녁 약속은 이곳 '도코모토'입니다.

고동식이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침묵했다. 민규는 통화 속 상대가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그 짐작은 그야말로 황당하고 무례한 반응으로 이어졌다. 다시 시작된 통화 속 상대의 음성, 혹은 지시를 꼬박꼬박 "예", "예" 하는 추임새까지 넣어 가며 동의하던 고동식이 어느 순간 말을 멈추고 민규를 바라봤다. 시선을 벽에 걸려 있는 춘화에 가까운 그림을 바라보던 민규의 시선이 침묵하는 고동식에게로 향했다. 민규가 물었다.

- 무슨… 일이죠?

민규가 짧은 질문을 던지자마자 고동식이 민규에게 통화 중이던 스마트폰을 건넸다.

- 받아 보시죠. 통화하고 싶어하십니다.

- 누구?

- 누구긴요. 김인철 의원님이십니다.

얼굴도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한 생면부지 사람과 통화부터 해야 하다니. 민규의 심리적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하지만 전화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임을 민규는 고동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얼굴 전체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고동식을 더 이상 난처하게 만들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전화 바꿨습니다.

민규가 말문을 열자마자 거칠지만 강하고 압도적인 말투가 인상적인 김인철의 되물음이 이어졌다.

- 나 김인철이올시다. 댁은 누구요?

누구냐고? 민규가 황당해했다. 고동식은 부러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피했다. 상대인 김인철이 말을 이었다.

- 듣자 하니 오늘 저랑 저녁 약속을 하셨다구요.

- 예. 그렇습니다.

- 그럼 뭐… 언론사? 아님, 방송국인가요?

- 아니 저… 장로님. 정민규입니다.

- 정… 민규?

- 정민규 목사입니다. 이번 율주제일교회에 새로 부임한.

- 아… 아이고. 목사님이셨군요.

방금 전까지의 고압적인 말투가 말소되는 순간이었다. 김인철은 그제야 오늘 저녁 약속이 자신이 속한 교회에 새로 부임하는 담임 교역자와의 만남이란 사실을 기억한 모양이었다. 그때, 민규의 시선은 내내 백색 벽면에 덩그러니 내걸려 있는 50호 크기의 액자 속 그림에 집중했다. 강하고 다부진 상고머리의 일본 장교 자리 옆에는 섬뜩할 정도로 길고 날이 선 장검이 칼집에 꽂히지도 않은 채 다다미방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와 함께 장교의 두 손은 암컷을 정복하기 위한 욕정을 가득 담아 게이샤의 어깨와 허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 강고한 외설스러움이 자꾸만 민규의 정신을 어지럽혔다.

- 목사님. 우리 목사님… 아니… 그런데… 존함이…

- 정민규입니다.

- 그래요. 그래. 우리 정, 민, 규목사님. 이거 참 어떡하죠? 제가 오늘 피치 못할 주민들과의 민원 처리 활동이 있어서 목사님과의 저녁 약속을 깜빡 잊고 말았지 뭡니까. 이거 참.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되나 봐요.

- 괜찮습니다. 장로님. 오늘만 날도 아니고. 다음에 뵙죠.

-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거 참. 송구하네요. 대신 목사님. 거기 물건들이 참 싱싱합니다. 맛보고 가시죠.

- 아. 괜찮습니다. 그리고 사실…

- 예. 말씀하세요. 목사님.

- 전 회를 잘 못 먹습니다. 바다 음식 알러지가 심해서.

- 크크크큭.

- 장로님?

- 목사님. 제가 말씀드린 싱싱한 물건들은 그게 아닌데…

- 예?

- 아. 아닙니다. 아무튼 결례를 용서하시고 편히 쉬다 가세요.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민규는 기다렸다는 듯 고동식에게 스마트폰을 건네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준비된 사택으로 달려가 침대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듯 잠들고 싶었다.

(계속)

*'나쁜 하나님'은 주 3일(월, 수, 금)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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