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이 끝나 간다. 청소년 캠프 일정도 끝물이다. 청소년부 교역자나 교사들은 큰 행사 하나 지났다고 하며 한숨 돌린다. 아이들은 캠프 때 받은 은혜로 심기일전 중이다. 허나 아이들은 대체로 신앙이 아니라 학업의 현장에서 마음과 자세를 다잡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아이들은 이틀 내지 사흘 동안 비전과 학업에 대한 결단을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자리에 내던져진다. 비전이 명확하지 않은 아이들은 아직 출발선에 서지 못한 것만 같은 불안 속에 자리하고, 레이스를 시작한 아이들은 게으른 자신을 질책하거나 격한 담금질 속에 자신을 밀어 넣는다.

물론 캠프를 주관하는 기관이나 담당 교역자는 이 레이스가 세속적인 레이스와 같지 않다고 선포한다. 국내 교육 현실을 개탄하고 입시 위주 상황에 내몰린 아이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영광의 레이스를 감당하는 신앙인의 포지션을 제시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수한 청소년 캠프 캐치프레이즈는 죄다 '꿈', '비전'이다. 그리고 '요셉', '다니엘', '다윗'은 청소년 캠프 때마다 소환되는 롤모델들이다. 심지어 학습 코치와 자기 관리까지도 캠프 일정에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눈치챘겠지만 번영신학의 폐해가 교회를 병들게 한다는 말이 무수히 퍼진 이후에도 여전히 이 담론이 명맥을 유지하는 곳이 바로 청소년 부서다. 번영신학에 대한 반성과 기피가 여실해지고, 기독교의 본질적 가치로 회귀하는 지금이다. 그럼에도 번영신학 담론이 청소년에게는 유효하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아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진로 문제와 입시 문제가 인생의 중차대한 일로 취급되는 분위기다 보니, 번영신학을 쉽게 떨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환우에게는 회복에 대한 희망이 필요하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청소년에게는 꿈과 비전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울 만도 하겠다. 그리고 세속적인 필요를 채우는 데 방점을 찍지 않았노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러 청소년 연합 캠프 가운데, 기독교의 본질적인 가치를 모토로 걸고 그것을 캠프 커리큘럼의 주축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거칠게 표현하면 아이들 신앙 훈련과 교육은 개교회 몫으로 남게 됐고, 다수의 연합 캠프는 부스터 공작소로서 기능만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아이들이 감당하는 레이스 자체에 대한 의문을 품지 못하게 만든다. 과도한 경쟁이 부과된 구조 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일시적이다. 단지 위로를 이끌어 내기 위한 필요조건으로만 기능할 뿐이다.

영광의 레이스?

구조에 대한 안타까움은 충분한 고민 없이 금세 신앙의 영역과 접합된다. '세속적 레이스'라는 이름표를 '영광의 레이스'로 바꿔 다는 순간이다. 구조의 문제를 바라보던 에너지는 방향을 틀어 레이스에 참여하는 각 개인 안에 집중된다. 결국 구조의 문제는, 더 힘내서 질주하지 못하는 개인의 문제로 바뀌고 만다.

어쩌면 레이스를 잘 마치면 그만이지 무슨 흰소리가 많으냐고 할 수도 있겠다. 허나 문제는 레이스 과정에서 원치 않게 몸에 상흔을 새기게 된다는 점이다. 일찍이 영국 철학자이자 문필가였던 러셀(B. Russell)은 과도한 경쟁의 구조가 지나치게 의지만을 키우고 감성과 지성을 포기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메커니즘을 교회가 받아들이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처음에는 신앙을 강조했던 청교도적 도덕주의자들이 현대에 와서는 늘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청교도주의 시대가 만들어 낸 경주는 의지만을 과도하게 발전시키고 감성과 지성을 쇠약하게 만들었으며, 경쟁의 철학을 자신의 본성에 가장 적합한 철학으로 택했다." (러셀, 1930, <행복의 정복> 중)

1920~1930년대를 바라보며 분석한 내용이지만 오늘날 상황에 더 들어맞다는 기분이 든다. 과거보다 더 과열된 양상으로 바뀌었을 뿐 긍정적으로 개선된 부분이 없으니 그럴 것이다.

이어서 러셀은 이처럼 과도한 경쟁 구조에 노출된 사람들을 마치 공룡 같다고 보았다. 지성과 감성을 배제하고 의지와 경쟁의 근력만 선호한다는 점에서 현대판 공룡이라 빗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아이들인데, 정작 레이스가 진행될수록 야수로 변하는 셈이다. 오늘날 교회에 위기를 초래한 무례한 기독교인, 무지한 기독교인의 양산도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요를 누리는 게 목적이다 보니, 아이들의 꿈과 비전이 가나안이라는 이름표를 떼고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자신들이 왕좌에 들어앉았다. 모두 겪어 보아서 아시지 않는가. 교회를 다니는 상당수 아이들이 레이스의 끝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다시 또 다른 가나안을 향해 질주하곤 한다는 것을.

출애굽 여정은 가나안을 목적 삼는 데 있지 않다.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의 동행에 있다. 40년 광야 생활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연단 기간이라고 의미를 축소해 종속시키면 곤란하다. 가나안에 방점을 찍느라 광야 한복판에서 동행하셨던 하나님의 존재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다. 그간 해 오던 청소년 사역의 관성을 따라 영광의 레이스를 정당화할 구실을 찾지 말자. 가나안 정복을 꿈과 비전이 성취되는 때로 치환시키지 말자. 학업 생활의 고역이 광야 생활의 고난인 양 치환시키지도 말자. 이 모든 논리는 애굽의 피라미드에서 나온 부장품일 뿐이다. 왜 살아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우상의 무덤 속에 가두려 하는가.

꿈과 비전을 성취했어도 신앙의 본질을 모르면 그 레이스는 스올을 향한 경주일 뿐이다. 생명에 대한 애끓는 마음이 있다면, 세상을 사는 처세에 익숙한 속물 논리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바라기는 청소년 캠프일지라도 이제는 기독교의 본질이 주축을 이루는 현장이 많아지는 것을 보고 싶다. 아이들의 의지를 끌어올리는 '동기부여 발전소'가 아니었으면 한다. 신앙에 대한 본질적 고민과 성찰을 토로할 수 있는 장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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