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쁜 하나님' 소개의 말

오늘의 한국교회는 정치적 타락, 종교적 부패, 신학의 허약함으로 인해 파산 직전에 몰려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신학, 신앙, 교회의 위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너머에 치유를 위한 열망 또한 숨 쉬고 있음을 부정해선 안 될 것입니다.

치유와 소생의 가능성을 경험하기 위해 오늘의 한국교회를 지배한 기복과 왜곡된 순수의 풍경을 동시에 전망하는 문학적 시도는 어쩌면 필연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이러한 시도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교회의 본령을 회복하는 사상적, 신학적 갱신 의지와 흐름을 같이한다고 확신합니다. <뉴스앤조이> 연재 소설 '나쁜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궤멸적 징후를 극사실적으로 해부하고 그 너머의 희망, 치유, 소망의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 소설가 주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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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주원태

- 아저씨도 잘못 들어왔죠?

소녀는 정민규와 같은 열차 이용객들을 익숙하게 보아 온 듯 했다. 공사 중이란 표지판을 까마득 잊은 채 우회 통로가 아닌 철거가 진행 중인 구역사로 들어오는 열차 이용객들 말이다. 정민규는 문득 자기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누구일지 짐작해 보았다. 오랜만에 율주시를 찾아오는 방문객이거나 학교 강의나 연구소 일 때문에 거의 출퇴근하다시피 열차를 이용하는 이용객들이 보일 수 있는 충분한 착각일 것이라고 짐작한 민규는 자신은 어느 부류일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방문객이라 하기엔 너무나 오래되었고, 출퇴근을 반복하는 익숙함을 다짐한 사람이라고 하기엔 율주 땅에 두 발을 딛고 선 자신의 존재가 너무 낯설기만 했다. 소녀의 퀭한 눈빛은 민규의 낯선 정서를 가속화하는 묘한 활력으로 들끓었다. 그래서일까. 민규는 섣불리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눈을 마주치던 차였다. 문득 민규는 자신이 무례할 정도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4년 만에 도착한 한국 땅이다. 또한 14년 만에 돌아오는 자신의 고향 율주에서 처음으로 말을 섞는 대상이 소녀라고 생각하니 비현실적인 기시감마저 들었다.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던 정민규는 뭐라도 말을 걸어야 한다는 근거 없는 의무감이 들었다. 그 의무감이 민규의 입을 절로 떼게 만들었다.

- 여기가 철거된다고?

민규의 질문을 받은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의 말이 따라붙었다. 듣기에 따라선 '정신 좀 차려요'라고 다그치는 말투를 떠올리게 했다.

- 천장 좀 올려다봐요. 천장.

민규는 소녀가 시키는 대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소녀의 말대로 3미터 가까이 되는 체육관을 떠올리게 하는 높이의 구역사 천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금방이라도 재가 되어 허물어 내릴 것 같이 구조물 전체가 만신창이 속살을 드러낸 상태였다. 녹슬고 오래된 골조가 모나고 정제되지 않은 돌부리처럼 곳곳에 돌출된 채로 노출되어 있었다. 수십, 수백 개의 전선과 폐기 직전의 등기구들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천장을 확인하고 난 뒤에야 민규는 이곳이 소멸되기 직전의 폐허, 혹은 더 이상의 복기가 불가능한 유물임이 실감되었다. 그 현실적 실감이 그 역시 오래되고 바스라지기 직전의 벤치에 앉아 있는 소녀에 대한 우려로 연결되었다. 어른다운, 그만큼 상투적이고 무성의하기 이를 데 없는 우려의 말들이었다.

- 그러는 너는 다 무너지는 여기서 뭐하는 거야?

- 기다려요.

- 기다린다고? 누굴?

- 누구든지요.

소녀가 알 수 없는 말을 남길 때였다. 말끝을 흐린 소녀의 눈빛을 민규는 더 이상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때맞춰 우측면에 조각난 창문 틈으로 강한 빛살이 파고들었던 탓에 소녀의 눈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고 민규는 믿고 싶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민규는 그러한 마음가짐이 자신의 변명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을 흐린 소녀가 자신을 노려보는 그 응시의 깊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민규의 솔직한 당혹스러움이었다. 민규는 자신을 노려보는 소녀의 날카로움이 형언할 수 없는 칼춤의 핏빛 흐름처럼 머리와 심장을 난도질하는 섬뜩함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 순간, 재킷 안주머니에서 규칙적인 진동 소리가 들렸다. 스마트폰 진동음이었다.

의식했던 일상보다 훨씬 더 놀란 민규가 서둘러 재킷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시선은 내내 소녀를 향했다. 말을 마친 소녀는 내내 민규를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소녀로부터 눈을 뗀 민규가 스마트폰 액정에 비친 발신자 번호를 확인했다. 알지 못하는,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낯이 익어 온 번호였기에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접니다. 목사님.

- 누구... 시죠?

- 저 고동식입니다.

- 고동식?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고, 동, 식이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스스로 뒷걸음질 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납득할 수 없는 두려움을 해명하지 못해서였다. 민규는 부스스한 머리에 유난히 야윈 얼굴, 창백한 낯빛을 띄고 있는 소녀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민규는 그럴수록 소녀가 자신을 부르고 멈춰 세운다는 불길한 느낌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웠다. 통화 속 민규의 상대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민규를 답답해하며 자신을 설명하려 애썼다.

- 목사님. 절 기억하셔야 합니다. 김인철 의원님 보좌관 고동식입니다.

- 아. 아… 김인철 장로님?

- 예. 맞습니다. 김인철 장로님이 보내셔서 나왔습니다.

- 어디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민규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몸은 우회로를 향해 빠르게 이동되고 있었다. 발걸음이 빨라짐과 동시에 소녀의 퀭한 눈빛도 차츰 멀어져 갔다. 고동식은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인지 약간은 절박하고 절도 있는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자신이 있는 곳에 대해서.

- 혹시 철거 중인 역사로 들어가신 건가요? 목사님.

- 예. 그냥 정신없이 나오다 보니.

- 그럼 목사님. 플래카드에 적힌 대로 우회 통로로 나오시죠.

- 예.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 우회 통로 끝에 서 있겠습니다. 감색 수트에 검은색 폴로티 입고 있습니다.

- 알겠습니다.

(계속)

*'나쁜 하나님'은 주 3일(월, 수, 금)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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