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술이 도입된 이래 그 어떤 텍스트보다 많이 출간된 책이 바로 '성경'이다. 개신교인이라면 집에 한두 권 이상씩은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이 성경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읽을 수 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성경은 전 세계 6,600여 개 언어 가운데 2,527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500년 전 상황은 달랐다.

500년 전 중세는 라틴어 성경의 독무대였다. 초기 성경은 히브리어와 헬라어(그리스어) 등으로 기록되었지만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라틴어 성경만 사용되었다. 하지만 라틴어는 당시 소시민들에게는 '외계어'와 다르지 않았다. 5세기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라틴어는 서서히 죽은 언어가 되어 갔다. 라틴어는 오로지 학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에 지나지 않았다.

중세 교회는 오직 라틴어 성경만을 인정했고, 사제들은 소시민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만 설교했다. 당시는 성경을 소유하는 것조차 죄가 되는 세상이었다. 성경은 당시 면죄부와 함께 사제들에게 맡겨졌기에 그것을 읽고 해석하는 것도 오직 사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라틴어에 갇힌 성경을 누구나 쉽게 모국어로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누구나 성경을 펼쳐서 읽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가히 혁명적 사건이었다.

여기 한 권의 책을 소개한다. 사사키 아타루가 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모음). 부제는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으로, 저자가 책과 혁명에 관한 생각을 자유롭게 쓴 에세이다. 저자는 루터를 비롯해 마호메트, 니체, 도스토옙스키, 프로이트, 라캉, 버지니아 울프 등 수많은 개혁가와 문학가, 철학가를 통해 '책이 곧 혁명'임을 이야기한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 사사키 이타루 지음 /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 펴냄 / 288쪽 / 1만 3,500원

저자에 따르면, 혁명이란 폭력이 아니다. 읽고 쓰는 것, 그 자체가 혁명이다. 저자는 혁명이 책을 읽고 쓰는 것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종교개혁을 비롯해 시대를 바꾼 혁명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미래의 희망 역시 '책을 읽고 쓰는 데'에 있다고 설파한다.

저자 사사키 아타루는 '책 읽기의 혁명성'을 납득시키기 위해 마르틴 루터를 소환한다.

"대혁명이란 성서를 읽는 운동입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75쪽)

저자는 당시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 작업이 끼친 영향력을 이렇게 묘사한다.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합니다. 1522년 9월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 통칭 <9월성서>가 출판됩니다. 초판 2,000부라고도 3,000부라고도 하는데, 12월에는 재판이 나옵니다. 가격은 소 한 마리 값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믿을 수 없는 기세로 팔려 나갔습니다. 다음으로 차례차례 저작을 써 나갑니다. 제국의 언어, 보편적인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저서를 쓰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독일어로 썼습니다. 독일어로 써도 식자율은 5퍼센트였으므로 두려움이 앞설 만큼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언어로 호소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중략)

16세기 초까지 독일어 서적 간행 총수는 단 40종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등장하자마자 1523년에는 498종에 이릅니다. 그중 418종은 루터와 그의 적대자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1519년 루터 책의 출판 부수는 독일 전체 출판물의 3분의 1, 1523년에는 5분의 2에 달했습니다. 좀 더 넓게 잡아도 1500년대부터 1540년까지 독일의 전체 서적의 3분의 1을 차지합니다. (중략)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도 루터의 책을 샀습니다. 책을 사서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또는 '집단 독서'라고 하여 많은 사람이 한곳에 모여 루터가 번역한 성서나 그의 저작을 낭송하고 함께 들었습니다. 또한 아주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이 들어간 목판화 전단지가 살포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노래하거나 간단히 낭송할 수 있는 운이 들어간 텍스트가 쓰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민중 속으로 급속히 침투해 들어간 것입니다." (92~94쪽)

시간은 흘러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2017년, 누구나 원하면 성경을 구할 수 있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의 현주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하기만 하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 13:14)라는 성경 구절은 바로 한국 개신교를 향한 현재형 그리고 미래형 메시지가 아닐까. 이제 한국 사회에서는 개신교라는 말보다 '개독교'라는 말이 더 익숙한(?) 듯하다.

도대체 우린 성경을 왜 읽는 것인가? 우리가 텍스트를 읽는 이유는 그렇게 살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읽기 위한 읽기에 불과한가? 앞서 소개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저자 사사키 아타루는 루터의 성경 읽기를 다시 한 번 언급하며 우리를 일사각오의 읽기로 초대한다.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책을 읽었습니다.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까,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해도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던 것이지요. 책을, 텍스트를 읽는 것은 광기의 도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읽어 버린 이상 그것에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중략)

책을 읽는다는 것을 그 정도까지 예민하게 생각하면, 책을 읽고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혁명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104~105쪽)

500년 전 금서와 같았던 성경은 어쩌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2017년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금서가 아닌가! 누구나 성경을 가질 수 있고, 읽을 수 있지만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 내려는 자들이 희귀한 시대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지금도 금서다. 500년 전 종교개혁은 읽기 혁명이었다. 다시 성경을 집어 들자, 펼쳐 읽자, 그리고 마침내 "그렇게 읽어 버린 이상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외치며 살아 내자! 종교개혁은 기념할 것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 끊임없이 살아 내야 하는 진행형이어야 한다.

김성수 / 목사, 호모북커스 대표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