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쁜 하나님' 소개의 말

오늘의 한국교회는 정치적 타락, 종교적 부패, 신학의 허약함으로 인해 파산 직전에 몰려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신학, 신앙, 교회의 위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너머에 치유를 위한 열망 또한 숨 쉬고 있음을 부정해선 안 될 것입니다.

치유와 소생의 가능성을 경험하기 위해 오늘의 한국교회를 지배한 기복과 왜곡된 순수의 풍경을 동시에 전망하는 문학적 시도는 어쩌면 필연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이러한 시도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교회의 본령을 회복하는 사상적, 신학적 갱신 의지와 흐름을 같이한다고 확신합니다. <뉴스앤조이> 연재 소설 '나쁜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궤멸적 징후를 극사실적으로 해부하고 그 너머의 희망, 치유, 소망의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 소설가 주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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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느낌이 들었다. 십 몇 년 만에 다시 접한 곳이다. 처음 맞닥뜨리자마자 그를 파고든 강렬한 느낌은 낯섦, 그 자체였다.

지방 소도시라고 하기엔 율주시 중심가는 지나칠 만큼 번화했다. 내내 졸다가 열차 창문을 무겁게 내리덮은 커튼이 걷히는 순간이었다. 정민규의 시야를 압도한 건 번화한 도시 풍경이었다. 높게 솟아오른 고층 아파트와 고층 빌딩들이 즐비하게 도열된 도시 풍경은 얼핏 보기엔 서울 강남 테헤란로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이곳은 율주시다. 정민규는 곧이어 들려오는 열차 내 방송을 통해 이곳이 십 몇 년 전의 자신의 고향,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될 자신의 일터인 율주시란 사실을 실감했다.

'다음 역은 율주, 율주역입니다.'

안내 방송을 들은 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열차는 멈췄다. 자리에서 일어선 정민규가 꺼낸 건 낡은 샘소나이트 여행용 가방 한 개가 전부였다. 미국에서 인천공항으로, 인천공항에서 KTX를 타고 광명으로, 그곳에서 다시 율주까지. 길고 지난한 여정의 끝을 반기듯 정민규의 짐은 가볍고 그만큼 허탈했다. 정민규는 문득 14년 전의 이곳을 떠올렸다. 편도로 서울, 김포공항을 향하던 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에도 그의 짐은 지금과 비슷했다. 미국 유학을 작심하고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공항행이었지만 워낙 잡다하고 분주한 걸 병적으로 혐오하던 정민규는 그때에도 여행용 가방 한 개가 짐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 정민규는 가장 큰 하나의 차이를 느꼈다. 14년 전의 그의 손엔 약간은 두꺼운 분량의 책 두 권이 쥐어져 있었다. 크지 않은 손을 있는 힘껏 펼쳐야 악력을 이용해 지탱할 수 있는 정도의 양장본 책 두 권.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이란 책이었다.

하지만 14년이 지난 지금, 한국으로 돌아온 정민규의 손에 책은 쥐어져 있지 않았다. 손뿐만이 아니다. 샘소나이트 여행용 가방 안에도 책은 담겨 있지 않았다. 언제나 손과 눈에서 책을 떨어뜨리지 않았던 그였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책은 그의 마음과 영혼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마음과 영혼으로부터 떠난 책들이 그의 신체적 거리와도 멀어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던가. 문득 그 생각이 미치자 정민규는 왠지 모르게 선뜻 기차를 내리고 싶은 마음이 주춤거렸다. 결국에 내리게 되겠지만 과연 이게 옳은 선택인지에 대한 설렘과 불안이 삽시간에 정민규의 머릿속을 험악하게 어지럽혔다.

'나 제대로 온 거 맞아?'

자기 독백을 닮은 한 문장의 질문과 함께 정민규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 율주시 기차역의 풍경은 정말이지 낯설었다. 물론 14년 전의 풍경은 그대로였다. 오래된 입구의 미닫이문, '서울 첫차, 막차' 푯말이 수기로 쓰인 패널에 녹이 슬대로 슨 우동 국물과 떡볶이 냄비가 채 치워지지 않은 분식집, 그 분식집 옆에 다가가기만 해도 지린내가 날 것 같은 오래된 화장실 풍경까지. 14년 전에 정민규가 보았던 풍경 그대로였다. 하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매표소에도, 분식집에도, 오래된 화장실에도 오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정민규는 본능적으로 입구를 향했다. 반쯤 휑하니 열려 있는 역사 여닫이문 너머로도 이용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민규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라곤 그가 직접 끄는 여행용 가방의 바퀴 소리가 전부였다.

열차에서 내려 중간 정도 걸음을 옮긴 정민규는 입구를 코앞에 두고 멈춰 섰다. 열린 입구 문 너머로 보이는 살풍경이 그의 걸음을 자연스럽게 멈추게 했다. 거대한 대형 크레인이 입구 바로 앞을 막아선 장면 앞에 정민규는 자신이 들어선 역사 벽면 전체를 차지한 대형 플래카드를 뒤늦게 발견하곤 돌아서야 했다.

'舊(구) 역사 철거 진행 중. 新(신) 역사로 우회해 돌아가세요.'

고압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구와 신의 한자어가 우아한 궁서체로 새겨진 플래카드의 끝엔 열차에서 내린 정민규가 바로 스치고 지나왔던 우회 통로 방향을 화살표로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도 이제 끝이군. 하긴. 모든 게 새롭게 변하는 세상인데.'

이어폰을 귀에서 뽑은 정민규가 다시 방향을 돌려 플래카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그때였다.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낡고 오래된, 그 상태 그대로 방치된다면 오래지 않아 폐기 처분될 수밖에 없는 대합실 의자 한구석에 누군가 앉아 있는 모습이 정민규의 시선에 스치듯 지나갔다.

일러스트레이터 주원태

그저 스치고 지나갈 수 있다. 그런데 철거가 진행 중인 구역사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있는 그 누군가가 정민규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아는 사람도 아니었다. 별다른 해코지를 할 만한 위협이 될 만한 이도 아니었다. 대합실 우측면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그 누군가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많아야 고등학생 나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침울한 눈빛으로 무장한 그 아이 앞에서 민규는 우두커니 멈춰 섰다. 텅 빈 역사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여자아이에게서 민규는 도저히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퀭한 눈빛, 핏기가 싹 가신 창백한 얼굴에 유독 붉게 빛나는 입술. 오래된 역사를 홀로 지키고 있는 어린 소녀였다.

(계속)

*'나쁜 하나님'은 주 3일(월, 수, 금)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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