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용산참사가 발생한 지 8년이 지났지만, 한국 사회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강제 퇴거가 관행처럼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가로수길 우장창창, 옥바라지 골목, 아현 포차가 강제 퇴거되거나 퇴거 위기에 놓였다. 철거민을 돕는 활동가들은 '강제퇴거금지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용산참사 8주기를 맞아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와 녹색당이 1월 24일, 강제퇴거금지법의 취지와 법률 내용을 발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원호 사무국장(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과 이계수 교수(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녹색당 정책위원)가 발제를 맡았다.

이원호 사무국장은 강제 퇴거 문제에서, 버티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내쫓는 게 문제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UN "강제 퇴거는 명백한 인권침해"
예방 조치 권고해도 달라지지 않아

이원호 사무국장은 강제퇴거금지법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개발 정책을 펴 온 한국 사회와 강제 퇴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새 건물을 세우기 위해 이미 터전을 잡은 세입자를 내쫓는 일이 빈번했다. 용역들을 동원해 이사 갈 곳 없는 거주민의 집으로 찾아가 문을 떼고 창문을 부순다. 겨울에는 보일러를 훼손하기도 한다.

UN은 1993년, 강제 퇴거를 명백한 인권침해로 규정했다. 강제 퇴거를 막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하라고 각국 정부에 요구했다. 특히 한국에는, 1995년부터 세 차례 예방 조치를 권고했다. 퇴거 대상자가 임시 주거를 구하지 못했다면 개발하지 말라고 했다. 퇴거 전후 지켜야 할 가이드라인도 제시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원호 사무국장은 이제 강제 퇴거에 대한 패러다임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거주민은 돈 더 타 내기 위해 생떼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버티는 게 불법이 아니라 강제 퇴거 자체가 불법이다. 강제 퇴거는 주민에 대한 테러다."

이 국장은 강제 퇴거가 단순히 집·가게에서 쫓겨나는 문제가 아니라,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했다. 철거민들은 더 열악한 곳으로 가거나 아예 거주할 지역을 찾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발 사업 시행사나 용역은 거주민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 사무국장은, 터전을 빼앗긴 사람에게 재정착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강제 퇴거를 금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준비한 강제퇴거금지법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이 강제 퇴거로부터 보호받도록 하라 

△철거 개시 전 집이나 가게 시설 일부를 파괴하지 말라 

△퇴거·철거에 대한 강제집행, 행정대집행, 개발 사업에 대해 다른 법률보다 이 법률을 우선 적용하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강제 퇴거를 예방하고 거주민의 재정착 권리를 보장하라 

△지방자치단체는 거주민의 퇴거를 요하는 개발 사업이 시행될 경우, 개발 사업이 거주민 인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평가하라 

△개발 사업의 시행 주체는 거주민의 재정착 대책을 법원에 소명하라

이계수 교수는 강제퇴거금지법의 가능성을 소개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남아프리카공화국·독일의 모범
"소유권 생각하는 시각 달라져야"

이계수 교수는 한국 사회가 '소유권'을 바라보는 시각을 지적했다. 법 전문가 중에는 거주민의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강제퇴거금지법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강제퇴거금지법은 소유권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교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이제 소유권에 포함된 '사용'이라는 권능을 새롭게 봐야 할 때라고 했다.

"소유권에는 세 가지 권능이 있다. 소유자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소유물을 △사용 △수익 △처분할 수 있다. 소유권 개념에 '사용'이 들어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대개 사용보다는 수익과 처분에만 집중한다. 자기 소유물을 팔겠다는 데 그게 왜 문제냐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수익·처분뿐 아니라, 집이나 가게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소유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강제퇴거금지법이 소유권 자체를 부인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소유권을 구성하는 권능 중 무엇을 더 규제할 것인지 새롭게 접근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 규제는 국민의 의사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이계수 교수는 소유권 권능 중 '사용'을 중시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독일 헌법을 근거로 강제퇴거금지법의 가능성을 설명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헌법 제26조는 "모든 사람은 적당한 주거를 이용할 권리를 가진다"이다. 법원의 명령 없이는 누구도 집에서 쫓겨나거나 철거당하지 않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어떠한 법률도 자의적인 철거를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독일도 유사하다. 1991년 제정된 헌법 초안에는 "국가는 적절한 주거에 대한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문구가 나온다. 국가는 소득에 적합하게 임대료가 책정되게 할 의무가 있다. 또 인간다운 삶에서 주거가 갖는 의미를 유념해, 임대차 관계 종료에 관한 법률적 보호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계수 교수는 거주민을 우선시한 독일 법원 판결을 연이어 설명했다. 이층집을 소유한 한 집주인이 2층에 사는 세입자에게 나가 달라고 요구했다. 1층에 살고 있는 부모님을 자신이 직접 돌보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이었다면 세입자에게 불리한 상황이지만, 독일 재판부는 다른 판결을 내렸다. "자식이 직접 돌보는 것보다 부모님을 요양 병원에 모시는 게 훨씬 낫다"며 세입자의 손을 들어줬다.

이계수 교수는 "사람들 중에는 강제퇴거금지법이 꼭 필요하느냐고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보면) 이 법률은 꼭 필요하다. 지금 한국 사회는 많은 부가 가치를 얻기 위해 기존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짓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세입자에 대한 대책은 없다. 강제퇴거금지법은 거주민이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는 삶을 보장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