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씨네21>이 의미 있는 대담을 연재하고 있다. 남성이 다수인 영화계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을 주제로 10차례 대담을 진행했다. 이름하야 #영화계_내_성폭력. 지금까지 여성 감독, 여성 배우, 남성 영화인, 현장 스텝, 예비 영화인들이 참여해 영화계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문제를 짚었다.

그간 대담에서 나온 이야기는 상상 이상이다. 여성 영화인이 일하는 현장에서는 충격적인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감독이 술자리에서 여성 스태프에게 성희롱 및 성추행을 저지른다. 남성 스태프가 여성 배우 가슴을 보고 '빨통'이라고 표현한다.

심지어는 남성 배우가 연기 중 여성 배우를 추행하기도 한다. 실제로 한 여성 배우는 상대 배우가 자신을 성추행했다며 고소했다. 남성 배우가 가슴을 만지고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 넣은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사건이 남성 배우의 '연기 과몰입'으로 벌어진 일로 정당행위라고 판단했다. <씨네21>과 한국여성민우회가 이 문제를 두고 1월 16일 토론회를 열었다.

#영화계_내_성폭력을 주제로 긴급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에는 150여 명이 참가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합의하지 않은 연기
곧 성폭력

정하경주 소장(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은 "사전에 합의하지 않은 연기는 성폭력"이라고 주장하며 사건을 설명했다. 재판을 진행한 여성 배우는 감독에게 베드신이 없는 15세 관람가 휴먼 작품이라고 이야기를 들었다. 문제의 장면은 여성 배우가 극중 가정폭력을 경험했다는 점을 드러내는 신이었다. 남성 배우에게 목 뒤에 있는 멍 자국을 보여 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남성 배우는 감독에게 다른 지시를 받았다. 감독은 남성 배우만 따로 불러 옷을 찢으라고 지시했다. 여성 배우의 가슴을 움켜쥐는 듯한 손동작을 보이기도 했다.

정하 소장은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연기는 성폭력이다. 피해자는 강간 연기인지 알지 못했다. 감독과 남성 배우가 (여성 배우를 상대로) 몰래 카메라를 찍은 것과 다름없다. 연기를 지시한 감독은 행위(성폭력)를 교사하고 방조한 것이다. 남성 배우는 감독이 지시해서 연기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설령 그랬다 할지라도 남성 배우는 여성 배우와 소통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영화계_내_성폭력 대담을 진행한 <씨네21> 이예지 기자는 영화인을 만나면서 기사에 다 실을 수 없는 영화계 뒷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는 토론회 자리에서 여성 배우에게 미리 합의하지 않은 노출신을 찍자고 압박하는 감독의 행태를 꼬집었다.

"모델 출신의 한 배우가 영화 속에서 목욕탕 신을 찍었다. 감독이 그 배우에게 '모델 출신이니까 노출 부담이 없을 것 같다'며 가슴 노출을 제안했다.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지만 결국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감독이 이전에 상의하지 않은 장면을 제안할 때 여성 배우가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다들 너만 기다리고 있다', '촬영이 올스톱됐다'는 식으로 말하는 게 여성 배우에게 압박이 된다."

한 여성 배우는 이런 일도 겪었다. 입맞춤 장면인데 남성 배우가 딥키스를 했다. 신인이었던 여성 배우가 놀라자 오히려 감독이 그를 다그쳤다. 나중에 여성 배우를 현장에 적응하지 못하는 배우, 깐깐한 배우라고 낙인찍었다. 2차 피해를 겪은 것이다.

배우 곽현화 씨도 토론회에 참석했다. 그는 감독과 법적 공방을 벌인 이야기를 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토론회 현장에는 배우 곽현화 씨도 참가했다. 그는 영화 '전망 좋은 집'으로 감독과 법적 공방을 벌였다. 감독이 곽 씨와 빼기로 합의한 가슴 노출신을 '무삭제 감독판'이라는 이름으로 IPTV에 내보낸 것이다. 곽현화 씨는 감독을 고소했지만, 감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촬영 당시, 감독은 개그우먼 출신 곽 씨에게 "배우로 자리매김하고 싶지 않느냐. 이 장면이 영화에서 꼭 필요한 장면이다. 일단 찍고 나중에 빼 달라고 하면 빼 주겠다"고 말했다. 망설였지만 곽 씨는 촬영에 들어갔다. 이후 편집본을 봤는데 굳이 가슴 노출신이 필요 없어 보였다.

곽 씨는 감독과 이야기한 후 가슴 노출신을 영화에서 빼기로 했다. 그러나 극장 개봉 후, 감독은 IPTV에 '무삭제판'을 내보냈고 곽 씨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이 일은 곽 씨에게 상처가 되었다. 한 기자회견에서 감독은 곽 씨를 겨냥해 "'전망 좋은 집' 다음 작품에서도 상반신을 노출해 놓고 왜 그러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배우가 아니라 돈벌이 수단에 불과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곽 씨는 이제 이 문제와 관련해 더욱 자신의 소리를 내겠다고 했다. 영화계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이예지 기자는 이제 영화계가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여성 배우에게 미리 이야기하지 않은 장면을 불쑥 권유하는 것도 없어야 하고, 감독이 베드신을 촬영할 때 배우와 자세하게 의견을 공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좋은 예로 들었다. 박 감독은 베드신을 촬영할 때 여성 배우들과 앵글 위치까지 의견을 나눴다. 이후 가슴, 허벅지 등 신체를 찍는 기존의 베드신과 달리 얼굴에 초점을 맞춰 감정선을 더 드러내려고 했다. 이 기자는 이런 디렉팅이 많이 늘어나기를 바랐다.

안병호 위원장은 영화계에서 이런 사건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영화는 예술 아니다
배우가 일하는 일터다

안병호 위원장(전국영화산업노조)은 "영화는 예술이 아니다. 이제 예술 폄훼하는 이야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다. 이건 노동이고 나와 똑같은 사람이 일하는 일터다"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영화는 예술이니까 촬영 도중 일어나는 일들을 용인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지적한 것이다.

안 위원장은 영화계에서 일어나는 각각의 케이스를 다 설명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성폭력이 많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는 영화계에서 30년 전과 똑같은 패턴의 범죄가 지금도 생기는 게 한심스러운 일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영화계 성폭력 문제 중 하나로, 가해자가 대부분 드러나지 않는 점을 언급했다. 다른 예술계는 실명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영화계는 유독 실명이나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게 안병호 위원장 말이다. 사건이 발생해도 영화계 안팎에서 가해자를 언급하지 않으니 사건이 잠잠해지면 가해자가 영화 현장으로 돌아오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는 이런 패턴을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안 위원장은 "가해자가 더 이상 영화에 참여할 수 없다는 합의가 있지 않고서는 피해자만 생길 뿐이다. 피해자들이 계속 신고한다고 하더라도 조용한 소리로 묻힐 뿐이다"고 지적했다.

이번 토론회를 개최한 한국여성민우회는 여성연예인인권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2010년부터 여성 연예인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연예계에서 직접 성폭력 사례를 겪거나 비슷한 사례를 아는 이들에게 제보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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