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생명울배움터는 '생명을 살리는 교육'을 고민하며 2014년 교육문화연구학교를 시작했습니다. 2015년에는 생명의 교육을 일구기 위한 동력을 얻기 위해 '나' 자신부터 교육하고자 '공적 글쓰기'를 주제로 교육문화연구학교를 열었습니다. 올해는 '역사'를 공부합니다. 2017년 19대 대선을 앞두고, 이 땅이 나아갈 길에 대해 다시 한 번 수렴과 응집의 점을 찍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떤 걸음을 걸어왔는지, 지난 과거를 다시 돌아보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다시 가늠하려 합니다. [2016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생명의 교육, 역사 위에 서다] '역사-과거 현재 미래'는 9월 24일부터 2017년 1월 21일까지 총 19회 진행합니다. - 필자 주

헌법재판소 소장과
8명의 재판관에게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가결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심판을 위해 애쓰고 있는 박한철 소장, 조용호 재판관, 서기석 재판관, 이진성 재판관, 김찬종 재판관, 이정미 재판관, 안창호 재판관, 강일원 재판관, 김이수 재판관. 나는 1392년부터 1910년까지 한반도를 통치했던 왕조,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다.

내가 그대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2016년 대한민국의 민중들이 스스로 깨치고 일어나 촛불을 밝힌 까닭이요, 새 시대를 갈망하는 이 촛불들의 함성이 어둠 속에서 잠들고 있던 나를 깨운 까닭이요, 그들의 함성이 국회를 지나 헌법재판소에 도달하여 그동안 반복해 왔던 속임과 기만, 거짓의 역사를 청산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대들은 탄핵 심판을 어떠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는가. 이 심판을 탄핵을 인용하느냐 기각하느냐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가. 대통령만이 심판대 앞에 놓여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대들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이것보다 더 깊고 중대한 역사적 심판대 앞에 놓여 있다고 나 조선은 생각한다. 이 땅에 정의를 다시 세울 것이냐 말 것이냐, 사대·당쟁·매국·친일·친외세·군부독재·유신·반민족·반노동·정경유착·부정부패·자연 파괴·생명 경시의 적폐를 청산할 것이냐 못할 것이냐, 그리하여 새 시대를 열 것이냐 말 것이냐의 심판 말이다.

사도(思悼),
어린아이의 죽음을 생각하라

이 중대한 심판의 때에 새들생명울배움터가 개최한 '2016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자기 안의 박근혜, 최순실과 싸우려 노력하는 것이, 스스로를 심판대 앞에 세우고 철저히 자신의 모습을 돌이키고자 하는 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새기며 이 땅의 정의가 속히 회복되기를 바란 것이, 나 조선으로 하여금 붓을 들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016년 12월 16일, 최봉실 대표는 교육문화연구학교 '역사-과거 현재 미래' 열세 번째 시간( <뜻으로 본 한국역사> 세 번째 시간)을 시작하며 나 조선의 오백 년 역사를 가슴 아픈 역사라 했다. 의인들이 하나같이 죽임당했던, 특히 어린 왕자들까지 정쟁에 휘말려 죽임당할 수밖에 없었던 아픈 역사라 했다. 그는 비극의 정점에 사도세자가 있다며, '사도'의 생각할 '사(思)'와 슬퍼할 '도(悼)'를 한자를 풀어 설명했다.

"사랑하다, 슬퍼하다, 가슴 아파하다, 그리워하다 이런 모든 정서를 나타내고 있는 한자가 생각할 사(思) 자입니다. 생각할 사(思) 자는 밭 전(田) 자와 마음 심(心) 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저의 추론입니다만, 이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마음이 같이 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만 붕 떠 사는 게 아니라, 밥 먹고 일 할 것 다 하면서 슬픔을 품고 살아가는 것,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슬퍼할 도(悼) 자는 특별히 어린 아이의 죽음을 나타내는 글자이기도 합니다. 어린아이의 죽음을 겪었을 때 들 수 있는 정서가 모두 포함됩니다. 안타깝고, 슬프고, 가슴 아픈 정서 말입니다."

최봉실 대표는 '사도'의 생각할 '사(思)'와 슬퍼할 '도(悼)'를 설명했다. 사진 제공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이를 듣고 나 조선은 2014년 4월 16일 어린 학생들이 죽임당했던 세월호 참사를 떠올렸다. 대한민국 전체가 비참에 빠졌던 사건, 생명보다 생명 이외의 것을 우선시했기에 발생했던 사건,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겠다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반성케 했던 사건, 하지만 시간이 흘러 점차 그 짐의 대부분을 유가족에게 짊어지게 했던 사건.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한 생명권 보호 의무 위반이 대통령의 탄핵 사유가 되어 그 심판을 앞두고 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1,000일이 지났다. 유가족들이 그 긴 시간 동안 슬픔을 품고 자신의 생을 견디며 저항했기에 그 정신이 수백만 촛불로 다시 밝혀질 수 있었다고 나 조선은 생각했다.

하지만 박근혜 피청구인은 탄핵소추안에 대해 자신의 탄핵 사유를 모두 부인했다지. 세월호 7시간에 대해서 "청와대에서 정상근무를 하면서 피해자 구조를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지시했다"는 답변서를 제출했다지. 무수한 이들의 죽음을 통해서도 뉘우치지 못하는 인생은 얼마나 비참한가. 죽음을 바라보고도 제 잇속 차리기에 급급한 인생은 그 얼마나 비참한가.

하지만 이렇게 비참함을 토로하는 것만으로 끝내서는 안 되는 것은, 역사는 무고한 이들의 죽음의 값, 그 죄의 값을 반드시 묻기 때문이요, 죽음으로부터 깨우칠 때까지 묻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함석헌 선생은 한 사람이 잘못한 값을 모든 사람이 물어야 하고 한 시대의 실패를 다음 시대가 회복할 책임을 진다고 말했다.

"민족 안에서는 너와 나의 다름이 없다. 시대의 차이도 없다. 왕조의 구별도 없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잘못한 값을 모든 사람이 물어야 하고 한 시대의 실패를 다음 시대가 회복할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다. 책에 써야만 역사가 아니라, 나의 생이 곧 과거의 기록이요, 내가 난 시대가 곧 전 시대에 대한 판결문이다. 생이란 곧 지금까지의 모든 시대와 개인이 진 빚을 대맡으마 하는 약속 밑에 받은 선물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276쪽)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이날, 교육문화연구학교 모둠별 토론 시간에 참석자들은 사육신과 이순신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다. 사육신은 누구인가.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차지했을 때 이에 불복하여 단종 복위를 꾀한 여섯 충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이개이다. 변심한 김질에 의해 일이 그릇되어 모두 잡힌 후 세조의 문초에 말로 못할 악형을 받고 사형을 당함으로 의의 피를 뿌린 이들이다. 이 일을 두고 함석헌 선생은 오백 년 부끄러움도 이 한 사실이 있으면 다 갚고도 남을 수가 있다고 했다.

"과연 그들은 한국을 위하여 불의의 값을 문 사람들이다. 의는 값없이 그저 없어지는 일이 없다. (중략)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오는 불의의 열매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중략) 짓밟힘을 당한 의에 대하여 그 값을 요구하는 것은 의의 근원인 하나님 그 자신이다. (중략) 의인의 피를 요구하는 데는 값을 받는다는 것보다 한층 더 깊은 뜻이 또 있다. 그것은 의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의는 생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함에 의해서가 아니요, 버림에 의하여 얻어지는 생명이다." (275~277쪽)

실로 그러하다. 사육신은 죽음으로 불의의 값을 물었건만, 조선의 불의한 위정자들은 그들의 죽음을 보고도 잘못을 반성하지 않았다. 민중은 반응하는 바가 많았으나 불의한 권력자들의 마음은 더욱 완고해졌다. 이때부터 서로 불안해하며 의심하고 시기하는 일이 심해졌다. 당파가 나뉘고 당쟁과 사화로 치닫는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소용돌이가 시작되었다.

반성하지 못한 조선에 임진왜란이라는 큰 환난이 닥쳤다. 그러나 하늘은 이순신이라는 살 길을 마련해 두었다. 그는 효성이 깊고, 의기 높고, 사(私)를 죽이며 공(公)을 살리는 충의의 사람이요, 청절의 사람이었다. 그는 백성을 살리기 위해 그 사명의 마지막 싸움까지 다 싸우다가 다시 하늘로 불려 갔다. 이 환난에 반응을 보인 것도 민중이었다.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조헌 그리고 무수히 많은 무명의 영웅이 의병으로 일어났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지배자와 지도 계급의 당파 싸움만은 계속되었다. 이후로도 많은 의인들이 피를 흘렸으나, 그들은 일체 치하에 놓여 나 조선이 망하게 될 때까지도 장차 올 세상에 대한 계획 없이, 끊임없이 반목하고, 지금 당장의 기득권 유지에만 정신이 팔려, 나라도 팔아먹고, 제 백성도 팔아먹었다.

이는 2016년 대한민국에까지 이어져 온 현실이 아닌가. 국가기관인 대통령이 사사로운 관계를 기반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사적 이익을 취해 온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하여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 '무죄 추정의 원칙'을 운운하며 탄핵 심판을 개인의 신분으로 대응하려 하는가. 이는 대통령이 자신을 사적 존재로 생각해왔음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것 아닌가.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을 잘 알고 있었던 부역자들–일부 공무원, 정치인, 언론, 재벌, 학계도 그릇된 정권에 빌붙어 자신들의 잇속만을 챙기지 않았나.

"이놈들이 무서운 것은 외국이 아니요, 나라 안에 큰 인물이 생기는 일이다. 외국은 강해지면 거기는 식민지로 복종하면 그만이므로 그들에게는 전쟁에 지는 것도 걱정이 되지 않고 나라 주권이 없어지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놈들에게는 오직 누가 올바르고 위대한 어떤 사람이 나서 자기네 세력을 빼앗을까 봐 그것만 걱정이었다." (328쪽)

생의 무게
일상의 무게

교육문화연구학교 참석자 모두는 애도하는 마음을 담아, 나 조선에게 편지를 썼다.

하늘이 삼문(성삼문)을 향해 물었다지.
났느냐, 났느냐, 났느냐.
세 번 물어 이름이 삼문이라 했다.
나는 너를 향해 묻고 싶다.
너는 모든 병폐로부터
낫느냐, 낫느냐, 낫느냐.
회칠한 무덤을 깨고
나왔느냐, 나왔느냐, 나왔느냐.
함석헌 선생은 지금 우리가 너의 일을 결정한다 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 너를 향한 물음은 곧 나를 향해 온다.
너는 죄로부터 그 곪아 터진 뿌리 깊은 죄의 병으로부터
나았느냐, 나았느냐, 나았느냐.
너는 역사의 진실 앞으로 빛 된 뜻 앞으로
나왔느냐, 나왔느냐, 나왔느냐.
(윤희윤 씨)

조선아, 너의 긴 이야기 함(함석헌)선생님께 전해 들었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네?
여기저기 얻어터지고 깨지고 피 흘리기까지.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여기까지 왔네.
때론 하늘이 원망스러웠겠지 너무 고달파서.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그게 하늘의 사랑임이 더 진하게 느껴지네.
네가 품고 있는 이 민족을 참으로 살리기 위해 바른 대답이 나올 때까지
묻기를 그치지 않는 애끓는 하늘의 사랑이 느껴져.
그러니 포기하지 말자.
하늘이 우리를 굽어 살피시고 사랑하시니 맑아지기를 포기하지 말자.
주신 때를 놓치지 말자.
(김난희 씨)

참석자들은 편지에 나의 역사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담았다. 하지만 그들의 편지는 애통해 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윤희윤 씨는 나의 안부를 물었다. 모든 병폐로부터 나았는지,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은 무덤이었던 역사로부터 나왔는지 물었다. 또한 지금의 역사는 뿌리 깊은 죄의 병으로부터 치유되었는지, 진실 앞으로, 빛 된 뜻 앞으로 나왔는지 물었다. 김난희 씨는 맑아지기를 포기하지 말자고, 주신 때를 놓치지 말자고 했다.

김난희 씨는 맑아지기를 포기하지 말자고, 주신 때를 놓치지 말자고 했다. 사진 제공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조선아, 너 너무 억울해하지 말아라.
너의 사명 한 알의 밀알 되어 썩어지는 것이었으니.
조선아, 너 너무 억울해하지 말아라.
내 안에 사육신과 이순신 그리고 임경업의 혼 살아있으니.
조선아, 너 너무 억울해하지 말아라.
모든 시대와 개인이 진 빚을 청산할 생의 선물 주어졌으니.
(김성택 씨)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어쩌면 너는 깊고 깊은 밤에 파묻혀서 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조용하고 밝은 가운데서 너의 걸음을 다시 곱씹는 것이 얼마나 아픈 일인가.
만약이란 없기에 깊은 밤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나는 너를 등에 지고 걸어간다.
만주 벌판으로.
(이재호 씨)

어떤 이들은 애통하는 마음을 딛고 일어서 나 조선의 못다 이룬 뜻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고백했다. 김성택 씨는 자신에게 사육신, 이순신, 임경업의 혼이 살아있으니 억울해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의 생을 통해 빚을 청산하겠으니 억울해하지 말라고 했다. 이재호 씨는 나 조선의 짐을 등에 지고 걸어가겠노라 다짐했다.

김성택 씨는 자신의 생을 통해 빚을 청산하겠으니 억울해하지 말라고 했다. 사진 제공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슬픈 마음을 품고 자신의 주어진 생을 혼신의 힘으로 살아가겠노라 고백하는 이들의 편지는 나 조선을 충분히 위로해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들에게 답장을 보내는 대신 새로운 편지를 쓰기로 했다.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 소장과 8명의 재판관들에게.

또한 이들은 나의 역사를 애통해하고, 나를 위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과제와 함께 그것을 한 주 동안 어떻게 실천했는지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최한솔 씨는 생의 무게가 결국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의 무게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래서 매일매일의 일상을 돌아보기 위해 성찰 일기 쓰는 것을 실천 과제로 삼아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많은 참석자들이 성찰 일기를 쓰겠다고 했다. 이동원 씨는 성찰 일기는 자신이 옳은 길로 가고 있는지, 그른 길로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기록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이 성찰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양하늘 학생(13세)은 자신의 실천 과제를 '의인이 되는 것'이라 말했다. 그는 세조 때, 온 백성과 온 신하들이 비정상이었기 때문에 정상이었던 김시습이 미치광이로 보였던 것을 이야기하며, 김시습과 같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의인이 되어야만 역사를 부끄러워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스스로에 대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 하는 모든 작은 다짐들을 엄청난 무게로 여기고 힘써 지키겠다고 말했다.

김종우 씨는 "모르겠다"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습관적으로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계속해서 뜻을 찾고 뜻을 구하며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을 철저히 정의하고 밝혀내는 노력을 하겠다고 했다.

김종우 씨는 "모르겠다"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사진 제공 새들생명울배움터

이들의 나눔에 앞으로의 생에 대한 간절함이 묻어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들은 왜 그토록 일상의 삶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실천 과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가. 그것은 나 조선이 오백 년 동안 끝내 이루지 못했던 과제들을 이뤄 내겠다는 것이고, 내가 이루었던 것들을 계승하겠다는 것 아닌가. 하나가 되자는 것이고, 굳건한 주체로 서자는 것이고, 삶의 토대 위에 깊이 뿌리내리자는 것 아닌가. 내가 못다 이룬 과제는 무엇이며, 또 이룬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모든 참석자들이 실천 과제를 발표하고 조선에게 쓴 편지를 낭독한 후, 최봉실 대표는 고려가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듯 조선도 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했다. 고려는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처음으로 민족을 통일시킨 나라였다. 그런 고려에 주어진 책임은 온전한 하나를 이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끝내 계급제도를 타파하지 못하고 하나를 이루지 못한 채 망국이 되었다. 뒤이은 조선도 이를 이루지 못했다. 조선은 유교라는 더 큰 인(仁)의 가치를 내세우면서도 오히려 더 하나 되지 못하고 당쟁, 분당, 사화 등으로 더욱 분열되었다.

함석헌 선생도 속에 산 혼, 스스로 하는 정신이 빠지면 선왕지도는 견마지도(犬馬之道)일 뿐이요, 충의 도덕은 종놈이 지는 사슬이요, 삼강오륜은 얽어매 놓고 해먹는 도둑놈의 밧줄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은 민족적 큰 이상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상이 없는 것은 자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요, 자기를 찾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이 자아를 잃어버렸다는 일, 자기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이 일이 백 가지 병, 백 가지 폐해의 근본 원인이 된다. 나를 잊었기 때문에 이상이 없고 자유가 없다. 민족적 큰 이상이 없기 때문에 대동단결이 안 된다. 민족을 묶어 매는 것은 폭력이나 법이 아니고 민족적 이상이다. 뜻이 하나일 때 통일은 저절로 된다." (297쪽)

하지만 최 대표는 조선이 이룩한 일에 대해서도 말했다. 조선이라는 시기는 장차 만나게 될 외세, 특히 서양을 맞을 준비를 해야 했던 시기였다. 그는 비록 정치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에는 실패했으나 한글이라는 고유 언어를 만들고, 이기론과 이리론이라는 고유한 사유 체계를 확립한 것은 나 조선을 온전한 주체로 서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고 했다. 언어와 사유 체계를 확보함을 통해 자아가 온전한 주체로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에 이상을 두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최봉실 대표는 나 조선이 못한 것을 이루어 내고 한 것을 계승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며 고려와 조선이 우리에게 그 뒷일을 부탁한 것이라고 말했다. 언어와 사유 체계를 기반으로 스스로 일어나 자아를 굳게 세워야 할 책임, 민족적 이상으로 온전히 하나 되어 세계와 자유롭게 만날 책임, 모든 나라와 평화의 시대를 만들어 갈 책임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심판대에 세우는 이 누구인가

"충신을 죽이고 의사를 죽이고, 나이 어린 조카와 동생도 개·돼지 잡듯 죽이고, 그리고 임금이 된 세조도 개인 도덕으로만 보면 저것도 사람이냐 하는 생각이 나지만 결국은 그도 역시 역사의 무대 위에서 맡은 일을 한 것뿐이다. 오직 그 맡은 일이 악한이었음이 좀 미안한 일이요, 그것은 누구나 스스로 제 양심을 먼저 죽인 놈만이 맡은 것이 용서를 못 받는 이유일 따름이다. 그는 가리옷 유다, 가야바, 네로와 한가지로 '그런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 사람은 차라리 세상에 나지 않았던 게 좋을 뻔한 사람'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에 의해 제 갈 곳으로 간다." (267~268쪽)

최봉실 대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하나님은 기다릴 수 있는 만큼 기다리고 기다려서 사람이 자신의 흘러넘치는 마음으로 기껍게 하는 것을 원한다고 했다. 하지만 자유의지를 낸다는 것은 그냥 되는 게 아니라 했다. 괴롭게 결단하고 또 결단해야 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의인이 되는 것 또한 마찬가지라 했다. 박준영 변호사와 박상규 기자가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하면서 사회 약자들의 재심사건에 전념한 것을 예로 들었다. 엄청난 노력과 엄청난 싸움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라 했다.

그는 악인도 자기 의지를 내서 악인이 된 것이라 했다. 김기춘, 최순실 같은 사람들을 날 때부터 악인으로 난 것이 아니라 했다. 이들은 거짓과 속임이 얼마나 몸에 배었으면 뻔히 드러난 일을 가지고도 청문회에서 기억이 안 난다, 사실이 아니다, 모른다 말할 수 있느냐고 했다. 악인들은 엄청난 노력과 무수한 선택들에 의해 악인이 된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조와 같은 악인도 역사를 구원한 하나의 역할로 쓰인 것이라 말할 때, 이 말을 하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떨지 생각해보라 했다. 자유의지로 악인이 의인되기를 바라지만, 기어이, 기어이 악인의 길을 걷는 이는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정당화 할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이 애통한 마음으로 너의 악행도 내가 썼다 할 때조차도. 그러면서 최 대표는 이 모든 역사의 파란만장한 음과 양의 현실 속에서 이 의인들의 자기 목숨을 바치는 끊임없는 희생의 역사가 악인들의 죄까지도 상쇄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고 했다.

여기서 만족할 수 없다. 정의를 바로 세우고, 그동안의 적폐를 청산하여 새 시대를 열 기회는 거저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단이 대한민국 헌법 제1조(국민주권주의)의 내용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탄핵 사유가 될 수 없음을 답변서에 적었다고 나 조선은 들었다. 구체적인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국민 한 명 한 명이 자신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 받았거늘, 박근혜 대통령 및 그 부역자들이 국민의 주권을 실제적으로 훼손하였거늘, 저들은 어찌하여 헌법 제1조를 추상적이라 하는가. 헌법이 공포되고 시행되기까지 흘린 피 역시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소추 사유를 '비선조직에 따른 국민주권 위배', '대통령의 권한 남용', '언론의자유 침해', '생명권 보호 의무 위반', '뇌물 수수'의 5가지 쟁점으로 정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시름 놓았다. 세월호 7시간의 행적을 소상히 밝힐 것을 요청했다는 소식에는 속이 시원했다. 가장 최근에는 최대한 공정하고 신속하게 결론을 내리겠다고 했다지. 정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은 그대들의 결정에 나 조선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최봉실 대표의 말처럼 그렇게 괴롭게 결단하고, 엄청난 노력과 싸움을 할 때 그대들은 시대의 의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나 조선은 여기서 만족할 수 없다. 정의를 바로 세우고, 그동안의 적폐를 청산하여 새 시대를 열 기회가 거저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 시기를 지난 역사에서처럼 놓치게 된다면 또 언제 그 기회가 주어질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과 이 땅이 비극을 감당하며 제 삶을 오롯이 살아가는 이들에 의해 이어져 왔음을 박한철 소장, 조용호 재판관, 서기석 재판관, 이진성 재판관, 김찬종 재판관, 이정미 재판관, 안창호 재판관, 강일원 재판관, 김이수 재판관은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며 편지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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