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

1년 이전 기사를 검색하기 원하시면 + 버튼을 눌러 주세요.
참된 스승에게 배우는 참된 공부의 비결
[서평] 차정식 <예수 인문학>(새물결플러스)
  • 이원석 (dkdndn2@naver.com)
  • 승인 2017.01.11 10:55
  •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예수 인문학>(새물결플러스)은 한때 뜨거운 감자였다. 이 책을 둘러싼, 그러나 책 자체와는 무관한 논란의 파고(波高)가 높았다. 그 결과로 <예수 인문학> 자체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제 많은 시간이 지났고, 논란도 잦아들었다. 지금이라도 <예수 인문학>에 대한 차분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본다. <예수 인문학>은 심층적으로 논의될 만한 가치가 있는 저작이다.

예수의 공부법

일단 제목부터 살펴보자. <예수 인문학>은 어려운 제목이다. 예수는 헤브라이즘의 적자(예수는 그리스도, 즉 메시아시다)이고, 인문학은 헬레니즘의 정수이다. 물론 아가페와 에로스가 만나서 교호 작용을 일으켜 창조적으로 결실을 맺는 것은 당장 서구 지성사가 보여 주는 현실이다. 그러나 당장 우리가 이 제목으로 어떠한 정보를 포착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예수와 인문학 사이에는 이 두 어휘를 하나로 묶어 주는 어떤 조사가 있을 것인데, 제목에는 그것이 생략되어 있다. 이럴 때에 단초가 되는 것은 목차이다. 50개의 장 제목이 나열된 목차가 보여 주는 일련의 주제들에 비추어 본다면, 아마도 예수와 인문학의 사이에는 접속조사 '와'가 아니라, 격조사 '의'가 생략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인문학>은 사실 '예수의 인문학'인 셈이다. 이것은 다시 예수의 인문학적 컨텐츠(내용)를 가리킬 수도 있고, 예수의 인문학적 태도(방법)를 지칭할 수도 있다. 목차와 본문에 따라서 보자면, 아무래도 방법에 치우치는 듯하고, 또한 인문학이 지시하는 영역은 교육학으로 보인다. 이를 더 분명하게 말하면, 예수의 공부법과 교수법이다.

"예수는 자신의 몸을 끌고 움직이며 부리는 동선을 통해, 그리고 바깥 사물과 현상에 대한 일상적 관찰을 통해 가르쳤다. 또 그는 묵시의 하늘과 지혜의 땅을 두루 조망하는 원근법적 통찰로 그 공부가 전체를 지향하면서 앎의 지경을 확대·심화해 나가는 개인의 경험임을 깨우쳐 주었다. 이를 위해 그는 주로 비유와 어록의 형식을 통해 암시와 압축의 교수법에 바람직한 공부법의 실례들을 담아내었다." (11쪽)

이의 근간(根幹)이라 할 수 있는 일련의 강의에 달린 제목이 '예수의 공부법'이다. 박사과정에 입학한 제자에게 차정식 교수가 들려준 이야기가 자라서 연속 강좌로 구현되고, 다시 책자로 묶여 나온 것이다. <예수 인문학>보다는 (처음에 강의 제목으로 제시되었던) <예수의 공부법>이 훨씬 더 적절한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아쉬움이 없지 않다.

<예수 인문학> / 차정식 글, 유영성 그림 / 새물결플러스 펴냄 / 316쪽 / 1만 6,000원
구도자적 현자로서의 예수

<예수 인문학>은 총 50개의 장으로 구성된 일종의 묵상집이다. 저자 차정식 교수가 미국 텍사스에 있는 브라이트신학대학의 루스 스칼러(Luce scholar)로 초빙받아 가서 체류하는 동안에 집필한 것이다. 서론격인 1장(교학상장과 점입가경)을 제외하면 모든 장마다 복음서에서 발췌한 구절을 내걸고, 이에 대해 풀어 가는 가운데 예수의 공부법의 전모를 재구성한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학습법에 대한 실용적인 매뉴얼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저자가 제공하는 것은 구체적인 기술이 아니라 근본적인 방향에 가깝다. 교육 방법론이라기보다 차라리 교육철학이다. 하지만 그 철학의 근거가 복음서이다. 복음서에 대한 깊은 묵상을 통해서 예수님의 학습법과 교육학을 구명한다. 나는 이 묵상이라고 하는 방식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교과서 형식이 아니라 묵상집 형식을 채택한 결과, <예수 인문학>은 체계적이라기보다 단편적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사유의 여러 단편들이 각기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의 편린들이 서로를 되비추면서 큰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 50개의 조각을 하나로 조립할 때에 드러나는 그림은 바로 구도자적 현자로서의 예수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하나의 예수상을 재구성하는 학구적 노력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저자는 일이관지(一以貫之)하게 한국교회의 현실에 기초한 나름의 문제의식을 밀고 나간다. 여러 조각으로 흩뿌려져 있는 단상들을 하나로 묶는 열쇠가 되는 그의 문제의식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목회적인(혹은 예언자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나는 예수의 전체 모습을 아닐 망정 이처럼 공부와 해석을 중시하고 제자들에게 꾸준히 삶의 길을 구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리길 종용했던 구도자적 현자로서의 엄연한 예수 전승이 우리 한국 기독교의 신앙 세계에서 거의 실종된 모습이 안타까웠다." (8쪽)

"예수의 실종된 전통 한 가닥을 꼭 언급하고 거기에 물꼬를 대고 싶었다"던 저자의 바람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성숙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함께 살아가며 공부하던 제자 공동체의 회복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수를 통하여, 예수와 함께 이드거니 어울리며 말씀을 공부하고 깨우침을 사모하는 현장"(8쪽)일 것이다.

바른 제자도는 바른 기독론과 함께 간다. 차정식 교수는 한국교회에 실종되었던 전통인 '구도자적 현자로서의 예수 전승'을 주목하고, 참된 스승이신 예수를 바라보게 한다. 우리는 모두 예수의 제자이다. 혹은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개독교란 예수(의 삶과 정신)를 따르지 않는 교회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본심과 무관한 잡것들"(9쪽)이 개독교이다.

예수의 본심과 무관한 잡것들

논란이 되었던 구절, "예수의 본심과 무관한 잡것들"은 예수 당시에는 "선민이란 종교적 자부심에 취해 하나님도, 그분의 왕적인 통치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7쪽) 이들이다. 예수는 전통에 대한 "앵무새 같은 맹목적 순종이나 복창"으로 특징되는 이런 종교인들에 대해 "갑갑함, 또 그로 인한 탄식과 분노"(7쪽)를 느끼셨다. 솔직히 지금이라고 달라진 것은 없는 듯하다.

"승자독식주의가 우리 교회 안팎에도 기승을 부리"고 있는 지금 시대에는 "한 가지 주류의 트렌드가 이런 가물가물한 진리의 그늘을 압도하고, 그 결과 거칠고 단선적이며 폭압적인 무례와 무지의 자세가 뜨거운 신앙으로 기세등등한 세태를 양산하고 있는"(8쪽) 군중과 지도자들에 적용된다. 그들은 복음의 실질이 아닌 특정한 사안으로 평가하고 맹목적으로 단죄한다.

예수는 "구약시대에서 이어진 토라의 전통에 담긴 핵심 유산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심사숙고해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에는 앵무새 같은 맹목적 순종이나 복창 대신에 전통에 대한 (재)해석이 있었고 요약이 있었다."(7쪽) <예수 인문학>은 예수의 "간단명료하면서도 꽤 심오한 앎의 선물"(8쪽)을 조근조근 따져가면서 이를 통해서 "예수의 본심"을 보여 주고자 한다.

십자군의 기치를 높이 세운 폭력적 근본주의의 멘탈리티와 구별되는 예수의 본심을 드러내고자 함에 있어서 저자는 참고문헌을 들춰 보지 않고 각주 없이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미국의 한 신학교에 초청받아 반년간 체류하면서 쓴 글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정당한 (그러나 의혹을 사고 있는)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나는 어설픈 흉내내기로서의 공부가 한없이 역겨웠고 서구 신학의 영웅적 장삼이사들이 구축한 세계에 하나마나한 수준에서 잡다한 각주를 다는 식의 학문이 불쌍했다." (9쪽)

이에 대한 항간의 (의심의 해석학에 기반한) 비판적 독해에 대해 모르는 바가 아니다. 저자는 명백하게 부인했지만, 어쩌면 저자의 의식 저변에는 그런 측면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나 저자의 문제의식은 그 자체로 정당하고, <예수 인문학>에서 시도된 글쓰기는 그 문제의식에 공명한다. 저자의 술회(述懷)는 공감의 해석학으로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논란이 된 단어를 계속 활용하여 말하자면, <예수 인문학>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예수의 본심이다. 이는 앞서 말한 대로 예수의 공생애 기간을 채운 핵심 사역(교육과 치유)의 본질적인 주제에 연결될 것이다. 그 "일관된 주제는 하나님나라(천국)였고, 하나님의 그 왕적인 통치가 이 땅의 삶에 실현되는 결과로서의 구원이었다."(7쪽)

뒤를 잇는 구절은 이렇다. "예수의 갑갑함, 또 그로 인한 탄식과 분노는 주로 당대의 사람들이 선민이란 종교적 자부심에 취해 하나님도, 그분의 왕적인 통치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7쪽) 이게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재현되는 현실이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한국교회는 예수의 본심이 아니라 예수의 문자를 비틀어 읽고 있다.

이는 비단 개독교로 불리는 이기적인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부터가 말씀의 정신을 버리고 그 문자만을 취하는 우둔함으로 예수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고 있지 않나 돌이켜볼 일이다. 이 시점에서 요청되는 것은 선생 되신 예수에 대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이다(선생 되신 예수에 대한 순종과 구주 되신 예수에 대한 믿음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신자일 뿐만 아니라(저자는 36장에서 "믿음이란 도그마"(224~225쪽)를 경계하며,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이기도 하다. 사제 관계야말로 예수와의 관계 맺음의 기본 양태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맥락에서 요청되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 따름, 즉 제자도의 영성이다(존 스토트는 아예 영성 대신에 제자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내 부실한 삶의 열매와 빈곤한 공부의 결실을 반성하는 새벽녘 고요한 시각, 내 다급한 기도 제목은 예수와 더불어 공부하여 그의 공부법에 신입생으로 다시 입문하는 것이다. (중략) 다시 참신한 탐구자가 되라고, 결기 충만한 구도자로 공부길 위에 우뚝 서보라고 예수의 영이 지친 내 등을 떠밀고 있다." (16쪽)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

스승으로서의 예수상은 마태복음에 잘 드러난다. <예수 인문학> 중 총 서른두 장(64%)이 마태복음에 할애되고, 그중 스물여덟 장이 마태복음의 다섯 강론에 집중된 이유이다. 이 다섯 편의 강론은 모세오경에 상응하는 것은 예수와 모세의 관계에 연원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옛 계명을 전했고, 예수는 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

산상수훈(5-7장)은 열일곱 장(3, 6, 8~14, 15~22)에서 다루고, 그중 일곱 장(8~14)은 주기도문을 다룬다. 파송설교(10장)는 네 장(24, 26~28)이고, 천국 비유(13장)도 네 장(30, 32~34)이다. 또한 공동체 강설(18장)이 두 장(4, 7)이며, 종말 강론(23~25장)은 한 장(38)이다. 그 외의 다른 본문은 네 장(23, 25, 38, 45)에서 다룬다.

마가복음(4, 25, 29, 31, 40, 42~46, 49. 50)과 누가복음(2, 5, 23, 35~37, 39, 49)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고 있다(더욱이 부분적으로 마태복음 본문과 중첩된다). 심지어 요한복음을 다루는 본문의 경우는, 고작 세 장(41, 47, 48)에 불과하다. 이렇게 <예수 인문학>이 마태복음에 집중하는 것은 마태복음의 예수상(스승)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예수가 스승이고, 신자는 제자이며, 제자로서의 신자의 신앙 여정은 스승이신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공부 여정이다[내가 <공부하는 그리스도인>(두란노)을 통해 재구성하여 보여 주고자 한 것이 바로 이러한 제자 됨 속에서의 신앙 여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부의 목표는 무엇인가? 공부의 "최상급의 목표라 할 만한 주제가 바로 자유다."(291쪽)

저자는 이 지점에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선포"(293~294쪽)하는 요한복음의 예수에 천착한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8:32). 이를 위해 진리는 체득(體得)되어야 한다. 체득의 과정은 짐을 지고 멍에를 메고 따르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자유는 마태복음의 순복을 전제한다. 제자는 스승의 (쉽고도 어려운) 짐과 (가볍고 무거운) 멍에를 져야 한다(11:29-30).

"자유가 하나님의 선물이란 말은 맞다. 자유가 인간의 투쟁의 산물이란 말도 맞다. 그러나 자유가 '진리'를 매개로 추구되어야 할 실험과 공부의 대상임도 동시에 알아야 한다." (296쪽)

스승으로서의 예수상은 기본적으로 마태복음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가령 디트리히 본회퍼도 <나를 따르라>(복있는사람)에서 제자도의 근간으로 산상수훈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사복음서와 신약성서 전체를 포괄한다. 가령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이렇게 언급하지 않던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러한 예수 따름의 영성의 목표가 자유라면, 귀결은 존재 변화이다. 김영민의 일리 개념이 15장(98쪽)에서 언급되기도 하지만, 사실 <예수 인문학>과 김영민 교수의 <공부론>(샘터사)에는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머리보다 몸을, 지식보다 존재를 겨냥한다. 바른 공부는 존재를 바꿔 놓는다. "이렇게 운명을 걸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공부는 때로 위험하다."(186쪽)

예수 따름의 영성

공부는 제자의 존재를 바꿔 버린다. 그래서 위험하다. 더욱이 스승은 제자의 기존 세계를 파괴한다. 스승은 제자가 틀을 깨고 나오게 만든다. 우리 스승이신 예수 또한 <나니아 연대기>의 아슬란과 같아서 결코 안전하지 않다. 예언자적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얼핏 기괴한 일탈의 주인공을 자처"(183쪽)하신 예수는 우리 삶에서도 파격과 모험을 감행하신다.

반면 복음주의자의 예수상은 너무 달콤해서 이가 썩을 것 같고, 너무 블링블링해서 눈이 멀 것만 같다. 보고 싶고 믿고 싶은 대로 예수를 대한다. 예수가 언제나 빙그레 웃음 짓는 선량한 백인 훈남인 줄 안다. 사제 관계는 제자의 자기 비움과 전적 헌신으로 지속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실로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신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위태로운 현실을 극복하려면 우리 주님이 주신 짐을 지고, 멍에를 메야 한다. "공부에는 반드시 비용과 대가가 따른다."(175쪽) 곧 우리 주님을 스승으로 모시고("선택", 176쪽), 스승이신 우리 주님의 삶을 따라야 한다. 이렇게 "밟아 가야 할 순리적 단계를 건너뛰"(197쪽)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공부이다(원래 공부는 스승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복음서로 돌아가 스승 예수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편협한 관점이 우리를 구속하고 있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예수를 스승으로 따르는 전통에 속한 고전(가령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을 숙독해야 한다. 한국 신학자에 의해 한국어로 집필된 <예수 인문학> 또한 예수 따름의 영성을 위한 훌륭한 지침서이다(나 역시 이 전통에 꼽사리 껴 있다).

더욱이 <예수 인문학>은 분량이 얼마 되지 않고, 언어가 명료하지만, 그 안에 실로 깊고 넓은 통찰이 압축되어 있다. 결코 만만한 책이 아니다. 저자 차정식 교수는 공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공부는 일종의 보물찾기다. 배우고 익히는 일은 감추어진 것을 찾아내서 그 의미를 반추하는 것과 다름없다."(115쪽) <예수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도 '일종의 보물찾기'다.

뉴스앤조이를 응원해 주세요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http://www.newsnjoy.or.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원석의 다른기사 보기

관련기사

line 한국교회 미래, '공부'에 달렸다 한국교회 미래, '공부'에 달렸다
line 고통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고통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line '헬조선' 사는 청년을 위한 교회는 없다 '헬조선' 사는 청년을 위한 교회는 없다
line 구약성경의 신뢰성과 적합성에 대한 한 탐구 구약성경의 신뢰성과 적합성에 대한 한 탐구
line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
line 인문학의 미래와 교회의 대응 인문학의 미래와 교회의 대응
line 지금은 독서의 근본을 돌아볼 때 지금은 독서의 근본을 돌아볼 때
line <예수 인문학> 뒤집어 읽기 <예수 인문학> 뒤집어 읽기
line 차정식 교수 신간 놓고 설왕설래 차정식 교수 신간 놓고 설왕설래

추천기사

line 해방신학자가 본 세월호 그리고 명성교회 해방신학자가 본 세월호 그리고 명성교회
line 종교개혁 500주년은 사과나무에 불과한가 종교개혁 500주년은 사과나무에 불과한가
line 세월호는 갑자기 떠오른 것이 아닙니다 세월호는 갑자기 떠오른 것이 아닙니다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