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2016 저녁 집회에서는 LA에 있는 가나공방 대표 김성환 목사가 설교했다. 전임 목회자로 살다가 지난해 교회에서 사임하고 목수로 살아가고 있다. 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유혹과 하나님의 시험의 밀접함을 살폈다. 참석자들에게 많은 도전이 된 설교 녹취를 다듬어 옮긴다.

창세기는 에덴동산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담과 하와는 죄짓기 전, 하루 24시간 7일을 무엇을 하면서 보냈을까. 동산에 음악이 나오고, 매일 산책만 하면서 지냈을까. 생각보다 로맨틱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그들은 노동했을 것 같다. 동산지기, 하나님이 처음 주신 직업이다.

하나님도 항상 일하시는 분이다. 그러한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그들도 일했을 것이다. 창세기 3장에 이러한 말씀이 나온다. 타락한 이후, 땀 흘리고 수고해야 열매를 얻는다는 말씀이다.

안타깝게도 이 말씀으로 '노동이 죄의 저주인가'라는 착각을 불러온다.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저주이지 노동은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도 노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일하지 않고 불의한 이익을 얻으려는 불로소득이 저주라고 말한다. 최고의 기쁨은 노동의 기쁨이다.

나는 지금 목공 일을 하는 목수다. 스스로 '목수아'라고 부른다. 목수 일하는 목사라는 의미다. 일이 너무 행복하다. 노동은 즐거운 것이다. 일하고도 정당한 수익을 못 받는 게 저주다. 에덴은 기쁨의 동산이다. 아담과 하와가 일했으니, 안식했을 것이다.

동산 가꾸기가 그들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매일 동산을 거닐며 동산 중앙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선악과'와 '생명나무', 두 나무를 보았다. 선악과는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런데 생명나무는 어떠한가.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일용한 양식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 나갔을 것 같다. 열심히 일하면 몸이 피곤하고 배고팠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동산 나무를 먹을 수 있다. 생명 맛 가득한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는 것이 최고의 기쁨, 최고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먹어야 사는 나무, 먹으면 죽는 나무를 구분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갔을 것이다.

유혹은 예기치 않는 시간에 찾아온다. 생각해 보자. 사탄이 다니는 길은 무엇일까. 자동차가 다니는 길은 차도, 사람이 다니는 길은 인도라고 한다. 그럼 사탄은 어떤 길로 다닐까. 바로, 틈이다. 화목한 관계를 깨고, 그 틈 사이를 다닌다. 세상 모든 분열 가운데에는 늘 사탄이 있다.

목공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작은 틈을 발견하는 일이다. 틈을 찾아 쐐기를 박는다. 그러면 나무가 두 동강으로 쪼개진다. 그렇게 사탄은 관계의 틈을 본다. 백인과 흑인, 부모와 자녀. 친구와 친구, 남과 북, 보수와 진보의 틈을 찾아 거닌다.

인류의 모든 문학 가운데 가장 마음 아픈 구절이 있다. 창세기 3장 6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took and ate!" 절대 먹지 말아야 하는 열매를 먹었다. 인간이 망가진 것은 단 두 개의 동사이다. 깊은 좌절의 두 동사가 되었다. 이후 이 두 동사가 함께 나오는 성경 구절은 없다. 선악과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통치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겠다는 의미다.

북한에 5번 다녀왔다. 고아에게 겨울에 신을 보내는 일을 한다. 북한에 도착하면 방문객 데리고 가는 곳이 있다. 대동강 강변에 있는 주체사상탑이다. 높은 탑, 그 아래 북한의 주체사상을 적어 놓은 글귀가 있다. 첫 구절은 이렇게 선언한다.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다." 인본주의의 극치가 담겼다.

다 보고 나면 방명록을 적게 한다. 그런데 함께 갔던 사람들이 대표로 글을 적으라고 한다. 목사가 "감명받았다. 좋은 글이다"라고 쓸 수도 없다. 무어라 써야 할까 무척 고민했다. 결국,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하루속히 오게 하소서"라고 썼다.

인류는 문명을 만들어 상실을 만회하고자 노력했다. 로마 콜로세움, 아크로폴리스, 로댕의 작품, 베토벤의 음악, 밥 딜런 음악 등등에는 상실한 에덴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인간이 죽을 쒔다는 거대한 상실감, 소중한 것을 잃고 추방당했다는 상실감이 우리 안에 퍼져 있다.

유혹하는 자인 사탄은 관계 파괴를 목적으로 한다. 신뢰감을 망가뜨린다. 자녀가 좌절할 때 문을 걸어 잠그고 울면 부모는 피눈물이 난다. 에덴동산의 사건은 하나님에게도 상처가 되는 일이었다. 에덴에 홀로 남겨진 하나님의 쓸쓸함은 어떠했을까. 심히 좋았더라고 감탄했던 인간을 에덴 밖으로 쫓아내고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하나님은 지금 복구 작업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예수를 보내었다. 에덴으로의 복귀 작업이 복음서 내용이다. 복음서 앞에는 광야에서 사탄 마귀에게 유혹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구약 신약 맨 앞에 사탄의 유혹이 있다. 큰 두 축을 이루는 장면이다.

선악과, 광야 시험은 몇 가지 차이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보다 열악한 장소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먹거리로 유혹한다. 선악과가 돌덩이에서 떡이 되게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유혹에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는 신명기 구절도 답한다.

백성이 겪은 고통을 예수가 축소 체험한 것이다. 사탄은 시험하는 것이 아닌 유혹한다. 하나님이 시험하신다. 우리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검증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브라함도 욥도 다 시험 가운데 있었다.

우리 일상에 놓인 시험, 유혹이 있다. 선악과는 시험이었을까. 아니면 유혹이었나. 하나님은 시험으로 유도하시지만, 마귀는 유혹으로 변질시켰다. 선악과는 동시에 두 개를 내재한다. 그러면 욥의 고난은 무엇일까. 그건 시험이었나, 유혹이었을까. 마찬가지다.

일상은 끊임없는 충돌이다. 모든 삶, 사람, 사건, 일 등 모든 일상에서 충돌하며 일어난다. 그것은 '페이라스모스'다, 시험과 유혹의 이중성을 담고 있다. 좋은 것, 나쁜 것으로 규정할 게 아니다. 일상에서 고통과 걱정을 주는 문제는 그저 페이라스모스, 해프닝일 뿐이다.

하나님은 그걸 통해 더 가까이 나아오길 원한다. 동시에 망가뜨리는 자는 같은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 멀어지게 역사한다. 주변의 일상을 둘러보자. 많은 사람이 이 상황에서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며, 이렇게 고백한다. '멀리 느껴집니다. 하나님.' 그리스도인이어도 돈, 건강, 명예 다 없다. 계획한 일이 다 안 된다. 악한 자들이 득세하는 것만 같다. 하나님의 사람은 늘 당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한다. 

"믿겠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완성되어 갈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어디서나, 그것이 교회이건 밖이건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모두 살아가게 하옵소서. 일상을 살면서 그것을 부인하고 하나님 계시지 않는다고 유혹하는 사탄을 물리치고 건져 주소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페이라스모스'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유영 / <미주뉴스앤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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