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

1년 이전 기사를 검색하기 원하시면 + 버튼을 눌러 주세요.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이자 선물"
[인터뷰] 김근주 교수…약자가 일상 회복할 때 하나님나라 임한다
  • 강도현 (dreamer@newsnjoy.or.kr)
  • 승인 2017.01.05 19:56
  •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구약은 어떤 의미일까. 인간이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교훈을 주는 책일까? 김근주 교수는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셨을 때부터 시작됐다. 구원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정점을 맞고,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완성된다.

구약은 복음을 위한 발판이 아니라 복음의 과정에 있는 책이다. 따라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나라를 알지 못하고 구원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 성경의 절반 이상, 시기적으로 수천 년 역사를 버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게 사실 더 이상하다. 그만큼 구약은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하다.

김근주 교수는 인터뷰 기사 1부에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나라가 예수님이 전파하신 복음의 내용이라고 말했다. 하나님나라는 어떤 세상일까. 사실 하나님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주제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를 우리 삶에서 구현하는 것, 복음을 살아가는 것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사회적 영성이라는 주제가 아직도 논란이 되는 현실이다. 하나님나라 복음을 더 많이, 더 깊이 고민해야 할 때다.

김근주 교수는 시내산 언약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구약에서 율법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의 현실로 구현되었다. 예수를 통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이 구약에서부터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구약을 알아야 한다. 구약의 세계로 한 발 더 들어가 보자.

11월 말, 한 카페에서 김근주 교수와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김근주 교수는 율법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공의는 하나님 마음에 공감하는 것

구약의 핵심 메시지 하나는 '공의'다. '공의'로 번역되는 히브리어는 '마음을 같이함', 즉 '공감'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이웃과 마음을 같이하는 것도 공감이지만 더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 마음에 공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계속해서 돌아설 것을 촉구하신다. 그런 하나님 마음에 공감하고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게 공의다.

선지자를 보내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 순종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절망에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선포하는 선지자. 구약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보여 준다. 하나님의 기대를 이해하고 그에 걸맞게 살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 마음에 공감하는 것이다. 내 연약함을 잘 아시면서도 기대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가야 한다.

구약은 인간의 실패를 아담이나 사탄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을 사탄이라고 가르치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창세기 3장 1절은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이라고 말한다. 언제부터인지 교회는 아담이 사탄의 꾐에 넘어갔다고 말한다. 구약에서는 그런 식으로 사탄의 존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물론 계시록이 말하듯,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세력으로 사탄의 존재를 알고 있다.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있어서 하나님나라를 대적한다는 게 우리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그 고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신구약 전체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이해하는 식의 사탄은 구약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탄이라는 단어는 본래 '중상 모략자'라는 뜻이다. 신구약 중간기에 이르러서야 외경에서 하나님 뜻을 대적하는 세력을 일컬어, 사탄이라 표현한다. 구약이 말하는 악의 세력과 신약이 말하는 악의 세력. 사탄의 이해는 시대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균형이 필요하다. 특정한 존재로서 사탄을 이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인간의 불순종이 구조적 병폐로 나타나는 것으로 사탄을 이해할 수도 있다.

성경은 악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고 가르친다. 악의 원인을 자꾸 사탄에게 전가하는 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다. 인간의 잘못을 자꾸 사탄의 꾐에 놀아났다고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탄아 물러나라"고 축사하는 방법밖에 없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아무리 사탄더러 물러가라 외쳐도 사탄은 쫓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악을 선택하는 주체는 바로 '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이다. 책임을 전가하는 게 아니다.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다음에도 하나님은 가인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는 보통 죄의 결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됐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성경이 보여 주는 하나님은 죄인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지 않으신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후에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가인에게 말씀하시고 어떤 표를 주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범한 이후에도 죄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하신다. 가인은 그런 하나님을 줄기차게 거부했다. 하나님께서 "너는 할 수 있어"라며 부르시는데 가인은 자꾸 상을 엎어 버린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가인에게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가 너를 삼키려고 할 때 굴복하지 말고 죄를 다스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시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 마음에 공감하는 것이 공의다. 이러한 태도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은혜의 복음과도 일치한다.

나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의지해 의의 길로 나아가겠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그 고백을 보시고 "너 참 의롭다"라고 불러 주신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 나의 죄를 용서하시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그 말씀을 믿고 이제부터 죄 없는 사람으로 살아 보겠다고 고백할 때 그것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 그 고백을 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라고 해 주신다.

그런 하나님의 기대에 끊임없이 응답하는 게 곧 믿음이다. 죄인의 모습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히브리서 11장이 보여 주는 믿음의 본질이다. 모세, 아브라함을 비롯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가능성에 머무르지 않고 그들 삶에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열어 놓았다. 그 하나님의 가능성에 응답했더니 엄청난 일들이 일어난다.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라고 해 주신다.

하나님 마음에 공감하기 시작하면 우리도 하나님 마음을 갖게 된다. 자식 잃은 부모가 울고 있을 때, 비록 내 자식은 아니지만 그 슬퍼하는 마음에 공감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의는 이러한 공감 위에 세워진다.

하나님과의 공감이 곧 사람 사이의 공감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라는 예수님 말씀은 관념이 아닌 실제로, 구체적인 실천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바울도 로마서를 기록할 때 11장까지는 믿음으로 얻는 의를 설명하고 12장부터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의로운 관계에 대해서 설명한다. 하나님 마음에 공감하는 것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 공감하는 것은 분리할 수 없다.

선악과에 나타난 인간의 존엄

성경은 인간의 책임을 이야기한다. 책임을 부과했다는 것은 그만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선악과 이야기에서 그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구약을 교리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선악과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 너무 편중되어 있다.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아담에게 전가하는 핑계로 선악과 이야기가 이용된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돼 버리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는 해석은 하나님을 못된 주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선악과는 인간을 죄로 몰아넣는 함정이거나 인간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선악과 이전에도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었고 선악과 이후에도 자유의지는 작동한다.

"선악을 알게 하다"라는 히브리어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부부 관계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 무엇을 '선택하다'라는 뜻도 있다. 아모스 3장 2절에서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라고 말씀하실 때 그 '안다'라는 표현은 '선택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을 모를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표현도 단순히 지식적인 '앎'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뱀이 말했듯이 선악을 하나님처럼 판단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도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창 3:22)라고 하신 것을 보면, 선악과를 먹는 행위의 의미는 선과 악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판단하겠다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셨다. 모든 것을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존재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칫 자신의 자리를 잊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볼 때마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피조물이다'는 사실을 돌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인간이 얼마나 존귀한지, 동시에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상징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그 경계를 범한 것이다.

창세기 3장 6절은 하와가 선악과를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다"라고 표현한다. 그 문장에 갈망(desire)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먹어 보기도 전에 이미 갈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 중 하나다. 차라리 갈망이 없었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나무가 없었다면 좋을 뻔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둘을 한꺼번에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갈망하는 마음을 주신 것은 인간이 기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동시에 먹어서는 안 될 선악과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인간의 모든 존엄이 사라진 것 같이 보는 견해는 온당치 않다. 지금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엄한 존재다. 그리고 여전히 피조물로서 하나님과의 본원적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선악과는 지금도 존재한다.

율법 지키면 복 받는다?
하나님 의도 오해한 것

인간이 하나님과의 본원적 관계를 거부하고 죄에 굴복했을 때 인간 사회는 평화적인 창조질서가 아닌 폭력의 질서가 만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이 인간 위에 군림하면서 약한 자와 가난한 자의 인권이 완전히 유린되는 세상이 만들어졌다.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시내산 율법에는 이러한 폭력적인 세상 질서를 다시 창조질서로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설계가 들어 있다.

우선 시내산 율법을 토대로 구약시대에는 행위가 구원의 근거였다고 보는 시각은 율법이 주어진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해석이다. 하나님은 애굽의 종 되어 살고 있던 히브리 백성을 일방적으로 건져 내시고 자유롭게 된 히브리 백성과 시내산 언약을 맺는다. 율법은 이미 건짐받은 백성에게 주어진 '영광의 삶'이다.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생각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율법은 그야말로 히브리 백성이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원리다. 가령 농사지을 때 밭의 귀퉁이는 수확하지 말고 남기라는 율법이 있다. 이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더 많은 수확을 보증하시는 것이 아니다. 귀퉁이를 남기면 그 동네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이 살 수 있게 된다. 혹 내가 나중에 어떤 사고로 인해 그 처지가 되어도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 제도의 가장 큰 수혜자가 다름 아닌 룻이다. 룻과 나오미를 생각해 보자. 고대 근동 사회에서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모시는 룻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길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붕괴된 사회에서는 약자가 가장 큰 재난을 겪는다. 룻과 같은 이방 여성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가 없다. 룻이 인간성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밭의 모퉁이는 수확하지 말라는 율법, 흘린 것은 다시 줍지 말라는 율법, 그리고 형사취수제였다. 율법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전통과 제도가 룻과 같은 취약 계층이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 것이다.

룻은 이방 여성이다. 이스라엘은 이방 여성과의 결혼을 매우 부정한 것으로 보았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 때 유대인 남성과 이방 여성의 결혼 파기를 개혁 내용으로 삼았을 만큼,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방 여성이 겪어야 했던 삶의 환경은 척박했다. 그런데 룻기가 보여 주는 세상에서는 이방 여성이 아무런 문제없이 일상을 회복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고 제도다. 그리고 보아스 같이 율법을 실천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물

룻기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우연히'라는 단어까지도 나온다. 룻기 2장 3절에서 룻이 보아스의 밭에 이른 것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아니라 '우연'이라고 기술한다. 이스라엘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놀라운 기록이다. 그만큼 룻기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으로 재창조된 사회질서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볼 수 있다.

룻기는 사사기 바로 다음에 나온다. 사사기와 룻기를 함께 나열한 이유가 있다. 일단 룻기 도입부에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고 기술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사기가 보여 주는 세상과 룻기가 보여 주는 세상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사기는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로 마친다. 그 왕이 누구일까? 다윗 같은 왕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은 것이다. 룻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룻기에도 다윗 같은 왕이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질서가 잘 지켜지고 있다. 룻기는 야훼 하나님의 율법이 존중되는 세상이고 사사기는 걸출한 리더들이 출연했음에도 야훼의 율법을 경시하는 세상이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사사기의 세상에서는 레위의 첩이 윤간당하고 그 결과 민족끼리 전쟁을 벌여 한 지파가 거의 몰살 직전까지 간다. 그 다음에 나온 해결책이 여인들을 집단 납치해서 결혼을 시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약자의 인권이 완전히 유린당하는 세상이다. 사사기 마지막에 왕이 없다는 고백은 결국 하나님의 법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반면 바로 옆에 있는 룻기의 세상은 어떤가? 하나님의 율법이 존중되니 그 사회의 가장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이방 여인이 아무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이 왕 되신 세상, 야훼의 율법이 존중받는 세상이다. 지금 사회의 약자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인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다.

율법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율법을 꾹 참고 지키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 자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법이다. 그래서 율법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 같은 비천한 사람들에게 영광의 길을 알려 주신 것이다.

시내산 언약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엄청난 은혜를 부어 주시고, 살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인간에게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는 사사기가 보여 준 세상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룻기의 세상을 제시하신다. 예수님은 바로 시내산 율법이 제시한 하나님의 비전을 일상에까지 실현하신 분이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나라가 어떤 세상인지 가장 명확하게 볼 수 있다.

김 교수는 사사기와 룻기를 비교하면서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밝혔다.

구약을 읽으면 복음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발현하는지 보인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약자를 보호하는 실질적인 제도를 갖추게 된다. 그것이 복음의 내용이니 말이다. 우리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삶의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나라를 꿈꾸는 이유다. 인터뷰 3부에서는 구약과 신약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살핀다.(계속)

뉴스앤조이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http://www.newsnjoy.or.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강도현의 다른기사 보기

관련기사

line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가 아니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가 아니다
line 한국교회는 어떻게 복음을 왜곡시켰나 한국교회는 어떻게 복음을 왜곡시켰나
line 한국 개신교는 왜 사회적 영성에 취약할까 한국 개신교는 왜 사회적 영성에 취약할까
line 전쟁 불러온 종교개혁, 계승해야 하는 이유 전쟁 불러온 종교개혁, 계승해야 하는 이유
line "순종 없이 구원 없다"
line "생각 없는 신앙, 한국교회 가장 큰 부조리"
line "땅의 샬롬 없이 하늘의 영광 없다"
line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line "사드 배치는 정치 문제 아닌 신앙 문제"

추천기사

line 혐오와 차별, 소외와 착취 조장하는 성서 해석은 가짜 혐오와 차별, 소외와 착취 조장하는 성서 해석은 가짜
line 스텔라데이지호 말고도 선박 균열 계속 있었다 스텔라데이지호 말고도 선박 균열 계속 있었다
line [미니 다큐] 제2의 세월호, 스텔라데이지호 [미니 다큐] 제2의 세월호, 스텔라데이지호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