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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에 기댄 기독교 사회 도그마의 모순을 소각하라
  • 주원규 (bay3135@empal.com)
  • 승인 2016.12.31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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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버려야 한다. 이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수사가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을 버려야 한다. 아니,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2016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지금, 다사다난이란 한자 성어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대한 엄중한 시국 인식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보통 시국 인식이라 하면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일어나는 양태에 대한 일반적 평으로 보는 경향이 다분하지만 한국 사회를 광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현재진행형인 오늘의 탄핵 정국은 그 문제의 핵심에 종교적 미신과 광기의 복제, 재생산이 자리하고 있음이 분명하기에 그러한 종교적 사유의 바탕엔 도리 없이 하나님이란 명제, 호칭, 정서에 기댄 기독교 사회와 기독교 도그마의 모순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정해선 안 될 것이다.

그 모순을 해부하는 종국엔 결국 한 가지 길만이 또렷하고 확고한 한 줄기 빛으로 존재하는데, 그 공과의 몫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우리의 마음과 의식 전반을 지배한 하나님과 관련된 생각 전반을 소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과연 우리가 버려야 할 하나님은 누구인가? 아니,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복과 저주의 하나님

인간의 의식 구조와 공동체성의 바탕에는 인과율의 뿌리 내지는 체계가 내재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이 잘 하는 것만큼 복을 받고 그렇게 하지 못할 때, 그에 따르는 처벌과 불이익을 감내해야 한다는 의식 구조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 구조를 잠식한 인과율의 토대를 통해 공동체를 작동시키려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공동체성의 작동 원리에 인과율의 패턴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인과율의 최종 조율자의 위치 설정에 대한 고민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그 경우 인간의 의식 구조는 그 너머의 존재자, 초월적 특질에 기대려는 의존성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의존된 초월자는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바탕 구조 위에 직하(直下)한다. 근대의 시작에서부터 일제 치하란 식민지 이데올르기에 연루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해방의 노력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열강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는 한반도의 불우한 토양에서 추대되는 초월자는 그 바탕에 스며든 하나님을 인과율의 최종 판단체, 이른바 심판의 주체로 설정하는 데 길들여져 버렸다.

그런데, 이 길들여짐의 악순환은 심판의 주체로 설정된 초월자 하나님의 자리를 점층적으로 잠식하는 심판주체를 대리자 형식을 빌려 대신 집행하고자 하는 권력이양의 모양새를 너무 쉽게 용인한다. 뻔뻔한 것은 권력 이양의 명분을 찾기 위해 성서 텍스트에 등장하는 제사장 신성위임을 들먹거린다는 점이다.

그렇게 신권 권력을 찬탈한 이른바 권력 괴물들은 지속적으로 복과 저주를 내리는 심판 주체로서의 하나님을 끔찍이도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복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면치 못하고 절대복종하면 넘치는 복을 받을 거란 두려움 내지는 경외심과 관련된 종교적 수사를 습관처럼 남발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외치는 그들의 내면 자아 안으로 점점 심판 주체의 대리 무의식이 스며들면서 그들 자신이 두려움의 주체인 하나님과 동일시되는 동일시의 착시를 일으킨다. 두려워하라고 엄중히 명시하는 자신이 정작 그 두려워해야 할 초월자의 무의식 안으로 일치를 욕구하는 동화를 일으키면서 교묘하고 악랄하게 자신들의 종교적 무의식에서 두려움을 거세해 버리는 것이다.

이 경우 복과 저주의 하나님, 인과율의 체계 안에서 존속되는 공동체성은 참으로 찾아야 할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스스로 두려움의 옷을 입은 대리자를 하나님의 다른 이름으로 섬기게 된다. 한반도 근현대사를 지배한 암울한 외세 개입에 대하는 기독교의 자세가 그처럼 굴종적이고 치욕적이던 이유의 중심엔 초월자도 심판자도 그 무엇도 아닌 대리자들의 욕망, 세속적 권력 지향주의자들에게 무릎 꿇는 집단 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전능의 하나님

복과 저주의 하나님이란 프레임에 갇혀 버린, 그렇게 집단 무의식화된 기독교 아이러니 중 하나는 그럼에도 성서란 텍스트를 정경(正經)으로 믿고 신앙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과연 이 상태에서 침투되는 정경의 보존, 고수, 지속이 나타내는 결과는 과연 무엇일까.

복과 저주의 인과율을 바탕으로 옹립시켰던 가짜 심판 주체인 권력 괴물들에게 헌납하는 헌신과 충성의 구령 의지 외엔 다른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이다. 신의 대리자임을 자처한 권력 괴물들이 정경 뒤에 숨어 정경의 보존과 수호를 기독교 사회에 설파하고 다니는 그 과정에서 정경을 붙잡고 신앙하는 이들의 소망은 어디에 깃발을 꽂게 되는가. 바로 전능의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게 된다.

전능자에 대한 소망은 성서 텍스트 곳곳에서 심심찮게 출몰하는 주제며, 명백한 한 현상이다. 그런데, 그 현상에 대한 소망을 정경 배후를 넉넉히 잠식해 버린 권력 괴물의 집단 무의식이 지배해 버린 상태라면 그 소망의 투사, 그에 대한 성취론적 기대 일반은 권력 괴물의 DNA를 그대로 수혈받는 괴물의 사산아(死産兒)들에 불과한 것이다.

사산아들의 무의식이 추구하는 전능자를 향한 기대는 복권에 당첨될 확률에 대한 믿기지 않을 정도의 강고한 믿음이다. 주님만 믿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기대와 소망을 이중굴절의 과정을 통해 사산의 시물라크르(simulacre)로 받아 쥔 사산아들인 오늘의 우리들이 실제로 손에 쥔 것은 무엇인가.

단언컨대 아무것도 없다. 거기엔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도 없고, 정경의 정통성도, 그 무엇도 없다. 그런데, 권력 괴물은 분명히 거기에 뭔가 있다고 우리를 세뇌시킨다. 주님의 이름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뭐라도 주실 거라고 우리를 계속해서 희망 고문한다.

그 집요한 세뇌의 예배, 세뇌의 기도, 세뇌의 은사, 세뇌의 신앙 활동이 계속되는 동안 켜켜이 쌓이는 것은 전능자에 대한 망상, 은사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망상체계가 낳은 굿판의 반복 재생산이다. 그 굿판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 굿판의 상 위에 흉물스럽게 올려놓은 귀신의 잔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대리자임을 교묘히 자임한 권력괴물들이 아닌가. 여기에 경악할 만 한 또 하나의 하나님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민다.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다.

사랑의 하나님

가장 큰 문제는 권력 괴물들이 자신은 권력 괴물일 수 없으며, 자신은 끔찍이도 사랑스러운 사랑의 하나님을 설파한다고 입버릇처럼 떠들고 다닌다는 점이다. 여기에 식별이 어려운 미혹이 있다. 권력 괴물은 1차적으로 그들 자신의 의식 구조에서 자신이 괴물이라는 자각이 없다. 그 자각은 그들의 무의식 속에 스며들어 있기에 그들은 종교성의 전위에서, 오피니언 리더다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자신들은 진심이 담겨 있는 피눈물을 흘린다고 말한다.

그들은 진심으로 교회를 위한다고 이야기하거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호소한다. 한국교회를 사랑해 달라고, 비판하지 말라고, 문제의식을 갖기보다 용서의 미덕을 발휘해 달라고, 교회 안에서 벌어진 불미스런 일들을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 망신주지 말라고, 교회 안에 일어난 일을 은밀한 중에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지껄이는 것이다.

그들의 진심이 오늘의 교회를 완전히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의 진정성이 쏟아 낸 악취가 손녀뻘 되는 선교 여행을 나온 여대생을 성폭행했으며, 수많은 성도들의 순수의 열망이 담긴 헌금을 카지노에서의 하룻밤 배팅을 위해 탕진해 버렸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 자신을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는 여자 성도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아 버렸고,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 이념과 권력의 개가 되어 머리가 비어 버린 대통령을 하나님이 낳은 지도자라며 기도하고 밀어주기를 마지않았다.

그들의 진심 어린 자식 사랑이 교인들의 헌금을 종잣돈 삼아 자식 회사 지원하는 데 밑도 끝도 없이 쏟아부었으며, 그들이 말하는 용서가 다른 이의 피고름 짠 학문적 성과를 일말의 양심도 없이 표절하고도 그 자리를 여전히 지키게 했으며, 그들이 말하는 휴머니즘이 노인을 학대하고 장애우들을 성적으로 학대했으며, 그들이 말하는 자애심이 공평과 정직을 가르쳐야 할 기독교 사학에서 인면수심의 입시 비리, 사학 비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게 만든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버려야 한다

이러고도 사랑의 하나님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역겹고 또 역겨운 현실 앞에서 사랑과 용서를 갈구하는 그 순수성을 이제는 다른 프레임에서 바라봐야 한다. 실체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상누각 위에 쌓아 올린 하나님, 그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기득권, 그 과정론적 축적물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 다른 곳이라 해서 하나님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든지, 뭐 특별한 게 있을 줄 아느냐는 냉소의 말들이 여전히 오늘의 한국교회에 대한 낭만적 향수에 의존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변명으로만 들리는 건 왜일까.

정전을 훼손한 프레임 너머, 진정한 초월성의 육박을 긍정하지 못하게 하는 대리자들의 허위성을 철저히 해체하는 의지를 통해 구현되는 하나님은 아마도 전능하지 않을 것이다. 잘하면 복이 주어지고 못하면 처벌을 약속하는 하나님도 아닐 것이다. 해체 이후의 광야에 선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은 쓸쓸하고 볼품없는 풀 한 포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도반(道伴) 위에 서 있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2016년을 횡액처럼 덮어 버린 재앙을 다음 세대에게 대물림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 해체의 교회 연재를 애독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17년 2월부터는 교회, 종교,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심층적으로 성찰하는 연재 소설 '나쁜 하나님'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기독 언론사, 그것도 인터넷 언론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하는 본격 연재 소설에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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