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제자들은 예수를 '랍비(rabbi)'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은 이 호칭을 율법 학자나 종교적 스승 등에 대해 존경하는 뜻으로 썼다. 유대 회당의 율법 교사인 랍비는 다른 직업을 갖는 게 통례였다. 그래서 랍비는 전통적으로 자비량 사역자다. 어떤 경우든 랍비라는 명분으로 돈을 받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결혼을 하고 가족과 함께 생활을 한다. 랍비는 사제나 승려처럼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포기하고 수도원이나 사찰에서 일생을 성직에 바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 율법의 적용은 자연의 산속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 있기 때문이다.

자비량 정신 역행한 종교개혁

일반적으로 랍비는 15년 이상 공부해야 그 자격이 주어진다. 오늘날 목사보다 결코 더 적게 공부하는 건 아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전문가였지만 그럼에도 모두 각자의 생업을 가지고 사역했다.

랍비들은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것을 신성한 것으로 보고, 심지어 긍지로 여기기까지 했다. 유명한 랍비 '힐렐(Hillel)'은 목재 절단사였고 그의 라이벌인 랍비 '샴마이(Shammai)'는 목수였다. 그 외 명망이 높은 랍비들이 석재 절단업, 신발 만들기, 재봉사, 대장장이, 그릇 만들기, 건축 등 전문 기술을 지니고 숙련직에 종사했다.

그들은 "노동이 없는 율법은 결국 실패한다"고 보았다. 2세기 유명한 랍비 '탈폰(Tarfon)'은 "하나님의 능력은 노동하는 사람에게 머문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랍비들은 하나님 말씀을 섬기는 사역에 금전적 대가를 받는 걸 부당하게 생각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여러분이 아는 대로, 나는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내 손으로 일해서 마련하였습니다"(행 20:34)고 말한 자비량 정신과 서로 부합한다.

나는 오늘날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이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로는 초대교회의 자비량 사역 정신이 크게 쇠퇴한 데 있다고 본다. 생업으로 땀 흘려 수고하지 않고 오로지 먹고 자고 경전만 연구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직업 목사가 되어 종교적 일과에만 몰입하다보니 교회가 그만 영적 비만에 걸린 것이다.

물론 유급 사역이 모두 부당하다고 매도하는 건 아니다. 부분적으로 유급 사역도 필요하다. 특히 순회 사역의 경우 지역 성도의 지원이 요긴하다. 2세기로 추정되는 초기 문서 디다케(Didache)를 보면 "순회 사도가 방문하면 주께 하듯 그를 맞아라. 그는 하루쯤 머물 것이다. 만약 필요하면 다음 날도 머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가 3일째 머문다면 그는 가짜 선지자다. 사도가 떠날 때는 다음 여정지에 도달할 때까지 먹을 음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게 하지 말라. 만약 그가 돈을 원하다면 그는 가짜 선지자다"(디다케 11장)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순회 목회'가 아닌 '상주 목회'까지 지금처럼 거의 다 일률적으로 유급 사역을 원칙으로 하는 건 아주 잘못된 관행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유급 전임 목사 제도는 사실상 중세 사제 제도와 크게 다른 게 없다. 그 교권 독점과 남용은 오히려 중세보다 더 과한 면이 있다. 신학의 개혁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그 사역에 있어서는 더욱 지능적으로 세속화되었다.

변질의 뿌리 '직업 설교 제도'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명분 아래 설교자가 반드시 전임 유급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초대교회에서는 랍비와 비슷한 사도, 선지자, 교사 등이 서로 권면하고 가르칠 수 있었다. 개신교 목사는 제사장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고, 그리고 사제도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목사는 회당의 랍비와 가장 유사한 직분이다.

물론 유급 목회도 장점은 있다. 사역 전문화에 유리하다. 또한 집중적인 목회로 빠른 성과를 내게 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게 곧 치명적인 단점이 되기도 한다. 교인들 앞에 가시적 성과를 내려니 수시로 무리하게 되고 기복신앙과 외적 성장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목회가 본질에서 벗어나기 일쑤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작은 교회는 사실상 유급 사역에 역부족이다. 한국교회 약 80%를 차지하고 있는 교인 수 50명 이하 교회들은 실제로 재정적 자립 자체가 매우 어렵다. 대부분의 작은 교회는 담임목사 생활비와 건물 운영비 지불하고 나면 거의 손가락만 빨아야 한다. 그러니 구제니 선교니 교육이니 무슨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다소 심하게 표현하자면 그저 헌금 나오는 대로 먹고 버티기에 바쁜 '식물 교회'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결코 작은 교회를 비하하려는 게 아니다. 교회 헌금 대부분을 목회자 인건비와 건물 관리비에 사용하는 교회는 정상적인 사역이 힘든 교회라는 걸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일부 중대형 교회들 행태는 더욱 가관이다. 그동안 그 많은 헌금을 도대체 어디에 다 썼는지 별로 흔적이 없다. 수려한 건물 짓고 고액 연봉 나누고 여기저기 흥청거린 거 빼면 자랑할 게 그다지 없다. 구제 예산은 고작 5%도 안 된다니 이건 교회가 아니라 무슨 맹신 집단같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이런 결과를 교인들이 스스로 주도했다고 구차하게 변명하지 말기 바란다. 목사직을 성직화하고 특권화하고 직업화한 게 개신교 사역 실패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설교직이 직업화하면서부터 교회가 특정 직분자의 이권을 위한 종교 영업소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구약의 제사장은 그게 신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성도가 제사장인 신약 교회의 각 직분은 원칙적으로 직업이나 신분이 결코 아니라고 확신한다.

목사는 삯을 받아야 마땅한가

성경을 읽으며 다소 혼란이 올 때가 있다. 어떤 구절은 "사역자는 당연히 돈을 받으라"는 느낌을 주고, 또 다른 구절은 "돈을 받지 말라"는 것으로 들린다. 두 경우 모두 다 사도 바울이 한 말인데 그러면 그가 한 입으로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말을 한 것일까.

우선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 5:17)는 말씀을 오해해선 안 된다. 문맥상 이 구절은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게 마땅한 것처럼 가르치는 자(일꾼) 역시 존경(삯)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옳다.

누가복음에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눅10:7)는 말씀도 자세히 보면 그건 오직 '순회 사역자'에게만 해당하는 명령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고전 9:4-5)라는 말씀에서 그 '먹고 마실 권리' 역시 순회 사도의 권리를 말한 것이다.

하지만 설사 백보 양보하여 다른 모든 상주 사역자에게도 동일하게 먹고 마실 권리가 있는 것으로 해석하더라도 그 구절이 결코 "사역자는 그 권리를 사용해야 마땅하다"는 최종 지침은 절대로 아니다. 도리어 사도 바울은 그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이 상이라고 말하며 그 권리 행사를 거부했다.

사실 사도 바울의 결론적 가르침은 "우리는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은 일이 없고, 도리어 여러분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으려고,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살후3:8)라는 구절에 정확히 나타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씀 사역에 임하는 모든 설교자가 지녀야 할 바른 지침이다.

이기영 교수(Owens Community College)는 목사의 자비량 사역과 관련하여 "유대인의 관습대로 제사장과 레위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자기 양식을 자기가 벌어서 먹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러한 관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성전에 제사장들과 제사를 위한 레위인이 건재했던 당시에 나에게 헌금을 해서 나를 먹여 살려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사이비 사기꾼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이죠"라고 역설했다.

추가로 그가 "오해의 발단은 성경에 나오는 순회 사역자와 상주 사역자를 구분 없이 동일시하는 것과 순회 사역자의 먹고 마실 권리가 무소유의 삶을 살며 순회 복음 전도의 여정을 위한 최소한의 의식주의 제공임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을 현대 교회 목사의 월급 개념으로 오해하는 데 있습니다"라고 지적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본다.

예수는 '랍비'였다

주로 가정에서 모였던 초기 교회가 자비량 사역 위주였다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신약성경에 당시 구제를 위한 자원적 '연보' 외에 일체 다른 헌금을 걷은 기록이나 가르침이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들의 교회는 교인 10명만 모여도 함께 구제하고 선교하고 봉사할 수 있었다. 건물이 없어도 되고 전임 사역자가 없어도 가능했다.

아울러 자비량 사역이 가는 곳에는 교회 부패가 자라나기 힘들다. 기복을 부추겨 돈 걷기 위한 무당 목회도 소멸된다. 게다가 교회 세습이 저절로 해결된다. 얼마든지 세습해도 좋다. 그 고생길을 자비 부담으로 간다면 누가 말리겠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만이 가능한 길이다.

시대가 바뀌고 있다. 자비량 정신을 경시한 루터와 칼뱅의 제도적 실수를 다시 반복해선 안 된다.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 예수께서 회당에서 자유롭게 설교하신 것은 그가 백성이 존경하는 랍비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돈을 받고 설교하지 않으셨다. 백성에게 그 어떤 헌금도 요구하신 적이 없다. 유대의 다른 랍비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예수와 제자들이 공생애 3년 동안 헌금을 걷어서 생활했다면 당시 사회 관습상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그걸 그대로 묵과했을 리 없다.

이제 교회가 새로워지기를 원한다면 사도와 랍비의 자비량 정신을 따르는 공동체를 확장해야 한다. 이건 "교회의 설교자는 돈 받을 자격이나 권리가 없다"는 식의 무모한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 권리가 충분히 있더라도 사용하지 않는 게 사도의 바른 가르침이다"는 거다. 이런 인식의 전환이 바로 지난 500년 종교개혁사의 반복적 실패를 종식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다행히 요즘처럼 신학 공부하기 좋은 시대가 없다. 정말 소명을 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주간 과정이 아니어도 좋다. 야간 과정, 온라인 과정, 그리고 통신 과정 등 다양한 기회가 있다. 앞으로 새로운 교회는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는 전문 직업인들이 과거 회당에서 설교했던 사도와 랍비의 정신을 이어서 스스로 신학을 공부하고 훌륭한 설교자로 자원봉사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지금 "목사는 직업이다"는 논리를 펼치며 유급 사역을 당연시하는 주장이 많지만 나는 그 말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신·구약성경 역사 어디에도 '돈 받고 설교하는 직업'이란 결단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고전 9:18)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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