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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어떻게 복음을 왜곡시켰나
[인터뷰] 배덕만 교수…정치권력과의 타협, 오욕과 굴절의 역사
  • 강도현 (dreamer@newsnjoy.or.kr)
  • 승인 2016.12.2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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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구원만 강조하는 것이 복음일까? 배덕만 교수(기독연구원느헤미야)는 미국 교회와 한국교회가 복음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버렸다고 말한다. 2부 인터뷰에서 지적한, 미국 남부 지역 교회가 노예제도를 옹호하게 된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성장을 최우선에 놓는 교회가 얼마나 복음을 왜곡시킬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미국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터뷰 3부에서는 한국교회가 어떻게 복음을 변질시켰는지 살핀다. 이것은 역사가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겪는 현실이다. 과거의 역사를 읽는 자세가 아니라, 현재의 한국교회를 조명하는 마음으로 배덕만 교수 인터뷰에 임했다.

11월 말, 한 카페에서 인터뷰한 배덕만 교수의 말을 정리했다.

배덕만 교수에게 오늘날 한국교회를 만든 역사에 대해 들었다. 뉴스앤조이 강도현
한국 초대 교회에 흐르는 사회적 영성

비록 한국 주류 교회는 종말론적이고 개인적인 신앙을 추구했지만 모든 선교사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감리교는 장로교보다 사회적 영성에 민감했다. 특별히 상동교회를 개척한 스크랜턴이나 헐버트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헐버트의 경우는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아펜젤러도 독립운동에 우호적이었다.

이들에게 신앙을 배운 한국 교인들은 사회적 감수성이 있었다. 물론 신앙 때문에 사회적 감성이 생겨났다고 볼 수는 없다. 이미 구국 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지식인들이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개신교를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견해일 것이다.

이승만이나 이상재 등은 감옥에서 감리교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았고, 신앙인이 된 후로 YMCA 주 멤버가 된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이회영 선생도 감리교 교인이었고 사회주의 진영 지도자였던 여운형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장로교인이다. 인터뷰 2부에서 말한 것처럼 순전히 개인적인 구원을 추구하는 흐름도 있었다. 하지만 YMCA나 상동교회 청년회 등 사회적인 문제를 신앙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부류도 함께 존재했다.

이러한 큰 틀을 확 뒤바꾸는 사건이 1901년에 일어난다. 우리나라에 온 장로교 선교사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선교 공의회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표명한다. 한마디로 교회는 사회적인 일 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일본의 뒤를 봐주고 있던 미국 국무부가 독립운동을 견제하기 위해 개입했다는 의혹도 있다. 이 발표를 계기로 선교사가 이끌던 개신교는 더 개인적인 성향으로 치우치고 많은 청년이 교회를 떠나게 된다.

1901년 이후 사회문제에 침묵하던 한국교회는 잘 알려졌다시피 1919년 3·1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그 각성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바로 다음 해 이른바 '105인 사건'이 터진다. 데라우치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후 평양을 비롯한 서북 지역에 항일 성향이 두드러지고 민족의식이 높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안창호 등이 발족한 신민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민족주의 리더를 대거 배출한 숭실, 오산, 대성 같은 학교가 서북 지역에 있었다. 그러한 성향을 견제하고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들을 제거하려고 데라우치는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한다. 그리고 105명을 기소했는데 그중 80% 정도가 개신교 목사와 장로였다.

당시 한국 개신교의 70% 정도가 서북 지역에 있기도 했지만, 1907년 처음으로 한국인 목사와 장로가 배출된 것을 고려하면 거의 대부분의 목사와 장로가 105인 사건 때 끌려갔다고 봐야 한다. 나는 이 사건으로 교회가 각성했다고 본다. 1905년, 1907년, 1910년 국가 존립을 무너뜨리는 굵직한 사건이 터졌을 때도 침묵했던 교회가 3·1 운동 때 대거 들고 일어난다. 사회문제와 신앙을 분리하면 교회를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교회가 사회문제에 침묵했을 때 결국 신앙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흑암의 시대

교회가 3·1 운동에 상당한 역할을 감당했고, 민족 대표 33인 중 거의 절반이 개신교인이었다.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대략 세 가지 흐름으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해외파 운동이다. 대체로 강경한 입장을 가진 운동가가 여기 포함된다. 두 번째는 이승만 같이 외교적 해결책을 찾는 그룹이다. 마지막으로 국내에서 실력을 키워 미래를 도모하고자 하는 그룹이 있었다. 많은 개신교 진영 운동가는 민족자본을 키우는 운동 방식을 택했다.

국내에서 민족 역량을 키우고자 했던 개신교 운동가들은 주로 평양을 비롯한 서북 지역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안창호 선생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신민회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민족자본을 축척하기 위해 다양한 기업 활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문화 정책 아래서는 이런 식의 소프트한 운동이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기업 활동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총독부의 통제에 어느 정도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독립운동의 기반이 약해져갔다.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명분도 함께 흐려졌다. 서북 지역에서 면방직 공장, 고무신 공장, 인쇄소 등의 사업을 영위하던 대부분의 사람이 개신교 목사나 장로였다.

이들은 분명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지만 아무래도 자본적 기반이 다져진 상황에서는 정치권력과 대립하기보다는 안정을 택했다. 그렇게 조금씩 일제 권력과 타협을 했고 1938년에 가면 신사참배까지 타협하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신사참배는 단순히 교회가 일본의 탄압에 무릎 꿇은 사건이 아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항일운동이 정치권력의 끊임없는 탄압과 회유 앞에서 결국 변절한 사건이다. 개신교 변절의 역사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에까지 우리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사실 지금까지도 한국교회는 이 어두운 역사의 흐름을 끊어 내지 못했다.

배덕만 교수는 신사참배를 단순히 교회가 일본의 탄압에 무릎 꿇은 사건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강도현
뼈아픈 역사의 굴절

역사의 굴절이 너무나도 뼈아프다. 항일운동 선봉에 섰던 개신교인은 결국 정치권력과 타협했고 그 대가로 물질적인 토대를 확보한다. 당시 한반도에는 또 다른 큰 흐름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뒤흔든 사회주의 열풍이 한반도에도 불기 시작한 것이다. 1925년 조선공산당 발족 이후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해외로 도피한 독립운동가의 자리를 메꾸며 항일운동을 펼친다. 일제와 지주들의 괴롭힘에 지쳐 있던 민중은 이들의 활약에 열광했다.

개신교 진영에도 사회주의 운동가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교회와 사회주의 진영은 대립각을 이루었다. 전통적인 지주는 아니었지만 신흥 자본가 집단에 개신교도가 많았다. 이미 물적 토대가 확보된 상태였기에 사회주의 운동가와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문제는 해방 이후 소련이 삼팔선 이북을 통치하면서 서북 지역 개신교 세력이 탄압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전통적 지주는 아니지만 일제 치하에서 축적한 자본과 토지를 빌미로 개혁 대상이 된다. 말하자면 친일파 척결과 토지개혁의 교집합에 기독교인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45년부터 한국전쟁이 끝나는 1953년까지 서북 지역에 살던 기독인 대부분이 남한으로 내려온다. 전체 기독교 인구 중 70%를 넘는 인구가 서북 지역을 비롯한 북쪽에 살고 있었다. 이들이 남하하면서 교회 내 주류 세력이 된다. 그렇게 개신교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는데 다름 아닌 '반공주의'였다.

해방 이후 남쪽을 통치하던 미군정은 사회주의 운동가가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을 우려했다. 실제로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정치인은 사회주의자 여운형이었다. 결국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키고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고자 한다. 공산당의 압박을 피해 남하한 개신교 세력을 파트너로 삼는다.

미군정이 남한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개신교가 대대적으로 동원된다. 대표적인 집단이 그 유명한 서북청년단이다. 사회주의 세력 숙청 과정에서 서북청년단이 보여 준 무자비한 악행은 많이 알려진 바다. 역사의 굴곡이 너무나도 뼈아픈 것은 서북청년단 주축 멤버가 오산학교, 대성학교 출신이라는 점이다.

북한에서 내려온 개신교도의 반공주의 성향은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을지언정 역사적으로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한국전쟁 이후 반공주의는 교회 내에서 거의 성경 무오와 같은 위치에 놓일 정도로 교회의 주요 신학이 된다. 게다가 보수적인 미국 교회의 영향을 받아 온 남쪽 교회들과 결합하면서 한국교회는 근본주의적 신학을 바탕에 두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가장 중요시하는 세력이 되고 만다. 교회는 반공을 매개로 군사독재 정권과 밀월 관계를 유지했고, 지금까지도 군사정권의 뒤를 이은 보수 정치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게 현실이다.

불의에 눈감으면 교회 망한다

종교개혁이 위대한 이상을 품고 시작했지만 국가권력과 결탁하면서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역사로 귀결된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일제 치하 그리스도인도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사업을 일으키고 학교도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력과 하나씩 타협해 나가게 되자 결국 신앙의 정체성까지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신사참배라는 부끄러운 역사로 귀결되었고, 나아가 독재 정권의 부역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권력에 한번 머리 숙이면 더 큰 우상에게 절하게 된다는 사실을 역사는 반복적으로 증언한다.

미국 남부에서 복음이 변질되는 과정을 보면 우리 입맛에 맞는 신학을 추구하는 게 얼마나 심각하게 복음을 오염시킬 수 있는지 보게 된다. 전도가 어렵다는 이유로 노예제도라는 반성경적 행태에 눈을 감더니 급기야 신학적으로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자리까지 나간다. 오염된 복음의 역사는 히틀러의 나치 앞에서 독일 교회가 취했던 태도에서도 반복된다. 지금 한국교회의 지나친 보수적 성향도 같은 맥락일 수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특별히 한국교회가 주목하고 복원해야 할 전통이 마르틴 루터나 칼뱅뿐 아니라 재세례파 전통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우리 역사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굴절과 회절은 정치권력과의 결탁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성장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불의에 눈감으면 망한다. 교회가 망할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국가 체제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국가에 속한 국민의 정체성을 무시하며 살 수는 없다. 그러나 국가라는 체제가 가지고 있는 권력 지향적인 속성을 하나님나라 관점으로 비판하면서 살아야 한다. 공공성을 증진하기보다 국가권력을 이용해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세력 앞에서 교회는 단호하게 선지자 모습을 보여야 한다. 교회가 생존을 위해 불의한 세력과 타협하면 결국 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까지도 훼손하게 된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배 교수는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세력 앞에서는 교회가 단호하게 선지자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뉴스앤조이 강도현

배덕만 교수 이야기를 들으며 예수님이 생각났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정치권력을 장악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정치권력에 의해 십자가 위에서 죽임당했다. 그리고 부활이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세상을 뒤집었다.

지금껏 불의한 정치권력의 동조 세력으로 자리매김해 온 한국교회가 복음 앞에 바로 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보여 주신 그 길을 가야 한다. 교회는 이익집단이 아니다. 정치권력이든 자본 권력이든 교회에 이익을 준다고 해서 결코 우리 편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 권력이 교회를 향해 달콤한 손짓을 해 올 때가 교회의 가장 큰 위기임을 기억하자. 바로 지금 우리는 그 위기를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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