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최규창 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이랜드는 왜 선교 기부나 교회 헌금은 많이 하면서 노동자들의 알바비나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악질적인 행태를 오랫동안 고수하고 있을까. 어떻게 그런 행동에 대해 자기 정당화할 수 있으며, 심지어 확신까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 여기에는 분명 어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한국인의 고유한 의식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 기독교 자체가 '열정페이'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데 인색하다. 뜻이 좋으면 그것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 과정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선교를 위해 쓰겠다고 하면, 과정에서의 고통은 부수적 희생(collateral damages)으로 간주된다. 더구나 신기술로 부가가치를 창출하기보다 비용 절감으로 이윤을 남기는 방식을 선택한 기업이라면, 부서별로 비용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건비 절감 압박은 매우 심했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배당금에도 불구하고) 회장도 아직 노모를 모시고 전셋집에 살고 있고, 탈세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을 거의 30년간 자랑해 온 기독교 기업이라면 (자기들 나름대로는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박봉·체불 같은 희생은 당연시되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교회 내 사역 노동자들의 박봉과 과로에도 잘 나타나 있다. 기부와 헌금에 의존하는 기관들이 적은 급여와 잔업 노동을 열정페이로 지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지속되는 한, 노골적으로 말해 부목사, 강도사, 간사, NGO 상근자들의 급여가 정상화하지 않는 분위기에서는,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이랜드 같은 기독교 기업의 고질적인 인식은 변하기 힘들 것이다. 적어도 기독교 정신으로 뭉친 기업에 이 둘은 연관되어 있다.

여기에는 우리가 아무 공로 없이 공짜로 구원받았다는 왜곡된 대속 교리가 큰 몫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예수의 대속적 죽음으로 공짜로 구원받음으로써 그분께 영원히 빚지게 되었다는 대속 교리가 우리를 노예로 묶어 놓는다는 니체의 노예도덕론도 사실은 절반만 일리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채무의식을 타인에 대한 헌신과 섬김으로 갚을 생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이 세운 더 큰 뜻을 위해 타인들(특히 기독교인들, 또는 이 기업에 들어와 그래도 먹고는 살게 되었다고 생각할 법한)이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로 변화시킨다. 종교법이 현행법을 초월한다고 믿고, 그 충돌을 핍박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에게는 답이 없다.

노동을 저주라고 생각하고, 돈을 노골적으로 밝히는 것은 꺼리며, 저주받은 노동을 부를 창출하고 선교에 기여하도록 만드는 것이 자기의 구원을 확증하는 길이라 믿고, 그것을 근면·성실·정직·희생의 가치 아래 두도록 가르치는 개신교 윤리가 자본주의와 만나고, 대기업에서 구현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이랜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더해 한국인들이 가지는 특유의 '불안 문화'와 '무속 문화'가 '노동 착취+고액 헌금'이라는 이해되지 않는 조합을 만들어 낸다고 볼 수 있다. 돈을 버는 일은 불확실성하에 있다. 하지만 이미 번 돈을 쓰는 것은 확실성과 의지의 문제다.

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불확실성이 높은 곳이다. 많은 사람이 변호사 수임료를 줄이고, 고비율의 성공 보수를 주는 쪽을 선택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재판에 이길지 질지 모르는데, 고액의 수임료를 내기에는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 그러나 승소하면 배상금의 10~20% 주는 것은 아깝지 않다. 플러스에서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확실성하에서는 '정액'보다는 '정율'이 마음 편한 법이다. 일단은 아끼고 아껴서 버는 것이 우선이다.

이랜드는 비용을 줄이고, 지불할 돈을 최대한 아껴서 많은 수익을 낸 다음, 세금을 모두 내고 추가로 기부하고 헌금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돈을 벌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성공 보수를 내는 것이다.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다음의 성공을 보장하는 '향기 나는 제물'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무속이 작동한다.

이랜드만 이런 부도덕한 노동 착취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재벌들은 더 심할 것이고, 며칠 전 비행기에서 난동을 부린 부자놈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악덕 중소기업처럼 작은 기업들, 제조업체들의 착취는 훨씬 심할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 수당도 없이 주말을 반납하는 노동자들이 많이 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이랜드 현상의 특이점이었다. 세금 잘 내고, 헌금과 기부를 많이 하는 기독교 기업이 왜 유독 수십 년간 사람들의 노동에 대해서는 이렇게 폄하하고 무가치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그래도 명확한 산업재해나 불법적 착취에 대해서는 이랜드가 가혹한 처신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 나름은 법의 사각지대든, 자율적 도덕법이든 간에 어떤 확신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방조하는 것이다. 그 멘탈이 어디서 왔는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이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교회,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현상의 조합들, 예컨대 꾸준히 사회 봉사 활동을 하면서도 세월호 문제에 침묵하는 교회, 까칠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도 목사의 전횡을 방조하는 교회, 매일 몇 시간씩 성경 읽고 기도하면서 박근혜가 뭐가 문제냐고 하는 사람들,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면서도 나한테 조금이라도 손해를 끼치는 사람은 죽여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매주 구령의 열정으로 노방 전도하면서 타인에 대한 원한을 풀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을 나름 선한 시민이라고 믿고 살고 있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의에 늘 침묵하는 사람들…처럼 도덕과 비도덕이 한 사람, 한 조직 내에서 공존하는 모순들의 실마리가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최규창 / <고통의 시대 광기를 만나다> 저자, (주)포리토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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