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광화문광장에 파란색 고래가 등장했다. 길이 7m, 높이 2m의 거대한 파란 고래는 이날 청와대 앞 200m까지 다다랐다. 고래는 노란 종이배와 세월호 희생자 304명의 캐릭터, LED 전구를 등에 업고 청와대 앞으로 행진했다. 고래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사진을 찍었다. 현장 경찰들도 마찬가지였다. 경찰 버스 안에 탄 한 의경은 신기한 듯 창문 사이로 카메라를 들고 고래를 찍었다.
이 파란 고래는 건축가 김영만 씨 작품이다.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 행렬을 뒤로 한 채, 고래 등에 올라탄 희생자 304명이 하늘로 올라가는 석정현 작가의 그림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림대로 직접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한 게 이번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12월 20일, 경기도 파주에 있는 김영만 씨 작업장을 찾았다. 김 씨가 환히 웃으며 기자에게 믹스 커피 한 잔을 건넸다. 커피를 내민 손이 거칠고 손톱 밑이 까만 것을 보니 건축가가 맞았다. 커피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인터뷰가 시작됐다.
시민들, 광장에 나온 파란 고래에 환호 |
김영만 씨는 파란 고래와 거리로 나간 11월 26일,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파란 고래를 메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진눈깨비가 내렸다. 아들과 한 활동가의 도움으로 광화문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성미산학교 1~2학년 학생들이 그린 그림과 촛불 민심을 나타내는 LED를 고래 등 위에 올렸다. 이때만 하더라도 고래가 큰 파장을 일으킬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날 시민들이 보인 반응을 잊을 수가 없어요. 사실 사람들이 고래를 보고 '길도 좁은데, 뭘 이런 걸 가지고 왔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걱정도 했어요. 근데 고래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길을 터 주기 시작했어요. 박수를 치고 고래와 함께 사진을 찍더라고요. 고래가 포토존인 것처럼요. 거리에 있는 시민 하나하나가 아직 세월호를 잊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사람들이 인터넷에 고래 사진을 올렸는데, 이것도 감동이었어요. 포스팅에 쓴 글을 봤는데, 다 제 마음과 같은 거예요."
그는 고래와 광화문 거리로 나온 직후 한 세월호 가족의 전화도 받았다. "옆에 가고 싶었는데, 차마 가지 못했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나오길 잘했다 싶었다. 쏟아져 나오는 뉴스에 묻혀 점차 잊히는 세월호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거차도에 돔형 텐트 만들다 |
사실 김영만 씨와 세월호의 인연은 이게 끝이 아니다. 올해만 두 차례 동거차도를 다녀왔다. 지난 3월 초, 한 목사가 소셜 미디어에 올린 세월호 가족들의 동거차도 베이스캠프 사진을 보았다. 천막으로 지은 텐트는 늘 바닷바람에 훼손됐다. 가족들에게 텐트를 복구하는 일은 일상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때 친분이 있던 정진훈 목사(에덴정원교회)가 천막 텐트를 돔형 텐트로 바꿔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돔형 텐트는 바람에 튼튼해 쓰러지거나 훼손될 가능성이 적다. 그리고 돔형 텐트를 짓는 일은 김영만 씨 전문 분야였다.
그는 작업실에 있던 텐트 재료를 차에 실었다. 큰 돔 하나와 작은 돔 하나를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 돈벌이가 되는 공사에 재료로 사용해도 되지만 세월호 가족을 위해 사용하고 싶었다. 1박 2일간 동거차도에 머물며 시민들과 함께 돔을 설치했다.
"아마 혼자였다면 어려웠을 거예요. 두 목사님이 아니었으면 마음만 있지, 행동은 하지 못했을 거 같아요. 세월호에 관심은 있었지만 직접 무언가를 한다는 게 부담되는 일이긴 하니까요. 그때 성미산학교 학생들, 부산에서 온 연극단원들, 서울에서 내려온 시민 네 분,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돔을 만들었어요. 저 혼자가 아니라 함께한 일이죠."
"1,000원 없으면 마음 나누면 되는 거죠" |
김영만 씨는 작은 교회가 기획한 '지오아카데미' 강사로도 활동한다. 암기가 아니라 일상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입체 모형으로 수학과 기하학을 배우는 수업이다. 일주일에 두 번 초등학생·주부를 가르친다. 고양시 덕양구 동네 아이들과 정이십면체 나무 축구공도 만들고, 자신의 전문 분야를 살려 플라스틱으로 작은 돔도 만들었다.
'지오아카데미'는 6년 넘게 인연을 이어 온 정진훈 목사와 함께 시작한 일이다. 한 번 작업 현장에 들어가면 몇 달씩 지방에 머무는 그가 규칙적으로 시간을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일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가진 것들을 나누며 사는 삶이 서로를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정 목사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김영만 씨는 인터뷰를 마치며, 나눔을 망설이는 이들에게 당부했다.
"마음을 나누는 것에 '많고 적음', '크고 작음'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거 같아요. 나에게 1,000원의 가치가 이웃에게는 1만 원의 가치가 될 수도 있고요. 1,000원이 없으면 마음으로 함께하면 되죠. 나를 위해 또는 가족만을 위해 살지 않고 이웃과 마을을 둘러보면 좋을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