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이성규 감독의 장례식장을 찾았다. 페이스북이 그의 장례에 참석했다는 기억을 떠올리도록 했다. 이성규 감독은 '오래된 인력거'로 알려진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그를 기억하며, '오래된 인력거'를 다시 찾아보았다. 최근 '부산행' 덕분에 다시 보았던 애니메이션 '사이비'가 이 감독의 시선과 맞물렸다. 오래된 인력거는 희망과 고통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본 글에서는 영화에 비친 종교의 이미지만을 이야기한다. - 기자 말

[미주뉴스앤조이 (뉴욕) = 유영 기자] 내가 본 이 감독의 첫 다큐멘터리는 그의 죽음이었다. 페이스북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삶의 마지막 기록들을 보며, 감독의 비범함을 엿보았다. 자기 죽음조차 다큐멘터리로 만들다니, 경이롭고 슬펐다.

그는 40대에 갑자기 찾아온 암으로 죽음을 맞았다. 그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며 남긴 기록이 내가 처음으로 접한 그의 다큐멘터리였다.

그의 기록에는 허세가 없었다. 살고 싶다는 삶에 대한 애착과 죽음을 인정하는 한 사람의 솔직함이 담겼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고, 슬펐고, 아팠다. 마지막, 아내와 눈물을 닦으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깊은 고통과 감동으로 내 마음을 휘저었다. 그리고 울었다.

그런 기록을 몇 달간 지켜보았다. 그중 내세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내세에 대해 조언하는 주변 종교인들의 목소리도 어렴풋이 느껴진 까닭이다. 먹먹한 심정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는 감정과는 다른 안타까움이 날 채웠다.

종교와 믿음은 강요되지 않는다. 믿어져야, 믿고 싶어야 믿는 것이기에 믿음이 아니던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후 세계를 믿으라고 말하면 그냥 믿을 수 있을까. 종교가 그의 기록보다 공허하게 느껴졌다.

이성규 감독의 '오래된 인력거' 포스터.

종교의 허무함은 이성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오래된 인력거'를 통해 다시 확인했다. 주인공과 조연으로 나오는 두 인력거꾼은 각각 이슬람교와 힌두교 신자다. 그들은 각자의 종교에 충실하다. 인도가 종교성이 강한 사회니, 그런 모습은 당연하다.

공통점은 더 있다. 모두 가난한 하층민이다. 가난은 그들을 비루하게 만들고, 희망을 앗아 간다. 종교가 그 자리에서 해주는 일은 자기 위안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게 만드는 일이다. 모든 일은 '인샬라', 신의 뜻대로 이뤄진다.

가족의 미래를 위해 삼륜차를 살 목적으로 10년간 모은 돈이 아내 병원비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이 든 인력거꾼은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고통과 분노를 이성규 감독에게 표현한다. 다른 한 명은 지주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깊이 남아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는 삶을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고통이 충만해지자, 나이 든 인력거꾼은 신의 뜻이 무엇이냐고 이성규 감독에게 되묻는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찼고, 입에서는 고통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젊은 인력거꾼은 자신이 번 모든 돈으로 1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천도재를 드리고 어디론가 떠난다. 도피인지,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에게 종교는 과거를 위로하고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을 달래는 정도로 보인다.

연상호 감독의 '사이비' 한 장면.

우리 사회에서도 종교는 이런 일을 하고 있다. '사이비'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사람들은 죄책감과 기대감에 교회로 향한다. 그 안에서 사기꾼이 제시하는 새로운 비전을 보며, 기쁜 마음으로 헌금한다. 그리고 불리한 사건에는 눈을 감는다.

어쩔 수 없다. 현실에선 그 어떤 대안도, 소망도 품지 못한다. 수몰되는 마을을 구하지도 못했고, 보상금에 오랜 삶의 터전을 팔아버린 그 감정을 어디서도 풀 수 없으니 말이다. 함께 모여 살고 싶지만, 구심점 역할을 할 사람도 없다. 모두 피해자고, 가난한 마음으로 가득하다.

이곳에도 오래된 인력거꾼이 넘쳐난다. 늙은 인력거꾼의 아픈 아내나 '사이비'에서 딸 등록금을 도박으로 날리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 한 명만 옆에 있어도 가난을 벗어나고 싶은 꿈은 한순간에 날아간다. 몇 년간 고생한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된다.

그들의 문제는 아무도 해결할 수 없어 보인다. 그들의 비루한 삶은 답답하고, 먹먹하다. 희망을 놓쳐 버린 탓이다.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 돈은 희망이 되지 못한다. 열심히 살았을 때, 가난에서 벗어나 조금 더 나은 인생을 살 기대가 들어야 돈이 희망이 된다.

이성규 감독은 죽음의 기록으로 사람들에게 생의 단편을 남겼고, 다큐멘터리로 사람은 무엇 때문에 소망을 품는가를 고민하게 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소망은 참 아득하다. 나는 어떤 소망을 품은 나들(우리) 속에 있으며, 그 소망은 사회에 어떤 위치에 있을까.

어두운 밤이면 더 밝게 빛나는 저 많은 십자가가 우리 사회에 소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이비 종교로 남지 않을 반석 위에 선 하나님나라 소망을.

기독교인은 어떤 기록을 주변 사람들에게 남기고 있을까. 그들은 예수가 준 소망을 약자에게 심어 주는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무엇으로 그 소망을 심어 주고 있는가. 그들이 말하는 소망이 약자에게 폭력으로 다가가고 있지는 않을까.

지금 역사와 상황은 기독교인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상고해야 할 때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와 평화, 안식은 무엇인지 현실에 두 발을 딛고 고민해야 한다. 고민에서 끝나지 않을 답을 찾아 어떻게 실현해 나갈지 다시 물어야 한다.

종교가 그릇된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고통을 잠시 희석하고, 잊게 하는 아편이 되어서도 안 된다. 예수가 그 정도에 남도록 '사이비'가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이미지를 새롭게 그려야 할 때이다.

유영 / <미주뉴스앤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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