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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없앤 한국교회, 혐오 조장하다
[인터뷰] 강남순 교수 "혐오받는 이들 돌보는 것이 예수의 명령"
  • 이은혜 기자 (eunlee@newsnjoy.or.kr)
  • 승인 2016.12.10 16:12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올 한 해 한국 사회 이슈 중 주요 키워드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혐오'를 꼽고 싶다. 할랄 산업 단지 반대에서 드러난 이슬람 혐오, 강남역 살인 사건에서 드러난 여성 혐오, 퀴어 문화 축제에서 드러난 성소수자 혐오. 이런 현상은 한국교회와도 뗄 수 없다.

'혐오'와 관련해 강남순 교수는 꾸준히 자기 목소리를 냈다. 강남순 교수는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신학대학원에서 종신교수로, 신학과 종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색깔을 지닌 교수가 있다.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 후학 양성에 힘쓰는 학자, 자기 언어로 세상을 분석하는 학자. 강남순 교수는 세 번째에 해당한다.

강 교수는 신학 관련 주제에만 국한해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개진한다. 그때그때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슈를 분석해 주요 일간지에 꾸준하게 칼럼을 쓴다. 얼마 전 쓴 글들을 모아 <정의를 위하여>(동녘)를 냈다.

강남순 교수는 매해 한두 차례 한국을 방문한다. 바쁜 한국 일정을 소화 중인 강 교수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12월 6일 서울 명동에서 강남순 교수를 만났다. 평소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해 온 그에게 한국 사회와 교회에 만연한 혐오를 어떻게 분석하는지 듣고 싶었다. 강 교수와 대화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해 봤다.

성서 왜곡하는 이들이 혐오 앞장

- 한국교회 올해 주요 이슈 중 하나가 반동성애와 반이슬람이었다.

한국 문화도 그렇지만, 한국교회 가장 커다란 문제 중 하나가 비판적 사유와 성찰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판적 성찰은 '왜'라는 물음을 계속 묻는 것인데, 교회는 '왜'라는 물음을 다 박탈한다. 물음표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성서를 읽어도 왜곡되게 해석하고 이해한다.

혐오는 성서에 대한 왜곡·편향된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 성서는 복합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역사 속에서 성서는 노예제를 찬성 또는 반대하는 데 이용됐고, 여성 권리 문제, 성소수자 문제도 비슷하게 이용됐다.

(한국교회는) 성서에 대한 복합적 이해가 결여돼 있다. 성서는 하나님 말씀이라고 고백하지만, 역사적 산물이기도 하다. 성서가 쓰인 시대적·역사적 정황이 반영된 책이다. 성서가 쓰인 시대는 언제나 가부장제 구조였고, 타종교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있었다. 이를 해석하는 사람이 기독교를 지나치게 배타주의적 종교로 만들어서 정작 예수가 전하는 메시지보다 교리화된 메시지로 사람들을 배척한다.

한국교회는 예수가 외쳤던 메시지를 다시 잘 들여다봐야 한다. 예수는 누구를 혐오하라고 하지 않았다. 예수는 "서로 사랑하라", "환대하라", "책임적인 연대를 하라"고 했다. 이건 안 지키면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성서에 대한 왜곡된 단편적인 시선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는 것은, 예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는 것이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한 게 예수 정신인데 사랑은커녕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

존재 부정하는 건 사랑 아냐

- 반동성애 운동에 앞장서는 기독교인은 "우리는 동성애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죄에서 돌이키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소수자들은 전혀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혐오를 말하는 사람들은 혐오라고 느끼지 못한다.

이들의 행동은 신학적 문맹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예수가 이야기하는 사랑이 현대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성서는 해답을 주지 않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예수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에서 사랑하라는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이웃'은 누구인가. '이웃' 안에 이슬람교도와 성소수자도 들어가야 한다.

"성소수자와 타 종교인은 지옥에 간다"거나 "저주받을 것"이라는 최후 심판은 신에게 맡겨야 할 영역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의 이름을 통해 행동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존재 방식을 부정하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성소수자는 신나서 성소수자가 되는 게 아니다. 그 사람들의 존재 방식이다. 존재 방식을 부정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성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뭔지 계속 공부하고 고민해야 한다. 맹목적으로, 일방적으로 주는 것만 받아서 외우는 신앙은 한국교회를 미성숙하게 한다.

미성숙하기만 하면 괜찮은데, 미성숙한 교회는 끊임없이 타자에게 폭력을 가한다. 신학적 문맹을 벗어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성서가 주고 있는 질문을 우리가 현재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세계 속에서 연결시키고 '누구와 이웃이냐', '사랑이라는 게 대체 뭔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현대에서 이웃 사랑의 중요한 방식은 사회보장제도를 잘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독일 기독교인들이 몸소 보여 주고 있는 방식이다.

강남순 교수는 인터뷰 내내 마태복음 25장에서 말하는 도움이 필요한 여섯 사람의 기준을 언급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최후 심판의 때에 예수가 제시하는 여섯 가지 기준이 있다. 배고픈 사람, 헐벗은 사람, 목마른 사람, 갇힌 사람, 나그네 된 사람, 병든 사람을 돌봐야 한다는 것. 그것을 포괄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방법은 국가 사회보장제도다. 누구나 다 최소한의 보장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는 이웃 사랑의 중요한 한 통로라고 생각한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라면 그런 국가가 되도록 정치인을 뽑고, 누구나 포용할 수 있는 법을 만들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닌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 대한 관심은 없고 혐오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는 것이다. 예수 정신을 거스르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성숙해지려면 신학적 논의도 폭넓게 진행하고, 학습하고, 고민해야 한다. 요원한 길이라는 것은 알지만, 쉬운 길만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이 문제에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 성소수자 존재를 긍정하는 것만으로도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 싶다. 그럼에도 이 이슈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성소수자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이유가 있나.

전에는 나도 편견이 있었다. '성소수자는 뭔가 비정상적인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2006년 미국에 갔는데 동료 중에도 성소수자가 있고, 학생 중에도 성소수자 이른바 LGBT가 있었다. 직접 당사자들을 만나면서 성소수자 문제를 이론적으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성소수자고,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이 확산돼 있으니까 학자로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했다.

학교에서 코스모폴리터니즘, 페미니즘 등을 가르치면서 성별·인종 등 어떤 근거로도 차별은 정당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차별을 정당화하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인간에 대한 차별이 우리 인간성을 얼마나 파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내 관심이 시작됐다. 원래 내 관심은 성차별에 있었는데, 성별에 근거한 차별이 부당하다면 성적 정체성에 근거한 차별도 부당하다고 본다. 다양한 차별이 있는데 그런 모든 종류의 차별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은 인간에 대한 범죄다.

성소수자도 아니면서 나선다는 얘기도 많이 듣는다. 나는 성소수자가 아니지만, 거창하게 학자로서의 양심 이런 것보다 이 세상이 좀 더 나은 세상이 되도록 이론을 갖고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이 학자라고 생각한다. 좋은 이론은 곧 좋은 실천이다. 우리가 가진 인식론적 한계와 편견을 깨 주는 이론을 확산하는 게 좋은 실천의 근거가 된다. 차별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학자로서, 또 인간으로서 책임으로 연결된다. 거창한 게 아니다.

혐오 논쟁, 질문 다시 해야

- 얼마 전 DJ DOC 노래 '수취인분명'에 나오는 '미스 박'이라는 표현이 "여성 혐오 표현이다", "아니다"로 나뉘어 논란이 됐다. 단순히 혐오가 맞다, 아니다로 규정하기 힘든 것 같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미스 박' 논란을 보면서 "혐오인가 아닌가"라고 묻는 질문 자체가 위험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혐오다 혹은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게 질문하는데, 질문을 다시 해야 한다. "미스 박이라는 호칭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왜"라고 물으면 그 이면에 담긴 진정한 뜻을 묻는 대신 "나는 맞는데 너는 아니다"라고 편을 가르게 된다.

'미스 박'이라는 호칭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왜 문제를 제기하는가'라고 묻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분명히 문제가 있으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물론 표현을 문제 삼는 것과 DJ DOC 공연을 취소한 것은 별개 문제로 봐야 한다. 하나로 묶으면 안 된다.

"남자는 '미스터'밖에 없는데, 여자는 '미스'와 '미세스'로 나눠 있을까"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 의식이 변화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혐오냐 아니냐"고 물으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미스 박' 표현이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은, 여성들의 존재가 결혼 여부에 따라 미스와 미세스로 나뉜다는 맥락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운동사에서 늘 있어 온 일이다. DJ DOC를 출연 정지한 거는 또 다른 문제다. 문제 원인은 따로 보고 후속 조치에 대한 타당성은 또다시 논의해야 하는 부분이다.

강남순 교수는 '예스' 또는 '노'로만 답해야 하는 질문은 지양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 올해 한국 사회에서 '여성 혐오' 논쟁이 한창이다.

여성 혐오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 '무엇이 혐오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자명하지 않기 때문에 혐오가 무엇인지 근원적으로 물으면서 '혐오'에 접근해야 한다. 사람들은 혐오라는 단어 때문에 '여성 혐오'라는 것이 늘 노골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생각한다. 여성 혐오는 여성운동사에서 보면 대개 커다란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다. 둘째, 여성은 위험한 존재다. 철학·신학적 근거를 가지고 여성 혐오 사상이 형성돼 왔다. 어떤 사건이나 표현이 여성 혐오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것이 주는 메시지나 사람에게 전달하는 가치관이 무엇인지 봐야 한다. 노골적으로 "나는 너를 싫어해. 나는 너를 증오해" 이런 것이 여성 혐오가 아니다. 복합적인 시선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강남역 사건을 포함해 여성을 결혼 여부로 규정하는 것, 여성을 끊임없이 약자 혹은 열등한 존재로 표현하는 것, 유혹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이 모든 게 여성 혐오 범주에 들어간다. 행동하는 사람,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여교수님·여배우·여승무원이라고 불러도 마찬가지다. 이런 호칭이 왜 여성 혐오 표현인가에 대한 더 근원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남자 배우들은 남배우라고 부르지 않는데, 왜 여자 배우는 여배우라고 부를까. 왜 남기자·남검사·남자고등학교는 없는데 여기자·여검사·여자고등학교만 있나. 이런 표현이 나온 배경은, 남자는 주체적인 존재지만 여성을 부속적인 존재로 보는 것과 관련 있다. 규범에 서 있는 사람은 남자고, 각종 단어에 '여' 자를 하나 더 붙이는 것은 넒은 의미에서 보면 여성이 열등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성 혐오에 해당한다.

- 혐오라고 잘라 말할 수 없지만, 한국교회는 여성 차별이 내재화된 공간 아닌가. 차별은 어떤 식으로 혐오에 영향을 미치는가.

차별과 혐오는 분리할 수 없다. 차별에는 언제나 혐오가 깔려 있다. 여성이 열등한 존재라는 생각이 혐오 사상의 중요한 요소다. "이 표현이 차별이냐, 혐오냐" 이런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다. 성소수자·이슬람 등 모든 차별에는 언제나 그들이 열등한 존재, 위험한 존재라는 혐오 사상이 내재돼 있다. 이슬람 혐오의 경우 차별을 정당화한다. 차별이 자연스러우면 혐오가 당연하고 정당하다. 둘 중 하나를 빠뜨릴 수 없다.

차별인가 혐오인가를 묻는 질문 자체가 잘못돼 있다. 질문을 다시 해야 한다. 왜 차별을 문제 삼는지, 정황과 맥락을 보고 접근해야 한다. 여성 호칭에 대한 문제는 어떤 이해가 있었나, 교회 내에서 여성 차별을 왜 언급하는지에 대해 이론을 바탕으로 한 이해가 동반돼야 한다. 미시적 접근, 거시적 접근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두 가지를 병행하면서 질문을 바르게 묻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강남순 교수는 "혐오받는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신앙인의 의무"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개신교인은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

- 한국교회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목소리는 한정적이다. 신학과 페미니즘이 같이 갈 수 없다는 말도 들린다.

신학과 페미니즘이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은 페미니즘이 뭔지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런 표현 자체가 많은 것을 오도한다. 페미니즘처럼 복잡한 게 없다. 종교개혁의 진정한 정신은 저항하는 것이다. 개신교를 칭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을 잘못 번역했다고 생각한다. 개신교인은 저항하는 사람이다. 개신교인은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현상을 예수 정신에 비춰 저항해야 한다.

개혁주의(reformation)에 대한 이해도 문제다. 인간을 차별하는 것, 억압하는 것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이 진정한 개혁주의다. 사회가 가지고 있는 차별의 문제, 억압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혁하고 저항하는 사람이 진정한 프로테스탄트다. 그런데 성소수자 혐오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는 건 문제가 많다. 교황도 "내가 누군데 그 사람을 심판하느냐"고 말했다. 심판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고 우리 일은 소외된 사람, 박해받는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을 돌보고 연대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방인을 돌보고, 낯선자들을 환대하라"고 말했다. 크리스천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다. 예수가 말하는 것들을 현대 정황에 잘 연계해야 한다. 너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 중 하나다. 급진적인 정치적 선언이다.

사랑은 모험을 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법 이민자를 사랑한다고 하자. 이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법적으로 내가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런 사건도 있었다. 법이 규정하는 불법 이주 노동자들을 내 신앙 양심에 따라 자기 집에 머물게 하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범죄자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정치적 모험임과 동시에 저항을 요구한다. 예수를 정말로 잘 믿으려는 사람은 예수 메시지가 내가 있는 정황에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고민해야 한다. 지금 교회는 구원 클럽이 됐다. 예수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 "우리는 혐오 모른다, 왜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 크리스천도 있다.

예수의 관심은 가장 작은 자에게 있었다.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지금 이 사회에서 혐오받는 사람이 가장 작은 자다. 그런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면 최후 심판에서 예수님한테 혼나는 거다. 교회 다니느라 바빠서 관심 없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마지막에 가르치신 것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신앙인의 의무다. 사회적 약자이자, 가장 약한 사람들이다. 성서에 나오는 "감옥에 갇힌 자"라는 표현은 편견 혹은 차별의 감옥일 수 있다. 차별받고 억압받고 소외받는 사람과 연대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예수의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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