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스웨거2에 출연한 슬릭이 자기 정체성을 페미니스트라고 밝혔다. 사진 제공 슬릭

"얘기할 게 있어.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안 할 거 같아서. 여긴 아직도 기지배 같다는 말을 욕으로 한다면서. 아직도 게이 같다는 말을 욕으로 한다면서. 아직도 아무도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모른다면서. 그게 힙합이라고 하면 나는 오늘부터 힙합 관둠. 슬릭, 내 이름 앞에 수식어는 내가 붙임. 이 바닥에 제대로 된 Female MC. 아니 지금부터 이 바닥에 제대로 된 헬로 FuXX 페미니스트."

[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래퍼 슬릭이 온라인 힙합 콘텐츠인 '마이크스웨거2'에 나와 랩을 뱉었다. 많은 청취자가 즐겨 보는 채널에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못 박았다. 마이크스웨거2에 나온 그의 랩을 들으니 반가웠다. 많은 주제 중 왜 하필 페미니스트 이야기를 꺼냈을까.

슬릭의 지적처럼, 한국 힙합계에서 기지배라는 말은 욕처럼 사용된다. 기지배는 애교에 불과하다. 이보다 훨씬 심각한, 젠더 감수성이 배제된 가사가 넘쳐난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 가사와 퍼포먼스도 쉽게 볼 수 있다.

힙합과 랩은 주류 문화로 자리 잡았지만, 지금까지 이런 문제 제기를 한 래퍼는 없었다. 슬릭은 달랐다. 12월 6일 서울 회기역 근처 한 카페에서 만난 슬릭은 젠더 문제에 무감각한 힙합계를 비판했다. 랩을 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풀어 나갔다. 한국 사회에 '여성 혐오' 어젠다를 던진 '강남역 살인 사건'을 말할 때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래는 래퍼 슬릭과의 일문일답.

- 만나서 반가워요.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랩하고 음악 만드는 슬릭입니다. 사람들이 슬릭이 무슨 뜻인지 매번 물어보는데, 별 뜻은 없어요. (웃음) 사전적 의미를 보니 '말을 잘하고 매끄럽다'로 나오네요. 랩은 자연스럽게 시작한 거 같아요. 음악 방송에 래퍼들이 나오면 신기해서 많이 봤어요. 어렸을 때부터 마이너 장르를 알아보는 일을 좋아했어요. 친구들이 가요를 들을 때, 힙합 장르를 접하게 됐어요. 중학교 때부터 가사를 쓰고, 고등학생 시절 커뮤니티 활동을 하거나 간간이 공연했죠.

- 마이크스웨거2에서 한 랩이 이슈가 됐어요. 페미니스트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었나요?

많은 사람이 보니까요. 제가 집안에서만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면 아무도 모르잖아요. 마이크스웨거에 나오기 전부터 꾸준히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SNS에 페미니즘 이슈를 리트윗하거나 의견을 덧붙였어요. 인터뷰할 때도 종종 말했고요.

-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제가 사는 세상이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알게 됐어요. 언젠가부터 주변에서 '메갈리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누군가는 '여자 일베 커뮤니티'라고도 하고요. 메갈리아에 들어가서 보니 현재 여성들이 이야기하는 문제들이 곳곳에 올라와 있었어요. 저도 미디어나 음악에서 접하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고요. 커뮤니티를 보는데 행복하지 않았어요. 정확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 우에노 치즈코가 쓴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은행나무)을 읽었어요.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여러 문제 중에 유리 천장이 있다는 사실, 남성과 비교했을 때 임금격차가 있다는 사실이 가장 불평등한 현상이라고 생각했어요. 이후에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봄알람)을 읽었어요.

슬릭은 메갈리아를 통해 페미니즘에 눈떴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 메갈리아 하면 미러링이 떠오르는데요. 미러링 방식으로 가사를 쓸 생각은 없나요.

미러링이라는 표현 방법은 최후 수단 같아요. 사람들은 평화 시위라는 말에 어폐가 있다고 하잖아요. 목소리를 내다가 들어주지 않아서 시위를 하는 건데, 거기에 평화적인 방식을 쓴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 같아요. 미러링도 유사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평이하게 말을 하지만 들어주지 않으니까 다른 방법을 찾던 중 미러링을 쓰는 거예요. 사람들은 미러링의 폭력성이 페미니즘의 코어 가치인 것처럼 생각하고 지적하기도 해요. 그건 아니라고 해요.

미러링의 옳고 그름을 떠나, 가사 쓰는 방식에서 미러링을 할 것인가라는 생각은 아직 해 본 적이 없어요. 저는 미러링과 다른 방법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별생각이 없어요. 나중은 어떻게 될지 모르죠.

-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여성 혐오가 이슈가 됐는데요. 그때 심정은 어땠나요.

이 사건 전에도 무수한 강남역 살인 사건이 있었어요. 관심을 받지 못했을 뿐이지 본질은 똑같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과 심각성에 대해 배워 가고 있는 도중에 사건이 터져서 슬프고 무기력했죠. 정신 건강도 좋지 않았어요.

어떤 사람은 이 사건이 여성 혐오와 무관하다고 말하기도 해요. 젠더 감수성이 낮은 발언이라고 봐요. 강남역 살인 사건이 늦은 시간에 무방비한 여성을 남성이 살해한 사건이잖아요. 이유는 피해자인 여성이 약하고 만만하니까요. 죽이기 쉬우니까.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을 노린 범죄는 명백하게 소수자 혐오 범죄지요.

- 여성을 성적 소비 대상으로 인식하는 한국 힙합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런 가사를 보면 불편하죠. 이 문제를 여성으로서, 래퍼로서 두 가지 입장에서 생각해요. 여성 시각에서는 당연히 옳지 않은 일이죠. 저는 그런 음악을 소비하지 않을 거고 비판할 거예요.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낼 거예요. 그런 래퍼들 음악은 절대 듣지 않아요. 상대를 알려면 음악을 듣는 게 맞지만, 슬릭이 아닌 김령화라는 사람은 더 좋은 음악을 듣는 게 차라리 도움이 되더라고요.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여혐, 여성을 성적 소비 대상으로 표현하는 게 옳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랩은 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여혐 래퍼들은 결코 잘되지 못할 거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잘된다는 말이 단순히 돈을 잘 버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아요. 음악 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지, 래퍼로서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지까지 포함돼 있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잘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슬릭은 여혐이 넘치는 랩 가사에 불편함을 느낀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 모든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듯, 여성 래퍼도 각자 입장이 다르다는 의미인가요?

각자 집중하고 싶은, 삶에 맞닿은 이슈가 다르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한 가지 이슈만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요. 저는 그게 우연찮게 페미니즘이었던 거 같아요. 다른 분들은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또 젠더 문제를 잘 모르시면 의견 내기가 어렵잖아요.

- 여성 래퍼는 래퍼보다 '여성'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아요. 성별을 나누는 듯한 느낌도 들고요. 슬릭도 "이 바닥에 제대로 된 여성 래퍼"라고 표현했는데요.

맞아요. 노래 가사 중에 "이 바닥에 제대로 된 여자 래퍼는 딱 하나뿐"이라는 게 있어요. 제 앨범 소개 글로도 "이 바닥에 제대로 된 여자 래퍼"라는 문구를 썼고요. 그런데 이 지점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어요. 이제는 여자 래퍼라는 범주를 만드는 거 자체를 부정하게 돼요. 여자 래퍼라고 범주를 나누는 순간, 저 스스로가 평가받을 때 "여자 래퍼치고 잘해", "여자 래퍼라서 못 해" 라는 말을 피해 갈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랩을 못하면 여자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제가 못하는 거죠. 저보다 잘하는 남자 래퍼가 있으면 그분이 잘하는 거지, 성별로 대표되는 문제는 아닌 거 같아요. 박근혜 대통령이 일을 못하는 게 여자라서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남자라서 못하는 것도 아니고요.

- 그럼 어떤 랩 가사를 쓰고 싶으세요.

제가 듣고 싶은 말들을 쓰고 싶어요. 요새는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으니까 그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자신과 같은 시선이나 생각을 가진 사람·영화·음악을 좋아하잖아요. 또 그 시선들이 모였을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요도가 높아지기도 하고요. 저는 제가 바라보는 세상을 설명하는 노래를 만들고 싶어요.

미국 래퍼 중에 켄드릭 라마를 좋아해요. 그 래퍼는 미국 내 흑인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 왔어요. 가난한 사람이나 사회 시스템과 괴리감을 느낀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 노래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공감을 받잖아요. 위로도 받고. 그런 걸 하고 싶죠.

슬릭은 여혐 이야기를 들을 때 무기력함을 느낀다. 자신이 행복한 세상에서 살기 위해 목소리를 낸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 혹시 종교가 있나요.

종교는 없어요. 지금은 교회 다니지 않지만, 어릴 때 친구 따라 가 본 적 있어요. 중·고등학교 시절 미션스쿨에 다니며, 채플을 드린 적도 있고요.

- 교회 안에서는 여혐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성을 둘러싼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데요. (기자는 질문 후 지금까지 교회에서 발생한 몇 가지 사례를 설명했다.)

그것까지는 몰랐네요. 이미 사회에서 계속 문제가 발생하고 있어서 '교회에서는 생기지 않겠지'라고 생각했죠. 최근 여성 영화제에서 '이브'라는 영화를 봤어요. 모태신앙 여자 감독이 여성을 남성 아래로 보는 문화를 지적하는 다큐멘터리인데요. 저는 기독교를 잘 모르지만, 감독 시선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새로웠어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 리스너들에게 마지막으로 해 주고 싶으신 말이 있나요.

저는 제 행복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에요. 위에서 말했듯이,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서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여성 혐오'라는 프레임을 보면 너무 슬프고 절망적이에요. 제가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목소리를 내고 있어요. 대의를 위해 이야기한 것은 아니고, 타인을 비난하고 지적하기 위한 것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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