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미시시피한인침례교회 안정섭 목사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2012년 11월 4일 안정섭 목사가 '사랑의 최고봉'(The Highest of the Love, 본문: 로마서 13:1-7)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허락을 받아 전문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로마서 13:1-7을 가지고 권세자들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이해하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다면 로마서 전체를 하나로 연결해서 읽어 보길 권한다. 흔히 로마서 1:17을 로마서 전체의 주제를 진술한 문장으로 보고 로마서를 이신칭의로만 이해한다. 이렇게 이해하는 분들은 1-11장의 내용만 주목한다. 물론 로마서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1-11장의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라는 내용이 틀림없다. 로마서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해서 다시 유대교로 돌려 도루묵이 되게 하려는 악한 세력들에 대항하기 위해 이신칭의 논쟁을 1-11장을 통해 한 것이다. 하지만 로마서를 이신칭의를 위한 교리서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은 로마서의 진짜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1-11장을 통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논쟁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구약의 율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멈추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대안이 없는 논쟁은 논쟁에서 이겼다 해도 논쟁으로서 가치가 없는 것이다. 바울은 그 대안을 제시했다. 그 대안은 이제 구약의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안은 12:1-13:10에 나타나 있다.

12:1-12은 믿음의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로마서의 주된 독자는 유대인 신자들이다(이에 대한 논쟁은 생략하겠다). 그들에게 유대인 믿음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구약의 희생 제사를 대신하는 합당한 예배라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도 자기를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에 거룩한 산제사인 것이다. 12:13-21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12:13-21은 자신들을 핍박하는 유대인 원수들을 사랑하라는 내용이다. 여기까지는 로마서의 수신자들이 끄덕끄덕했을 것이고 은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깜짝 놀랄 만한 충격 선언이 이어진다. 13:1-7의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은 이방인 원수들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유대인 신자들이 백번 양보한다면 이방인들을 사랑하라는 말까지는 용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핍박하는 이방인 원수들의 우두머리들을 사랑하라는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13:8-12에서 십계명을 구약의 율법의 요약으로 들면서 13:10은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로마서의 결론은 13:10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는 말이다. 구약의 율법을 흠 없이 철저히 지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철저히 구원받는 것이다. 그 사랑의 법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어서 교회를 핍박하는 유대인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이고 또 더 나아가서 교회를 핍박하는 이방인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 믿어!"라고 한마디 던졌다고 구원받은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걸 모르면 야고보가 말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과 로마서가 배치된다고 말하는 사오정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걸 모르기 때문에 구원파 같은 믿음을 가진 신자들이 판을 치는 것이다. 정말로 믿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가운데 모시고 그분의 사랑을 몸부림치며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로마서 13:1-7을 읽지 않으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핍박하는 이방인 원수들의 우두머리들인 권세자들에게까지 복종하라는 말은 무조건 맹종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라는 것이다. 이 구절은 문맥과 상관없이 인용할 때 독재자들의 통치 수단으로 변질된다. 어느 구절이든 문맥과 상관없이 잘라서 인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설교자 자신의 철학일 뿐이다.

다음은 본인이 2012년 11월 4일 미시시피한인침례교회 주일예배 때 전했던 설교 전문이다.

사랑의 최고봉

로마서 12장을 3주 동안 설교했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자비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믿음을 표준 삼아 겸손히 생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준 삼아 거짓 없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거짓 없는 사랑은 가족의 사랑으로 성도끼리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교회를 핍박하는 유대인 원수들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13:1에서는 갑자기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12장 끝부분과 13:1-7과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가 8절에 가면 다시 서로 사랑하는 것에 대한 말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인 13:1-7만 뺀다면 훨씬 자연스럽게 연결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보적인 신학자(liberal theologians)들은 이 부분을 로마 정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후대에 끼워 넣은 부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 부분을 삽입한 것은 A.D. 313년 이후여야 합니다. 콘스탄틴 황제 이후에야 교회가 로마제국과 우호적인 관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세기 성경 필사본(2nd C manuscript) 중 하나인 P46에도 이 부분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또 12:17에 선과 악이 비교되어 나오는데 13:3에도 똑같은 말인 선과 악이 좋은 일과 나쁜 일로 번역되어 나옵니다. 모든 증거를 다 찾아보면 볼수록 오늘 본문을 나중에 끼워 넣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분명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진보적인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하고 인용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 Africa)의 대통령이었던 P.W. Botha는 로마서 13:1을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인종차별 정책(Apartheid)를 지지하라고 했습니다. Botha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많은 정치가들이 이 구절을 말하며 자신들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들도 역시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정부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까지만 복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도행전 5:29에서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했습니다. 또 출애굽기 1:17에서 산파들은 파라오가 아기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다니엘 3장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다니엘 6장에 보면 다니엘은 다리오가 기도를 금지한 명령을 어겼습니다. 성경은 본문의 앞뒤 문맥을 생각하며 이해해야 합니다. 또 성경이 기록될 당시 독자들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알고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 당시 로마교회 성도들은 이 부분에 대해 전혀 오해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엉뚱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후대 사람들입니다. 후대 사람들은 바울 당시 로마교회의 형편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바울 당시 로마교회의 형편을 알려면 바울이 주로 누구를 대상으로 로마서를 썼는지 왜 썼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지금까지 로마서를 설교하면서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로마교회를 세웠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려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때문에 로마교회는 지도자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 신자들이 교회를 이끌어 갔습니다. 5년 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죽고 네로가 로마 황제가 되자 쫓겨났던 유대인 신자들이 돌아왔습니다. 교회를 걱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돌아와 보니 자신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던 것입니다. 문제는 돌아온 유대인 신자들이 복음 이외에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주로 돌아온 유대인 신자들에게 당부할 목적으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주로 유대인 신자들에게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제국을 원수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이 유대를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유대인 포로의 후손들입니다. 팔레스타인에 살던 일부 열성적인 유대인들은 게릴라전으로 로마제국에 무력 항쟁을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납세 거부 운동으로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또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부터 로마 황제를 신격화했기 때문에 그 반감은 극대화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2:14-17에 보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칠까요, 말까요?"라고 예수님께 질문한 것이 나옵니다. 이것도 당시의 황제숭배와 관련된 함정이었습니다. 바치라고 하면 우상숭배자로 몰아 처단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바치지 말라고 하면 납세 거부 운동을 하던 무장 항쟁 게릴라의 우두머리로 고소했을 것이었습니다. 특히 로마에 살던 유대인들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살던 터전을 잃었기에 그 반감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황제가 바뀌어 돌아오긴 했지만 유대인들의 반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유대인들에게 원수였던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특히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는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원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로마 황제가 파견한 총독의 손에 처형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 지도자들도 유대인들에 대해 적대적이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Tacitus는 B.C. 43년에 죽은 Cicero가 가졌던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기록했습니다(Tacitus Hist. 5.5.1). 당시 로마제국 지도자들의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주로 세금 때문이었습니다. 성전세는 내면서 로마제국에 내는 세금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황제숭배를 유대인들은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추방령의 표면상의 이유는 유대인 사이의 분쟁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이유는 이런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감 때문입니다. 클라우디우스의 죽음으로 추방령이 해제되었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감은 로마제국 지도자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 지도자들은 유대인들과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 추방령의 발단이 된 사건도 유대인과 유대인 기독교인 사이의 분쟁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 지도자들은 둘 사이를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A.D. 70년 이전에는 기독교인들이 성전이나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조차도 유대교의 한 종파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유대교 안에는 모두가 하나님을 믿지만 생각이 조금씩 다른 분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바울은 로마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다고 본 것입니다. 성도 간의 분쟁으로 교회는 나뉘어질 위기에 있었습니다. 또 로마제국과 유대인 사이의 적대감 때문에 복음 전파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지난주 말씀을 되새겨 보겠습니다. 12:14-21은 기독교를 핍박하던 유대인 원수들을 축복하고 원수 갚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만약 바울이 저들 앞에 있었더라면 12:9-21을 듣고 감동이 되어 바울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맞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거다. 우리를 핍박하고 죽이려는 원수인 유대인 동포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최고봉이지"라고 화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갑자기 이게 다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게 다가 아니라고 한 것이 바로 13:1-7입니다. 핍박하던 유대인들은 유대인 신자들에겐 원수였지만 전도해야 할 동족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사랑하라는 말은 100% 수긍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바울이 한 말에는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었을 것입니다. 동족이 아니라 이방인인 원수들까지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3:1-7은 또 다른 원수들로 여겼던 로마제국 지도자들에게 원수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 원수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그들의 법을 잘 지키고 세금을 잘 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역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13:8에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한 것은 바로 앞에서 말한 성도간의 사랑, 유대인 원수 사랑, 이방인 원수 사랑을 결론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동족인 원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이방인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방인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최고봉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교라는 경계를 분명히 했습니다. 이방인이 유대교로 들어오려면 유대인화 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이라는 경계는 복음 전파에 심각한 장애물이었습니다. 이제는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경계는 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경계를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계 안에는 유대인도 로마인도 모든 이방인들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유대인 원수들도 사랑하고 이방인 원수들인 로마제국 지도자들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바울의 말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적대적인 상황까지 다 내다보고 그렇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유대인 핍박자들이나 로마제국의 권력자들이나 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1. 권세에 복종하라

13:1은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은 누구나"란 말은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로마교회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유대인이건 로마인이건 상관없이 다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에 있는 권세"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이는 분명히 로마제국 정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지도자들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는 분명히 원수입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원수들을 세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워 주셨다는 말은 계급별로 줄을 세웠다는 뜻의 군대용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세력들인데 왜 하나님께서 세웠다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은 요 19:11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임명하셨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 모든 만물과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병사들을 계급별로 세우듯 적재적소에 세워 주신 것입니다. 로마의 권력자들도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마 28:18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가 주(Jesus is Lord)"라고 고백하다가 맹수들의 밥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 아래 두신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수많은 정치 지도자들을 사용하셔서 복음이 전파되게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엔 더 심한 말이 나옵니다. "로마제국의 권력자들에게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로마제국의 반역자는 하나님의 반역자란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자식을 사랑하듯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죽도록 싫어도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원수인 로마제국 권력자들까지도 그렇게 의지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리스천들은 무정부주의자나 사회 전복 세력(anarchists or subversives)이 아닙니다. 만약 크리스천이라는 집단들이 무정부주의를 주장하거나 사회를 전복하려 한다면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님의 반역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반역자들은 주님 오시는 날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3-4절은 권세자들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역할을 하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권세자들의 역할은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3절의 "치안관"이라고 번역된 말을 개역에서는 "다스리는 자"라고 번역했습니다. 1-2절에 나오는 권세라는 말과 다르지만 같은 뜻을 가진 말입니다. 권세라는 말은 권력자를 뜻하는지 영적인 세력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치안관'이나 '다스리는 자'로 번역된 말은 분명히 인간인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로마의 통치자들을 가리킵니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치안관들(rulers)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3절 중간에서 치안관이란 말이 다시 권세를 행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권세란 말이 인간 권세를 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치안관이란 말을 잠깐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한글 성경엔 분명하지 않지만 3절 중간 이후엔 질문과 대답이 나옵니다. "권세자들을 두려워하고 싶지 않니?", "그러면 좋은 일 해! 그럼 칭찬받을 거야."

제가 한국에서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는 경찰차가 번쩍거려도 하나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운전을 시작한 이후 경찰차만 보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저는 과속을 안 하지만 혹시 속도제한 표지판을 잘못 보고 실수하지는 않았는지 걱정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운전을 하다 보면 경찰차가 세워져 있는 것을 자주 볼 것입니다. 그들의 역할은 두려움을 주어서 과속이나 교통법규를 위반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로마제국의 권세자들도 역시 두려움을 주어 나쁜 일을 못하게 하려는 역할을 했습니다.

두 번째 권세자들의 역할은 4절에 나옵니다. 권세자들의 두 번째 역할은 유익을 주려는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강도를 만났을 때 경찰관이 여러분 앞에 나타난다면 어떻겠습니까? 두려울까요? 너무 반갑고 기쁠 것입니다. 이처럼 권력자들은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움을 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악한 일을 한다면 기쁨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두려움을 주는 존재로 바뀌는 것입니다. 칼은 공연히 폼으로 차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칼을 찬 사람이란 말은 오늘날의 경찰관과 같은 공권력을 뜻합니다. 칼을 찬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악한 자들을 처형하기 위해서(death penalty) 입니다. 또 하나는 terror를 진정시키기 위해서(instill the terror)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권력은 도움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악한 일을 한다면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권력은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다시 한 번 말하고 있습니다. 나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집행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벼락을 내려서 죽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상 제도들을 통해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3-4절에서 말한 내용을 요약하면 두려움 때문에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권세에 복종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 말합니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진노 즉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양심을 생각해서라는 것입니다.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하지 말고 양심에 따라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처벌이 두려워서 복종한다면 볼 때만 잘하고 안 보는 데서는 법을 어겨도 됩니다. 이건 앞에서 말한 거짓사랑입니다. 하지만 양심을 생각해서 복종한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양심이란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은밀한 중에 행한 모든 일을 다 보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크리스천들인 것입니다.

6절의 "같은 이유로"란 말은 앞에서 나온 "양심 때문에 복종한다는 이유로"란 뜻입니다. 양심 때문에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에 내는 조세를 잘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세란 말은 로마 시민이 아닌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에게 받던 것입니다. 로마에 살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전쟁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이기 때문에 조세를 내야 했습니다. 이 조세를 잘 내지 않았기에 유대인들은 Cicero의 적대감을 샀다고 Tacitus는 기록했습니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기독교인들도 역시 유대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도 적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입니다. 유대인들은 조세를 내도 벌을 받지 않으려고 억지로 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유대인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두려움이 아니라 양심에 근거해서 조세를 바친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세를 바친다는 말은 명령이 아닙니다. 이미 일부는 그렇게 양심껏 바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6절에서 다시 한 번 로마의 권력자들을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나온 말은 집사란 뜻의 단어이지만 여기서는 원래 제사를 담당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로마제국에서 공무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마도 로마제국의 세무공무원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세금 걷는 로마의 관리들을 하나님의 제사장처럼 생각하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정직하게 바치라는 것입니다. 왜 원수인 로마제국의 관리들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렇게 할 때 로마제국 관리들은 크리스천들과 다른 유대인들을 구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다른 종교인들과는 분명히 다르게 보여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7절은 지금까지 말한 것의 결론을 내리는 명령입니다. 그 명령은 "모든 사람에게 의무를 다하라"입니다. 여기서 갚아야 할 의무란 Tax만이 아니라 존경하는 태도까지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다음 4가지에서 나타납니다.

첫째 "조세를 바쳐야 할 이에게 조세를 바치라(If you owe taxes, pay taxes)"고 했습니다. 조세라고 번역된 말은 6절에서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들에게 받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관세를 바쳐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custom to whom custom)"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건을 수입할 때 내던 세금(import tax)를 말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한 쌍으로 써서 일반적인 세금이란 뜻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두 쌍의 단어는 두려워할 이는 두려워하고 존경할 이는 존경(fear to whom fear; honor to whom honor)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라는 말은 무서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두려운 마음으로 공경(veneration with fear)하라는 뜻입니다. 존경이란 말은 로마제국의 지도자들 앞에 머리를 숙여 그들의 지위를 인정해 주라는 말입니다. 결국 두려움과 존경은 세금만 바칠 것이 아니라 최고의 대우를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조세나 관세를 바치는 것은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과 존경을 하는 것은 억지로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양심의 문제입니다. 양심에 따라 한다면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벌을 받든지 안 받든지 상관없이 지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라고 명령한 이유는 그들이 훌륭해서나 예뻐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복음 전파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원수일지라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권세라는 단어는 로마제국 정치 지도자들과 관리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들은 유대인 뿐 아니라 유대인 신자들에게는 분명히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저들에게 반역하면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 충격적인 말은 이 원수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반복해서 말한 것입니다. 저들은 두려움을 주어 악한 일을 행치 못하게 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이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두려움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양심을 생각해서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금은 벌 받지 않으려는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수인 로마제국 지도자들을 공경하고 존경하는 것은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금을 잘 내는 것과 존경을 표시하는 것은 로마제국 지도자들에게 표시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바울은 두려움과 존경을 보여 주어 그들에게 최고의 사랑을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이방인 원수를 이처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Everest)인 것입니다. 왜 이런 부탁을 했는지는 그 당시의 연대기를 재구성해 보면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클라우디우스가 A.D. 54년에 죽고 네로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로마서는 보통 57~58년 사이에 기록했다고 봅니다. 추방령이 해제된 후 3~4년 후에 로마서가 기록되어 전해진 것입니다. 네로도 처음 5년 동안인 A.D. 59년까지는 비교적 바른 통치를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엔 네로가 바른 통치를 하고 있던 때입니다. 아직 기독교에 대한 본격적인 핍박이 나타나지 않았던 때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3:1-7에서 로마제국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라고 말한 것은 국가권력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폭풍전야 같이 고요한 속에서도 서로의 적대감에서 오는 팽팽한 위기의 긴장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가 기록된 후 6~7년 후인 A.D. 64년의 심각한 화재로 로마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네로의 대적들은 네로가 불을 놓았다고 고소를 했습니다. 네로는 비난의 화살을 크리스천들에게 돌려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도 이 기간에 순교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몇 년 뒤에 일어날 핍박을 내다보고 이 부분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울의 판단으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렇게 기록하게 한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13:1-7은 앞으로 다가올 핍박을 예언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무시하고 오늘날 정치가들이 이 구절을 인용해서 무조건 공권력에 복종하라고 하면 잘못 인용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원래 로마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에게 준 것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원수인 로마제국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만약 정치가들이 이 구절을 인용한다면 남의 편지를 훔쳐보고 소리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은 정치가들이 아닌 우리와 같은 신자들에게 준 것입니다.

우리도 국가의 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세금도 제대로 내야 합니다. 운전할 때도 교통법규를 잘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다 지킵니다. 하지만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은 두려움과 양심의 차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처벌이 두려워서 법을 지킵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양심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다 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심에 따라 국가의 기관이나 관리들에게 최대한의 존경을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크리스천들을 칭송하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독재적인 권력이라도 무정부 상태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최고의 존경을 보여 줘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최고봉입니다.

하지만 국가권력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한다면 그때는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말했지만 사도 요한은 계시록 13장에서 로마제국을 사탄의 일꾼으로 묘사했습니다. 네로 황제 때인 A.D. 64년에 시작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도미티안 황제 때에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A.D. 81에 통치를 시작해서 A.D. 96년에 죽었습니다. 계시록은 바로 이 기간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로마제국을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이라 했고 요한은 사탄의 일꾼이라 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을 무조건 권력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기준은 권력이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어떠한 권력이라도 저항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최고로 미워하는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한다면 국가권력이나 기관들에게 의무를 다하고 존경을 표시하는 것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이 칭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칭송을 받을 것입니다. 칭송뿐 아니라 그들도 감동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입니다. 우리가 국가 권력에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복음을 땅끝까지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최고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시대의 신자들의 풍조도 바울 시대와 마찬가지로 거짓 사랑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면 쓴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 전파를 위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을 사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최고봉에 우뚝 서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안정섭 / 미시시피한인침례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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