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은 구원론과 직결된다. 예정의 근본 목적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와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예정의 과정을 통해 우리 가운데 어떻게 임하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더욱 심대한 통찰력을 얻게 된다.

#1. 절대주권과 전적 은혜 아래서의 구원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전적인 은혜의 결과이다(사 49:8, 행 15:11, 고후 6:2, 엡 2:5,8, 딛 2:11).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추방된 이후로 온 인류는 죄 아래 거하게 되었고 죄 된(타락한) 인간은 자신 안에 구원을 이룰 만한 능력이 없다. 자력 구원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 길을 열어 주셔야만 가능한 일이 되었다(참조, 창 3:24). 이제 하나님은 당신의 절대주권(절대 권한)과 그 은혜 아래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 해서, 하나님이 함부로 써 대는 힘의 남용으로 이해하면 잘못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그 대상이 누구든, 어느 것 하나도 섣부른 일이 없으시며 가장 온전하고 치밀하여 결코 후회함이 없으시다(민 23:19).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시며 누구도 억울하게 하지 않으신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행사하는 모든 일은 가장 온전한 선(善)의 총화(總和)이다. 따라서 누구로부터도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최선(至高至善)의 역사를 이룬다.1)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전적 은혜의 역사로 우리 가운데 임하시며 그러한 배경 아래서 우리를 부르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에 부속하는 인간의 적절한 응답, 즉 믿음과 회개와 영접 등이 있을 때 비로소 그 구원의 길을 우리 가운데 허락하신다(마 4:17, 막 1:15, 6:12 등).

인간의 응답도 각기 자기 소견에 합당한 응답이 아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적절히 응답하는 자'(자발적인 응답자)에게만 그 구원이 성취된다.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방법에 대해 우리 중 누구도 간섭할 수 없고 시빗거리로 삼을 수 없다. 결국 구원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전적인 은혜 아래서만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인간의 응답도 그런 차원에서 의미가 있게 된다.

#2. 절대주권 아래서 의미 있는 자발적 응답

칼뱅주의는 영생을 얻도록 예정된 자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으며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2)로 말미암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거역할 수 없는 은혜는, 인간의 자유의지 관점에서 보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어쩌지 못하는, 거부할 수 없는) 은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칼뱅이 '거역할 수 없는 은혜'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한, 이미 영생하도록 예정된 자들은 선택의 여지없는 응답만이 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칼뱅의 주장에 의하면 자유의지가 발동한 '자발적인 선한 응답'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 된다. 타락한 인간은 그런 자발적인 선한 응답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의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Total Depravity)해 있기 때문이다(장 칼뱅, <기독교강요 상권>(생명의말씀사, 1990), 423쪽).

그러나 복음적 예정론은 이와 전혀 다른 이해를 추구한다. 죄 된 인간은 '거역할 수 없는 은혜'가 아닌 '일반으로 베푸신 은혜' 앞에 나아간다. 하지만 그 일반으로 베푸신 은혜라고 하여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서 일어나는 은혜이니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그 은혜 아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어쩔 수 없는 응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발적이고도 적절한 응답'이다. 죄 된(타락한) 인간에게도 그런 정도의 자유의지3)는 가능하며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응답을 요구하신다.

부연하자면,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시는 데, 특정의 사람에게만 베푸는 '거역할 수 없는 은혜'가 아닌 차별 없이 모든 자에게 베푸는 '일반의 은혜'로 우리 가운데 허락하셨다. 누구든지 그러한 차별 없는 은혜 앞에 바른 응답(인간의 자발적인 선한 응답)으로 나아가기를 하나님이 친히 원하신다는 뜻이다.

성경을 보면 "회개하라", "믿으라", "나를 따르라", "구하라" 등등의 말씀(마 4:17, 6:33, 막 1:15, 6:12, 행 16:31, 요 1:13 등)이 등장한다. 이는 인간의 결단과 행동을 요구하시는 말씀이며 그 대상은 구원받기 이전의 죄인들이다. 인간에게 선한 자유의지가 있을 때만 가능한 이런 행동들을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걸 보면, 죄인일지라도 이러한 결단과 행동을 할 수 있기에 요구하시는 말씀인 것이 분명하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의 억지 응답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한 응답'을 기대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그러한 응답을 기뻐하신다.

복음적 예정론을 논하면서 칼뱅이 간과했던 인간의 자발적인 선한 응답(인간의 선한 자유의지의 선택)을 왜 이리도 소중히 다루려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 영역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때로부터 줄곧 부여하신 소중한 선물이기 때문이다.4) 그것을 주신 이유는 억지가 아닌, 자유로움 속에서 스스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우리가 어쩌지 못하여 하거나 억지로 응답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후 9:7, 갈 2:14, 몬 1:14, 벧전 5:2, 계 3:20).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7)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몬 1:14)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벧전 5:2)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여기서 자유의지, 즉 선택의 자유 권한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은 그 권한에 대한 책임 또한 우리에게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바른 선택(의의 역사)에 대해서는 복(신 28:1-19, 참조 창 1:28, 2:15)을, 잘못된 선택(악의 역사)에 대해서는 공의의 심판(신 28:20-46, 참조 창 2:17)을 일찍이 하나님께서 예고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죄 밖에 있던 자들이 아니다. 이방 사람들과 매한가지로 그들도 죄 아래 있던 자들임을 성경이 일러 주듯이(롬 3:9), 그들에게 바른 선택을 요구하셨다면 - 요구하셨다는 것은 요구대로의 응답이 가능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만큼 - 역시 죄 아래 있는 일반의 이방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 바른 선택을 이룰 최소한의 자유의지는 가진 것이라 볼 수 있다.

#3. 독생자 예수 통해 감동받으면 누구도 바른 응답 가능

하나님이 독생자를 통하여 보이신 사랑을 우리가 제대로 안다면(경험한다면), 여호수아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듯이(수 24:16-18),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자유의지가 바르게 작동하게 되어 바른 선택이 가능하다. 죄인들이 감격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보이신 역사는, 감동 아닌 것이 없고 복음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구원의 날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죄인들은 아들을 통해 보이신 아버지의 감동적인 사랑으로 인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발적인 응답(선한 자유의지)을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기대를 따라 아들을 믿고 영접함으로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된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이미 믿도록 예정되었기에 (선택의 여지없이) 믿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복음의 감동으로 인하여, 선한 자유의지가 발동하는 자발적인 응답으로 주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보다 먼저 구원받은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도록 말씀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빛 된 삶을 보고 불신자들이 감동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데 있는 것 아닌가(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우리가 먼저 경험하여 알듯 죄인 된 자들이라 하여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랑의 현장을 보면 감동하게 되어 있다. 특정된 자가 아니더라도 그에 적절하고도 자발적인 응답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선한 자유의지가 있음을 본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바이기도 하다.

#4. 선택받고 하나님 멀리하는 자도 있다

구원 대상으로 선택되었다거나, 그들 가운데서 복음을 듣는다고 해서 모든 자가 다 구원받는 건 아니다. 구원의 복음을 거절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저 유대인들처럼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도 없잖아 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하려 한다. 때로는 무지해서(엡 4:18), 배웠거나 가졌다고 해서, 주인이거나 부자라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멀리하려 한다(시 10:4, 사 1:2-4, 29:13, 마 15:7-8, 19:23). 이 모든 것이 어리석은 자의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시 14:1, 53:1)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 10:4)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7-8)

그들의 그러한 거절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듯이,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일 뿐이다. 요는 하나님께서 그리하도록 예정하신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선택의 여지 없는 그런 억지 응답이 아니다. 그것이 순종이든 거역이든 자유로움 속에서 스스로 선택한 결과로서의 응답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자발적인 인간의 응답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인간의 자기(단독) 결정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우리가 모르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이다(롬 8:26). 사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려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께서 참여하시는 일인데 어찌 우리만의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상황임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외면하려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5)

어쨌든 선택의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음에도 죄인 된(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기대를 따라 스스로 선택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칼뱅 주장과 달리, 성경이 계시하는 바는 앞전의 언급대로 아무리 죄인 된(타락한) 인간이라도 그 온전성 정도에서 차이는 있을지라도 '선한 자유의지적 응답'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러한 인간의 자발적인 선한 응답을 하나님은 오히려 강하게 요구하고 계신다.

물론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비하면, 우리 인간 역할(응답)은 지극히 미미하여 우리가 뭘 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정도다(롬 3:27, 4:2, 갈 6:14, 엡 2:8,9). 그런데도 하나님은 구원 과정에서 보여 주는 인간의 자유의지적 응답에 큰 의미를 부여해 주셨다. 하나님은 그 작은 우리의 역할(응답)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 되게 하셨다(마 25:21,23, 히11:6, 39,40, 12:2).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하지만 우리의 작은 응답(자유의지적 결단의 결과)마저 소중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전적인 은혜의 역사 아래서 하나님께서 그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신앙고백이 가능한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이 보여 주는 복음적 예정론을 통해서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적 예정론을 알게 되면, 우리는 앞서 언급한 것들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충만하고 인간의 겸손은 더욱 그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복음적 예정론6)을 살펴보려 한다.

#5. 구원에 관해 하나님이 예정하신 두 가지 축(軸)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대장정을 시작하시면서 당신의 절대주권과 풍성한 은혜를 따라 다음의 두 가지를 예정(豫定)해 놓으셨다.

첫째, 하나님은 '구원의 때'를 예정해 놓으셨다. 그리고 그 구원의 때에 속한 모든 자를 '구원의 대상으로 선택'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그 구원 대상자 중에서 누구라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기로 예정하셨다.

먼저, 하나님은 '그 구원의 때'를 예정(豫定)하시고 그때가 이르면 메시아를 보내기로 작정하셨다(렘 23:5-8, 말 4:1-6, 막 1:15, 갈 4:4-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하시니라." (렘 23:5-8)

그리고 이 구원의 때에 속한 모든 자를 '구원의 대상으로 선택'하셨다. 여기에는 어떤 차별도 없다. 이 구원의 때(신약의 세대)에 속한 자이기만 하면 누구라도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는 '차별 없는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신다. 그리고는 날마다 그들을 부르신다.

이제 구원의 때에 속한 신약의 세대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죄인과 의인, 할례파나 무할례파, 지식인과 야만인, 종이나 주인을 더 이상 차별하지 아니한다. 누구라도 '구원의 대상'이 된다 함이다(롬 3:22, 10:12, 골 3:11 등).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롬 10:12)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 3:11)

태초부터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은 죄 된 세상에 속한 자들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구원하려 함에 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마 1:21, 요 3:17;12:47, 행 15:11, 16:31, 롬 10:9, 갈 4:4,5, 살전 5:9, 딤전 1:15,딤후 1:9, 딤후 3:15 등등).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1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은 칼뱅식 운명론적 예정론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영생 얻을 자와 영멸할 자를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의 때'를 예정하시고 그 구원의 때에 속한 모든 자를 '구원의 대상으로 선택'하신 일이다.

#6. 하나님은 구원 계획을 언제 세웠나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구원 계획을 언제 세우신 걸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들려준 다음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 시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4-5)

우리는 지난 세월, 선택과 유기(버림)로 표상되는 칼뱅의 이중예정론으로 말미암아 위 성구가 얼마나 무서운 말씀으로 둔갑했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칼뱅은 영원한 선택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창세전의)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장 칼뱅의 앞의 책 중권, 499쪽).

하지만 이 말씀(엡 1:4-5)은 무섭거나 두려운, 결코 부정적인 차원의 말씀이 아니다. 예수 복음의 시각에서 보면 복음적 예정 교리에 딱 맞는 말씀이다.

#7.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전부터 알고 계셨다

이 나라 대통령은 나를 알지도 못하고 때로는 실망케 할 때가 많은데, 하나님은 나(우리)를 아신다. 아시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도 창세전부터 나(우리)를 향한 구원 계획을 세우셨다. 그리고 그때 이미 나(우리)를 '구원의 대상으로 선택'하셨고, 선택한 자들을 부르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려고 친히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의 고난까지라도 감내하셨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0)

바울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이 조성하시기 전, 아니 우리의 존재 자체가 있기 전부터 나(우리)를 택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행위를 보고 판단하지 않으시고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여 은혜 가운데 예정하셨음을 뜻한다(엡 1:6).

만일 우리의 '행위'나 '가치'를 보고 우리를 선택하려 하셨다면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시 14:1-3;53:1-3, 롬 3:9). 이러한 관점엔 칼뱅도 동의하는 부분이다(칼뱅의 앞의 책 중권, 508쪽). 따라서 창세전에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위의 말씀(엡 1:4,5)은 논쟁거리가 될 수 없는 지극히 복음적인 말씀이다.

#8. '창세전 선택'은 '선재(先在)하신 그리스도'론에서 비롯

예정론의 주요 근거로 제시하는 다음 성구들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4-5)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 1:9)

이 성구에서 바울이 고백하는 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선택하셨다는 선언은 어떤 근거에서 나온 고백일까. 바울의 이러한 신앙고백 근거는 다름 아닌 선재하신 그리스도론에서 찾은 것임이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론(先在論, preexistence)은 초대교회 기독론의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이슈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 사상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우리 시대의 구원 예정이 창세전부터 이미 작정된 일임을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성취를 위한 것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를 향한 구원 예정의 출발선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임재하신 후가 아니라 선재하여 계신 창세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됨은 당연한 일이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복음적 예정의 첫째는 어떤 이의 주장처럼 창세전에 영생할 자와 영멸할 자를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의 때'를 예정하셨고 그 구원의 때에 속한 모든 자를 구원의 대상으로 선택하셨음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그 구원의 때'를 정하심으로 그 때를 분기점으로 하여 구원의 때에 속한 자들(신약의 세대)은 '구원의 대상으로 선택'된 반면, 그 이전의 세대(구약의 세대)는 '자동으로 유기'되고 만다.7)

이처럼 구원의 때에 구원의 대상으로 선택한 모든 자에게 하나님은 차별 없는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신다(구원의 예정 두 번째는 다음 편에 계속).

김수원 / 태봉교회 담임목사

각주

1) 혹자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논하면서, 영생과 영멸을 예정할 수 있을 정도의 권한은 가져야 절대주권이라 말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철학적 변증일 수는 있어도 성경 속 하나님의 절대주권과는 상관없는 비복음적인 논술이다. 복음적 예정론의 시각에서 평가하자면, 칼뱅이 '이중예정론'에서 주장하는 선택과 유기의 신적 절대주권(절대 권한)은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난 힘의 남용이다. 성경(신약)에서 계시하는 하나님은 힘을 남용하는 분이 아니시다.

2) 필자는 본 글에서 때로 'Irresistible Grace'를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번역하지만, 상황에 맞게 '거역할 수 없는 은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은혜' 등으로도 번역했다.

3) 자유의지는 '선택의 자유 권한'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권한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러한 자유 권한을 남용하지 아니하고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사용(선택)하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자유 권한이 죄 아래 있다고 해서 부패하여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죄의 권세하에서 드러내지 못하고 숨겨져 있거나 가려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떤 적절한 상황(예수 그리스도)이 도래하면 얼마든지 회복이 가능한 의지로 본다. 이는 예정된 자만이 아닌 누구라도 복음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적절히 응답할 수 있음을 말한다.

4) 죄 된(타락한) 인간인 경우, 자유 권한을 어느 정도 재량껏 사용할 수 있을까. 타락하기 이전 모습대로 온전히 자유 권한을 사용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죄 된 사람은 자유의지를 100% 자유자재로 발휘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 부패해서라기보다는 막강한 죄의 권세 아래서 짓눌려서 우리의 자유 권한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연고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주님 안에 거하고 주의 권능을 힘입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구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요 8:31,32, 갈 5:1, 골 1:13).

5) 주의 성령께서 도우시지만, 선택의 자유 권한(자유의지)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들에게 돌아간다.

6) 복음적 예정론은 그 논의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예정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이유와 사역을 배제한 채로 거론하는 예정론은 별반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 해서 예외이지 않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견고히 함에도 복음적 예정론은 유익하다. 여기서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예정하셨는지, 그 예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논하게 될 것이다.

7) '구원의 때'에 속한 신약의 세대는 구원의 대상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시지만, 그 이전의 사람들(구약의 세대)은 구원의 때를 비껴감으로 자동으로 유기되고 만다. 이때 유기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결과가 아니라 구원의 때를 정하신 결과로 나타난 일이다. 따라서 유기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지 않다. 하나님은, 스스로 범죄 하여 영원한 멸망 가운데 처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구원의 때를 정하여 찾아오신 선한 일 외에 달리 책임지실 만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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