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경제학 강의> / 벤 위더링턴 3세 / 김미연 옮김 / 넥서스CROSS 펴냄 / 292쪽 / 1만 2,500원
통증

기독교 전래 이후로, 한국 개신교 제일의 모토는 부흥입니다. 한국교회는 태생적으로 변화보다 부흥을 원했습니다. 변화는 부흥의 도구로 기능이 가능할 때 거론되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부흥이란 (경제)성장의 다른 표현입니다. 외적 성장이 목회자의 연말정산이고, 업적이요 위상으로 평가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혁신보다는 성장을 주창하는 세속 정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한국교회 속살입니다.

개혁보다는 안정입니다! 밖에서는 반성경적이라던 사람들도 막상 교회에 들어서면 같은 태도를 보입니다. 그럴 수 만은 없다고 외치던 이들조차 아침이 오면 아무 일 없었듯 복귀를 서두르고, 주일에는 가장 편한 교회로 향합니다.

세상은 변화를 원하는데 교회는 여전히 부흥으로 포장된 성장을 외칩니다. 이 불편함에 익숙해지는 것이 두렵고 또 불안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내 존재가 그러했고 우리들의 목회가 그러해 보였습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물음에 대한 답이 고갈될 즈음, 한 권의 책이 도착했습니다.

욕망의 종교화

왜 하필 지금 돈에 대한 책일까? 제목이 참 방자(?)하지만, 작금의 세계적인 추세의 경제적 혼란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돈 개념을 새롭게 정리해 볼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이 신선합니다. 기독교적 경제관에 대한 고지론, 청부론과 같은 작위적 해석들이 난무하는 동안 해소되지 않는 관점들을 보완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개인의 고백이자 우리의 현실감일 것입니다. 이 나라가 광란의 시대를 넘어설 무렵. 한국 사회에서 사활을 건 평등과 분배를 향한 외침이 과연 어떤 결과로 나타났는지, 교회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진리를 원하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고 복음을 위해 죽겠다지만 실제 삶은 반대 입장에 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약자들의 신음을 경박한 기복으로, 위험에 처한 이들의 절망을 내세의 소망으로 위조하며 덩치를 키웠던 지난 역사는 오늘의 개혁교회에서 얼마나 개진되었을까. 희생과 헌신은 아직도 교우들 몫이고 안정과 보장이 목회자의 지분은 아닐는지.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이 달갑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이제 더 적은 돈을 가지고 사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지금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돈이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며, 부와 물질에 관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가르침을 새로이 살펴보아야 할 적기인지도 모릅니다.

사실상 우리의 소비 습관은 상당히 비기독교적입니다. 또한 성공과 부를 얻을 권리, 부자들과 유명인들의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믿음에 길들여진 점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번성'은 오락과 여가를 근사해 보이게 만들었고 사치를 매력적으로 여기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점차 유행과 패션, 금융거래에 노출됨에 따라 건전하고 유익한 가치, 거룩한 것들을 놓아 버렸습니다.

수많은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시각은, 대부분 성경이 아니라 문화적 요소와 그 영향력에 의해 결정되고 있습니다. 신학은 가볍게, 죄책감을 피하되 물질 증대는 강조하고 희생은 희석되는 종교성의 만연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럼에도 일부는 돈과 같은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영적인 해답, 하나님과 성경의 가르침을 알고 싶어 합니다.

성경적 재정 지침

저자는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다시 보도록 안내합니다. 대부분의 현대 그리스도인은 이미 국제적 기준으로나 역사적 기준으로나 부를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충분히 부유하다는 입장입니다. 문제는 더 많이, 더 성공적으로, 더 안정된 현실의 보장을 선동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위치가 어디인지 호도되고 있을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이 지점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건전한 노동으로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내 것'이라는 생각은 성경적 관점에서 매우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소유권이 있다는 믿음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됩니다. 이런 믿음에 기초해 토지를 사들이고, 십일조를 복을 부르는 수단으로, 나아가 부를 숭상하게 하고, 부의 축적을 정당화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약의 '창세기', '잠언', '전도서'를 오독한 내용을 재확인하는 저자의 작업은 좋아하는 구절만 뽑아서 읽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가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를테면, 잠언에 등장하는 "게으른 자"는 늦잠꾸러기나 우둔하고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도덕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지혜자"는 신앙(혹은 종교적 의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매일의 삶을 어떻게 열심히 일하고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할 뿐입니다.

저자는 전도서가 성실한 삶과 참된 믿음이 언제나 부요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지적합니다. 전도서는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개인주의를 경계합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사용해 종종 등장하는 다양한 모순의 문제들을 공평하게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신약에 오면 그리스도인을 위한 도덕적 행위 기준이 달라집니다. 어떤 면에서는 구약의 언약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부와 가난, 재물과 돈 문제에 대한 관점은 예수의 종말론적 가르침을 좇아 변화되었습니다.

저자는 '시대착오'라는 용어를 꺼내듭니다. 현대와 성경 시대를 혼용해 본문을 왜곡하거나 오역한다는 지적입니다. 이는 예수님 시대와 이 시대의 돈 역할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에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농경시대였던 예수님 당시 경제적 상황과 세금을 살펴야 합니다. 물론 시장 자본주의도 아니었으며, 로마제국 화폐는 황제를 선전하는 종교적으로 더 유용한 도구였지 경제 도구는 아니였습니다. 누구에게 재물이 있든지, 부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 여겼던 시절은 지나가 버렸습니다.

4장에 이르면 저자의 관점이 고조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부자들과 유명인들의 삶을 정당화하려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용해 온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아이러니라는 주장입니다. 복음서 구절들은 토막이 나서 물질의 축복을 가져다주는 주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화폐 사용 목적과 새겨진 얼굴을 고려한다면 예수님은 간결하게 대답하신 것이 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이 땅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부의 관료도, 혁명론자도 아니셨습니다. 역사 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 새로운 법을 말씀하십니다.

저자는 맘몬(돈)을 의인화하신 예수님을 통해 맘몬이야말로 우리가 섬기는 주인, 그러나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면 버려야 하는 주인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돈이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하셨을까? 예수님은 돈을 기피하거나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예수께서 제자들이 그런 것에 집중하거나 의지하여 살지 않기를 원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부를 기도하여 더 많이 도울 것을 구하라 하지도 않으셨음을 분명히 합니다. '가난한 자들 가운데 계신 예수님'에 방점을 찍습니다.

확증

돈에 관한 제자들의 교훈이 풍성한 점도 이 책이 주는 유익입니다. '야고보의 풍성한 지혜'로 명명했듯이 저자는 야고보서 2장과 5장을 살피며 윤리적 문제에 접근하는 예수님처럼 전통에 역행하는 지혜에 무게를 둡니다.

"차별하는 사회 속에서 차별하지 않기", "지옥을 향해 가는 부자들"과 같은 야고보의 설교가 부자 나라에서 선포되는 장면을 상상하기란 힘들 겁니다. 저자 역시 교회에 부유한 성도가 없더라도, 번영신학을 따르지 않더라도 이런 설교를 하기란 쉽지 않을 거라고 전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번영신학 설교자들은 야고보와 정반대로 부자와 풍요를 미화합니다.

성도를 차별하고 부유한 자들에 아첨하는 것. 그렇지 않으면 부유한 자들의 성공을 미화하여, 부가 어떻게 한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도록 만드는지, 어떻게 우리를 영원한 파멸로 이끄는지 성경의 권고를 외면하는 것. 이 모든 것이 풍족한 세상에 있는 현대 교회의 본질이라는 저자의 말은 이제 야고보의 외침이 됩니다. 야고보는 가난을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전반적인 공평과 정당함이었습니다. 바울도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가장 많이 인용하지만 그만큼 중한 오해도 합니다. 저자는, 바울이 장막을 만들어 생활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오늘날 '자비량 선교'를 말하지만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놓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저자는 바울이 후원자와의 관계에 얽히지만 않는다면 후원금 받는 것에 매우 호의적이었음을 상기시킵니다. 당시 바울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일반화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후원이나 상호주의 같은 당시 복잡한 상황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목회자 사역이나 보수에 대한 바울의 주장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힘듭니다.

바울이 말하는 노동, 보수, 그리고 탐욕은 남의 짐을 대신 지고 자신을 내어 주는 삶의 패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낙심치 말고 선을 행하라는 차원이 소득과 보상, 대가에 상응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저자의 묵상은 숭고합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잠시 책을 덮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인쇄되어진 활자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바울은 이득을 얻으려고 신앙을 이용하는 행위에 대해 거듭 경고하였습니다. 그것은 거짓 선생들의 특색이며, 그들을 판가름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는 다양한 본문들의 해석도 눈에 띕니다. 성경적 물질관을 찾기로 작정한 듯, 돈에 관한 성경 내용들과 그것을 읽어 가는 저자의 통찰이 잘 어우러집니다. 가령 디모데전서 6장 6절에서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강조하는 '자족'이 큰 이익이 된다는 원칙을 인용해 탐욕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이때 바울이 퀴닉학파와 스토아학파 핵심 개념인 '아우타르케이아스(autarkeias)'까지 사용했음을 밝힙니다. 이는 독립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이상적인 삶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울의 삶은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삶이지 스스로 채우는 삶이 아니었기에 '만족'이라는 번역이 더 적합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바울이 책망하고 있다며, 자기 자제력을 잃은 사람들, 필요를 채우려고 돈과 이윤이라는 해결책에 중독된 사람들을 주의할 것을 놓치지 않습니다.

8장 '밧모섬의 요한, 상인들과 미스터 666을 위한 뉴스 속보'에서는 그리스도인, 특히 북미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를 거론합니다. 교회와 국가, 신앙과 일, 마음과 행동을 별개로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이런 경향으로 신앙과 삶이 하나 되지 못하고, 물질과 부에 대한 그릇된 태도가 빚어낸 영적 결과들을 인식조차 못하는 죄를 범하며 살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심지어 재산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와 재물이 영성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성경의 거듭된 경고에도 우리는 여전히 물질적인 성공을 우선으로 추구하고 자기 계발 세미나를 쫓아다니며, 무분별한 소비를 일삼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를 둘러싼 문화는 물질과 영성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재산을 자기 것이라 믿는 것처럼 도덕 또한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탐욕이나 물질의 추구와 같은 죄의 근원을 언제나 개인적인 영역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개인의 불균형이나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면 어떨까.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이 우리가 몸을 담고 있는 이 문화, 그리고 그 문화를 결정짓는 경제적, 정치적 구조라면 어떨까." (206쪽)

8장에 담긴 요한의 책망은 개개인뿐 아니라 '사회'라는 총체적 집합체로 향합니다.

해갈

연말입니다. 정산할 재산이 없는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괜히 바빠지는 12월과 설레이나 부담스러운 1월을 앞두고, 재물에 관한 성경적 지침을 명쾌하게 제시하는 책을 만난 것이 제게는 복입니다. 단순한 문제 제기를 책으로 읽어 간다는 사실이 진부해질 무렵, 조각조각 몇 개의 단면을 보는 듯한 제안들에 지루해진 시점에, 탄탄하고 구체적인 성경적 경제 서적과 만났습니다.

책을 읽으며 "가난하나 영적으로 부한 사람", "부하나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두 유형이 떠오릅니다. 어떤 유명한 목사님도 설마 그런 의미로 말씀하셨을까 싶지만, 우리는 "부하며 영적으로도 부한 사람"이 가능하다고 믿으려 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가능할까요? 예,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공룡이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

예수님 살아생전 사랑받았던 제자 요한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선지자입니다. 요한의 교회를 향한 선포 속에서 구별된 선지자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음녀와 그녀의 옷'이라는 표상으로 교회와 세상, 종교와 경제, 종교와 정치의 악하고 추한 결탁을 책망합니다. 그의 권고는 단지 물질주의나 탐욕을 버리라는 의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일을 하되 기독교 윤리를 일에 적용했을 때 일어난 변화에 직면하라."

저자가 바라본 복잡한 사회, 정치, 문화 구조의 문제는 현대 그리스도인이 처한 도덕적 책임과 영적 위협의 극명함을 반증합니다. 당신의 짐을 내가 지겠다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서 쏟아져 나올 수 없는 한국교회의 변함없는 목표, 부흥. 그러나 변화가 수단이 될 때, 부흥은 언제나 '과시'에 그칠 것입니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이성호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포항을사랑하는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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