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건물이 아닌 성도의 연합과 교통, 그 자체다. 그런 교회는 늘 미래를 고민한다.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말씀대로 살면 된다고 말할지 모른다. 정작 교회는 모호한 이 말에 동의하면서, 다시 묻는다. '말씀대로 산다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인가'하고 말이다.  

'공허한 질문과 구체적 대답' 논쟁을 앞에 둔 교회가 보여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 이러한 담론을 함께 생각해 보는 자리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열린말씀연대가 진행한 열린 말씀 컨퍼런스 '배움의 공동체로 부르심'이다. 지난 2일부터 4일까지 필라델피아에 있는 기쁨의교회, 챌트햄장로교회, 임마누엘교회에서 진행했다.

이번 컨퍼런스는 특별히 리더십 포럼을 함께 준비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목회자들과 함께 '변화 지향적 리더십을 향하여'를 중심으로 여러 주제를 논의했다. <미주뉴스앤조이>는 이번 목회자 포럼에서 진행한 논의들을 매일 하나씩 자세히 전달한다. 한규삼 목사(뉴저지 초대교회)의 기조강연 '교회의 시대적 현실을 진단한다'를 첫 주제로 시작해, 설교와 제자 훈련, 다음 세대, 선교 논의를 이어간다.

두 번째 주제는 제자 훈련이었다. 콜로라도 뉴라이프선교교회 정대성 목사가 발제자로 나섰다. 기사 최하단에 발제 영상을 첨부했다. - 기자 말

제자 훈련을 받은 사람이나 아닌 사람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통계가 나왔다. 제자 훈련은 무엇이고, 제자도는 무엇이며, 교회에서 제자도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깊이 돌아보아야 할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실제 제자 훈련은 교회 성장의 전략적 총아가 되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제자도가 추구하는 성경적 의미를 전수하기보다 교회를 키우는 데 더 초점이 맞춰졌다는 의미다.

제자 훈련을 강조하는 사랑의교회가 롤모델로 삼은 교회가 있다. 릭 워렌 목사가 담임하는 새들백교회다. 새들백교회는 '15%의 헌신된 사람이 교회 전체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제자훈련 목표로 삼는다. 이는 사랑의교회에도 반영되어 있다. 사랑의교회 제자 훈련을 전파하기 위해 열리는 칼 세미나에서 한 목회자가 "우리 교회는 교인 30%가 제자 훈련을 마쳤다"고 해서 각광을 받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교인은 85%, 70%는 제자 훈련 받지 않아도 괜찮은 것인가.

제자 훈련은 교회 안에서 또 하나의 엘리트 의식을 키우는 훈장이 되었다.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존재 문제를 다루는 제자도를 고민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저 방법론에 휩쓸려 간다. 실제 말씀 묵상도 방법론만 강조되어 힘을 잃어 간다. 제자 훈련이 신앙생활의 역할은 가르쳐 주지만, 실존적 이해가 너무 결여되어 문제다. 일그러진 제자도가 되지 않았나 진단한다. 과연 목회자가 먼저 제자도의 의미를 파악했는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대성 목사는 제자 훈련이 강조되는 교회는 많지만, 정작 교인의 삶은 변하지 않는 현실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시대에 잘못 편승한 성장 중심의 교회론에서 원인을 찾았다.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doing? being!

그러면 참된 제자도란 무엇일까. 너무 방대한 주제라 책을 한 권 소개한다. 존 스토트 목사가 소천하기 전 저술한 <제자도>라는 책이다. 방대한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진행하려고 한다.

존 스토트 목사는 '성도는 이 세상에 저항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세상의 가치를 거스르는 사람을 의미한다. 세상과 발을 맞추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앙적, 신학적 성숙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창조 세계를 돌봐야 한다고도 강조한다. 제자란 이 세상을 향하여 청지기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전 피조 세계를 향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세상과 동떨어져 분리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더 깊숙이 침투하는 제자도가 요구된다.

다음으로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균형 잡힌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의존과 관련이 있다. 제자도는 하나님께만 의지한다는 말이 공동체에 의지한다는 진짜 뜻을 배워 간다. 성숙해 간다는 것은 이웃에게도 의존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존재할 수 없고, 살 수 없다고 고백한다. 제자는 독립적 존재가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 더 크게 의존한다는 것은 이웃에게 내어 주고 의존하는 삶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스토트 목사는 죽음과 관련한 내용을 강조한다. 이 부분을 보며, 평소 알고 지낸 한 은퇴 목사의 비참한 말로가 생각났다. 가족과의 관계가 망가지고, 결국 홀로 죽음을 맞았다. 젊어서 똑똑하고, 치열한 목회를 했다. 스스로 생각한 마지막 호흡이 이렇지는 않았을 테다. 제자도는 우리가 살아서 무엇을 하는가에 집중할 것이 아니다. 죽을 날을 생각하며 준비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제자도, 제자 훈련과 공동체의 관계

조직된 교회가 참된 제자도를 전수하고, 참된 지도자를 양육할 수 있을까. 변질된 제자도가 넘치는데, 궁극적으로 우리가 속한 교회에서 과연 제자도가 실천될 수 있는가.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인생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 제자도의 도리다. 이러한 도리가 우리가 몸담은 교회에서 어떻게 가능할까. 한국교회(특히 개혁 교회)가 구조적 교회 논의를 새롭게 이뤄 가지 않고는 제자도나 설교가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 드는 탓이다.

삼권분립, 3심 재판 제도 등의 모델이 교회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런데 과연 현재 교회는 사회 시스템 안에서 제자도를 이루고 개혁적 모델을 보이고 있는가. 아닌 것 같다. 결국, 먼저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 참된 제자도가 실천될 수 있는 공간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

제자도가 펼쳐질 수 있는 장을 새롭게 짜지 않고, 제자도를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한다. 장로 몇 명으로 이뤄진 당회가 교인 모두를 치리하는 구조에서 세상을 변화하는 제자도가 가능하겠는가. 제자도를 추구하려는 교회 지도자와 목사가 다른 사람과 쉽게 비교되는 사회에서 정말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을까. 그리고 교회를 통해 자기 생활을 영위하는 구조에서 과연 목사가 온전한 제자도를 실천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힘든 것 초기 투자, 개척 자본 때문이다. 개인적인 의견을 이야기하자면, 이 자본 탓에 한국교회가 건강하지 못하다. 초기 투자를 주로 목사가 한다. 2억 원, 4억 원으로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라. 목사가 돈으로 세워 둔 교회에 교인이 온다. 세습 문제도 이것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이런 모델 속에서 어떻게 제자도가 가능하겠는가. 교회 성장, 교회 모델과 구조, 틀을 다루지 않고 어떻게 제자도를 논의할까.

제자 훈련, 근본적 성찰 필요

하나님나라 초기 논의는 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러다가 개인 영성으로 논의가 발전해서 교회 공동체에 두는 관심이 약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나라 이해가 새롭게 제시되고 있는데, 교회가 이를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처음 논의로 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근본적 논의를 거치지 않고, 제자도를 교육한다는 게 가능한가 고민해야 한다.

제자로 사는가 고민하는 질문은 하나님이 준다. '너는 정말 행복하니', '너 정말 자유롭고 보람이 있니', '네가 어디에 있든지 동일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준비가 되어 있니'라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세상 가치를 부정하면서도 부러워하는 존재다. 목회자가 우선 그럴진대, 세상 가치를 부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제자도를 가르칠 수 있을까. 가장 근본적인 부분부터 성찰하고 물어야 할 때다.

발제를 마치고 목회 현장에서 고민하는 제자 훈련과 교회에 관한 이야기가 활발하게 이어졌다.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ㄱ 목사: 목회자라면 대부분 교인이 변화하기를 바라는데, 이를 위한 목회에서 설교만으로는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게 제자 훈련이 아닌가 생각한다. 시작은 그러했지만, 지금은 그저 교회를 운영하기 위한 도구로 바뀐 것 같다. 교회의 의식적 변화가 없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럼 대형 교회의 제자 훈련이 문제가 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대성 목사: 대형 교회는 구체적으로 교회론적으로 문제다. 우선 목회자가 제대로 살아가는지 누군가에게 점검받기 어렵다. 현대 교회 안에서 이러한 점검은 대립으로 발전하기 십상이다. 우리 교회도 목사를 점검하는 시스템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앞서 말한 본질적인 교회 문제를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제자 훈련과 설교를 비교했는데, 나는 이렇게 본다. 30년 목회하면서, 주일 설교 한 번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설교 한 번이면 되지 않는가. 설교는 사람을 바꾸려는 데 목표가 있지 않다. 목회 초기에는 사람의 변화에 목적을 두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게 하자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변화는 하나님이 하신다. 그래서 점점 더 하나님이 기대된다. 교회로부터 교인이 더 많이 여유로워야 한다.

유니폼 문화에서 자랐다. 교복, 군복을 입으며 잘랐다. 이러한 문화가 한국교회 문화에 엄청난 잘못을 했다고 본다. 획일적 문화와 방법론이 중요해진 것이다. 교회가 조금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사실 목사도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 교회는 매년 가을 음악회를 여는데, 목사가 온 사람보다 안 온 사람만 생각한다. 나중에 이러한 사람만 생각하며, 괘씸하다 여기게 되는 걸 보고 반성했다.

전 교인이 꼭 동원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조금 늦게 알았다. 교인이 관심 있는 분야에 동참하면 된다. 하지 않을 수도 있고 말이다. 아이들도 자라는 방법이 다 다른데, 한 가지 방법만을 정답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요새는 특징 없는 교회가 되면 어떨까 생각한다.

앞으로 밥상 공동체가 '혼밥 세대'에서도 이뤄질 수 있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ㄴ 목사: 현실적으로 경험한 부분을 이야기하자면, 교회에 자주 나올 필요 없고, 생활 속에서 하면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너무 떨어져서 외롭다. 힘든 모습도 많다. 혼자 밥 먹기 힘든 사람도 힘들다.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이 교회에 너무나 많다. 그 사람들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하는 건 아닌가. 같이 밥해 먹고 그런 것이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이 부분을 해야 할까.

정대성 목사: 옳은 말이다. 교회 공동체가 유기적인 교제를 제공하는 구심점을 제공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누구 중심으로 진행하는지 잘 살펴야 한다. 구심점이 목사를 중심으로 이뤄지는가. 아니면 교인들 간의 상호 교제가 이뤄지는가. 나(목사)는 모든 교인과 다 친해질 필요가 없다. 대신에 교인들은 교회의 속한 다른 지체와 친해지면 된다.

간단히 우리 교회 예를 들겠다. 우리 교회는 매 주일 철저하게 밥을 먹는다. 하지만 부엌 시설도 없고, 모든 교인이 한 번에 모여 먹을 식당도 없다. 그래도 함께 먹을 수 있다. 그렇게 13년 동안 열심히 먹었다. 방법은 간단하다. 주일 오후에 소그룹별로 나뉘어서 식사한다. 소그룹별로 방을 정해 주었다.

별 뜻 없이 시작했는데, 매주 밥을 먹는 것을 통해 유기적 친분이 상상 이상으로 커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이구나 싶다. 공동체적 유기성을 유지하면서 서로가 너무 친해진다. 목사 없어도 가능하다. 소그룹이 매주 만나는 건 대단한 일이다. 가족도 일 년에 한 번 보기 쉽지 않은 시대다. 목사는 앞으로 그러한 교제가 교인 사이에서 자유롭게 일어나게 풀어 주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우리 현실은 여기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다. 담임목사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람을 통제할까'를 생각한다. 통제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야 한다. 그럼 의도하지 않아도 공동체는 관계를 필요로 하기에 유기적으로 교제가 일어난다. 소그룹 리더가 돌보는 시스템이 있다. 교인들이 더 잘할 수 있다. 목사가 교인의 삶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제자도, 교회론 논의부터 시작해야

결국 제자도를 이야기하려면 공동체가 필수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세상과 다른 공동체가 되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오랜 세월 한국교회가 존재했는데, 지금 우리가 따라가야 할 공동체가 보이는지 묻고 싶다. 사랑의교회가 제자 훈련으로 성장했다고 하지만, 제자 공동체인지는 의문이다. 한국 목사들이 여기저기서 제자 훈련을 받았는데, 그들이 가르친 교회는 제자 공동체인지 모르겠다.

우리 열린말씀연대도 10년이 지났는데, 우리 안에서 누가 이러한 공동체를 하고 있나 물어야 할 때다. 우리 세대가 경험한, 십수 년 전의 공동체와 지금의 공동체는 확연히 다르다. 서로 즐거워하는 분위기가 사라져 간다. 공동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활기가 사라져 간다.

젊은 세대는 목회자와 공동체를 보며 다른 가치를 생각한다. 공동체, 제자도, 다음 세대를 모두 고민해야 한다. 앞으로 밥상 공동체가 '혼밥 세대'에서도 이뤄질 수 있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유영 / <미주뉴스앤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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