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김덕수 교수(실천신학)가 11월 17일 신대원 기도회에서 '함정'(에스더 7장)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허락을 받아 전문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시골에 가면 음식을 차려 주는 대로 다 먹는 게 예의다. 심방 가면 많이 차려 줘도 남김없이 다 먹어야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목사들에게 성인병이 많다.

그러나 나라마다 예법이 다르다. 목사님들이 어떤 가난한 나라에 단기 선교 가서 차려 준 것을 배불러도 다 먹고 나서 차려 준 사람들이 좋아하겠지 하며 뿌듯한 마음으로 나오는데, 가족들이 원망스런 눈빛으로 쳐다봤다. 왜 그런가 물어봤더니, 통역의 말이 "이 나라는 조금만 먹고 남겨서 내보내야 그것을 가족들과 아이들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낭패였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뭘 드시라고 주면 덥석 받아먹으면 안 되고 사양하는 것이 미덕이다. "아녜요. 괜찮아요." 그럼 다시 권해야 한다. 또 "괜찮습니다" 해야 한다. 그때 정말 싫은가 보다 하고 거둬들이면 상대가 당황한다. 내가 그랬다. 그걸 몰랐다. 우리 한국인은 삼세번 권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것은 우리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본문 1-2절을 함께 보자.

"왕이 하만과 함께 또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가니라 왕이 이 둘째 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에 7:1-2)

에스더서에 반복되는 잔치 자리였다. 에스더서에는 적어도 9번의 잔치가 벌어진다. 이 잔치는 그중 7번째 잔치요, 에스더가 왕후가 되어 연 두 번째 잔치다. 아하수에로 왕은 와인을 마시며 기분이 좋아지자 사랑스러운 에스더에게 은혜를 베풀고 싶어졌다. 에스더 5장 3절과 5장 6절에서 이미 왕은 에스더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며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호기를 부렸었다. 그런데 본문 7장 2절에서 세 번째로 다시 네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아직도 그 제안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권력자는 항상 아랫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너그러운지 과시하고 싶어 한다. 왕의 자존심도 있는데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소원을 말해 봐" 한 것도, 에스더가 계속 그렇게 예뻐 보이고 무슨 일을 해서라도 그녀를 기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였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에스더는 어떻게 했는지 3-4절을 보자.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라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하니" (에 7:3-4)

에스더가 훌륭한 이유는 동족이 어떻게 되든 나만 살겠다고 매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들이 얼마나 힘들든지 나만 특별 대접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악당 하만을 처벌해 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소청은 내 목숨을 살려 달라는 것이고, 그녀의 요구는 내 동족을 살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그녀는 자신의 목숨과 동족의 목숨을 동일시한다. 4절에서는 '우리'라고, 분명하게 한 운명 공동체로 말한다.

오늘날 교회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한다. 한 운명 공동체. 여기에는 나와 내 민족과 나라가 어떻게 되든 내 명예를 지키고 나는 살아야겠다는 개인주의는 없다. 수백 명이 죽어 가는데 혼자 어디서 잘 지내고, 수천만 국민의 속이 타고 분노하는데 자기만 상처받았다며 여자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됐다는 분과 본문의 인물인 왕후 에스더는 참 많이 다르다.

이 부분에서는 4장 13절에서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편지를 보내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했을 당시의 우유부단함과 자기중심적 자기 보호 본능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그 자리를 용기와 희생정신이 가득 채운 모습만 보인다.

하나님이 에스더를 변화시켰다. 이제 아하수에로 왕을 다루실 차례다.

에스더는 그 위기를 하만이 3장 9절에서 유대인들 진멸 조서를 내려 주면 내가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금고에 넣어 드릴테니 그걸로 처리하자던 것을 빗대어, 4절에서 나와 내 민족이 돈에 '팔렸다'고 한다. 그 결과 내 동족이 파멸과 도살과 멸절을 당하게 되었다며 점점 강도 높은 세 단어를 연거푸 써 가며 위기를 강조하면서 도움을 청한다. 4장 16절에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심했던 것을 에스더는 이제 실행으로 옮긴 것이다. 일사각오로 또한 자신이 당신들이 무시하는 그 유대인임도 밝혔다. 이처럼 내가 죽기로 각오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그런데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그것은 4장 16절처럼 사흘 밤낮을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겠다는 행동의 결단이고, 5장 1절처럼 왕후의 예복을 입고 어전 맞은편에 서는 행동이다. 이게 믿음이다. 이게 행동하는 믿음이다. "가만히 있으라", "기도만 하라"가 좋은 믿음의 모본이 아니다. 그런 믿음의 행동이 있을 때, 그 일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왕이 본즉 그 자태가 너무 사랑스러워 금 규를 내밀어 에스더는 죽지 않고 왕께 나아가게 되었다. 그건 하나님의 섭리다. 그리고 에스더는 대놓고 하만을 고발하며 죽여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왕이 5장 3절처럼 소원을 말하라고, 나라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했을 때 제가 왕을 위해 파티를 열 테니 하만과 함께 참석해 달라고만 했었다. 매우 신중하고 지혜롭다. 그 잔치를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에 걸쳐 열며, 기회를 기다리는 용의주도함과 신중함이 있었다. 그리고 6장의 사건들이 이어지고 오늘 7장의 이 상황에 도달했을 때, 왕이 분명한 기회를 주자 자연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청한다. 이런 게 바로 행동하는 믿음이다.

여자 한 사람이 나라를 망칠 수도 있고, 여자 한 사람이 민족을 구하기도 한다. 

자기가 살겠다는 여자는 자기도 죽고 나라도 죽이지만, 민족을 위해 자기 목숨은 거는 여자는 자기도 살고 나라와 민족도 살린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

목숨을 건 사람이 생명을 얻는다

그리고 목숨을 건 사람이 세상을 살린다.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법이다.

에스더의 목숨을 건 청원에 왕은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지 5-6절을 보자.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말하여 이르되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에스더가 이르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거늘" (에 7:5-6)

사랑하는 왕비가 목숨을 살려 달라는 호소, 그 은혜를 구하는 이 일이, 도대체 무슨 일인지 왕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여자와 그 일가 친족이 다 죽게 되었다니 왕의 마음이 흔들렸다. 왕에게 그 것은 자신의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냐? 그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에스더의 도전은 효과적이었다.

그러자 에스더는 정확하게 하만을 지적하며, 그의 죄를 고발한다.

그런데 만일 에스더가 섣부르게 하만을 처단해 달라고 했다면 과연 일이 잘 풀렸을까?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에스더의 용의주도함이 왕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에스더가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라고 왕에게 고발해 처벌받게 한 것이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잘못해도 잘못된 사람을 덮어 주는 것이 사랑인가? 그런 이상한 신학이 한국교회와 우리나라를 여기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성경은 공의가 하수 같이 흐르게 하라고 명한다. 그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명령이다. 정의를 구현하여 권력 가진 소수가 모든 것을 독차지하지 않고, 힘없는 자가 억눌리지 않고, 약자가 억울한 일 당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는 에스더에게 닥치고 잠잠히 앉아서 기도만 하라고 명할 수 없다. 우리나라도 누군가 정의를 위하여 일어나 행동하였기에 이 땅에 정의도 민주화도 얻어진 것이다. 목숨을 건 소수의 사람들이 뿌린 씨앗에서 자란 열매에 우리는 무임승차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 나는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 사회란 열매는 1980년대 넥타이 부대에 빚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 직선제와 평화로운 정권 이양과 언론법 폐지 등을 약속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 선언은 넥타이 부대들이 최루탄 연기 속에서 얻어 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도 학교, 직장, 교회 등에서 30년 넘게 겪은 일들을 돌아보면 잘못이 드러났을 때 어쭙잖은 인간적 연민과 사랑으로 눈감아 주자, 한 번 더 기회를 주자, 덮고 지나가자 했던 적이 많았다. 감히 누가 그런 짓을 했냐고 할 때, "그 악인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단호하게 처단해야 합니다" 하지 못해서 그 사람들이 계속 그 짓을 한 것이다. 곪은 것은 도려내야지 인간적 사랑으로 덮어 두면 악인들은 결국 더 큰 일을 저지르지, 절대로 스스로 나아지지 않는다.

죄는 참으로 뿌리 깊고 악인의 습관은 몸속 깊이 뿌리박은 것이기 때문에 정의로운 처벌 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만 사람은 달라진다. 그래서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께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시 10:15)라고 당당히 소리 높여 부르짖었던 것이다.

에스더가 "대적과 원수는 바로 이 하만 악당입니다!"라고 분명히 지적함으로, 정의가 실현되고 힘없는 민족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사랑과 은혜는 그 후에 깨닫는 거다. 죄에 대한 단죄, 공의의 실현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어쭙잖은 신학으로 부정하지 말라.

공의를 구하는 사람이 정의를 실현한다

인간적 사랑으로 죄악을 덮고, 죄인과 사탄에게 앉아서 당해 주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라는 생각은 십자가 콤플렉스에서 나온 착각이다. 공의를 구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법도다.

이제 우리가 우리의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 보자.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니라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심한 줄 앎이더라." (에 7:7)

왕후가 국무총리 하만의 죄를 적시하자 사실 왕은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자기 금고에 은 일만 달란트가 들어왔고 그걸로 처리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화가 났지만 당장 처리할 수가 없어 자리를 떴다. 그를 처단하는 것은 자기의 뇌물 수수죄와 관련이 있고 김영란법 위반 청탁이었기 때문이다. 화는 나지만 난처한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왕궁 후원으로 가버렸다.

하나님의 일이라도 한 번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1단계로 왕이 화가 났고, 마음은 흔들렸지만 자기가 개입된 사건이라 난처해서 자리를 뜨는 것까지, 우선 거기서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라 또 다른 섭리가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그 다음 단계의 일을 행하시기 시작한다.

하만은 상황 파악이 되었다. 자신의 권력 남용과 뇌물 공여로 조서를 받아 냈던 사건의 내막이 잔치 자리에서 드러났고, 왕도 당황했고 그 일이 사랑하는 왕후와 일가친척과 그 동족의 파멸까지 이어지지만 자신의 치부가 얽혀 있는 사건이라 왕은 어찌할 수 없어서 우선 자리를 떴다.

그러나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고 자기 운명이 이미 결정 났다는 것을 하만은 악당의 동물적 본능으로 감지했다. 왕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에 절망으로 얼굴을 감싸고 괴로워하는 하만의 모습을 그려 보라. 이제 처벌을 받게 된 것을 파악한 그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해결책을 찾는다. 이럴 때는 머리를 조아리고 도와 달라고 비는 것이 상책이다. 3절에서 자기 목숨을 살려 달라 구하던 것은 에스더였는데, 이제 2인자 하만 총리는 새로운 2인자로 등극한 왕후에게 도와 달라고 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왕이 후원으로부터 잔치 자리에 돌아오니 하만이 에스더가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렸거늘 왕이 이르되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하니 이 말이 왕의 입에서 나오매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더라." (에 7:8)

하만은 도와 달라고 에스더가 기대 누워 있는 카우치(걸상)에 엎드려 간청을 했다.

하만은 3장 5절에서 모르드개가 자기 앞에 몸을 굽히고 엎드리지 않은 것에 대해 화를 냈지만, 이제 자신이 에스더 앞에 엎드린다. 권력 앞에 엎드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엎드리지 않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은, 잔치 자리를 떠나 후원으로 나갔던 왕이 때마침 금방 다시 돌아오게 된 것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그때 들어온 왕이 그 장면을 보고 큰 오해를 하게 됐다. '이제 저 놈이 내 왕궁에서 내 왕후를 강간까지 하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권력 실세 2위였던 하만이 이제 왕후 성폭행범, 잡범이 되었다.

사실 왕이 이건 가만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하만의 행동이 내 여자를 강간하려고 한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궁중 내 앞에서" 즉 내 왕궁에서 나를 우습게 여긴 거라고 본 것이다. 자신의 권세에 대한 도전으로 본 것이다. 이건 벌을 내리는 게 아니라 죽여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만이 이런 오해를 받고 곤경에 빠지게 된 것은 사실 하만의 두려움 때문이다. 만인지상의 강력한 권세를 휘두르던 하만이기에 지금 상황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잘 안 것이다.

왕후 겁탈? 이건 죽음이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했던 행동이 더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에스더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해 살았으나, 하만은 두려움으로 처벌이 사형으로 바뀌는 더 큰 위기를 자초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처럼 오해를 통해서도 일어난다.

에스더 그녀의 원수는 이제 왕의 원수가 되었다. 이게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하만의 청탁에 따라 조서를 내린 문제는 왕 그 자신의 뇌물 수수와 축재 문제와 엮여 있어서 하만을 근본적으로 처단하는 게 힘들었을 텐데, 왕후 강간 미수죄로 그는 처형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깃털의 권력 남용 축재범에 대해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법원이 내주지만, 더 큰 권력으로 더 큰 잘못을 한 거물들은 막강한 대한민국 검찰도 처리를 힘들어하지 않는가? 2인자 하만의 정치적으로 교묘한 악행도 다 파헤쳐 제거하기는 어려웠지만, 왕후 강간 현장범으로 처리하는 건 쉬웠다. 하나님은 참으로 묘하게 일하신다. 이제 어떻게 진행될까?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이르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에 7:9)

왕의 오해로 급물살을 탄 하만의 처단은 왕의 수행비서관을 통해 더 가속된다. 이렇게 충성스러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하만이 나무 처형대까지 만들어 놓았다고 슬며시 염장을 지른다. 화가 난 왕은 그래 그럼 그놈 하만을 그 나무에 달아 죽여라고 명령해 버렸다.

모르드개를 죽이려던 하만의 음모가 하만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다.

은 일만 달란트로 조서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을 없애려고 함정을 팠던 하만은, 이제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게 된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보응이다.

이로써 하만을 위한 잔치 자리가 이제 죽음의 자리로 장면이 바뀐다. 놀라운 반전이다.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에 7:10) 

과거 3장 15절에서 왕과 함께 앉아 마시던 하만이 이제 교수대에 매달림으로 공의가 시행된다. 

함정을 판 사람이 함정에 빠진다

6절에서 말한 것처럼 "이 악한 하만", 악한 자의 처형, 그것이 공의다.

이렇게 하여 뒤에서 왕을 조종하여 조서를 받아내어 왕 못지않은 권력을 구가하던 2인자, 아니 실세였던 하만의 일생은 막이 내렸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르드개의 시대가 열린다.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는 시 75:10의 말씀대로다.

권력은 초개와 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왕 차관도, 그 어떤 문고리 3인방과 비선 실세도, 아니 심지어 MB와 길라임의 권좌도 잠시 잠깐 후면 사라질 권력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그 사라질 권력에 빌붙거나, 그 권좌에서 자신을 위해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 안 된다.

내시 하르보나도 평소에 하만의 악행에 반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그런 위기에서 모르드개 처형을 위한 나무 얘기를 슬쩍 흘려준 것 아닐까?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평상시에 사랑과 덕을 베풀어야 한다. 그래야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갈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고 이끄신다. 역사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라.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시다!

김덕수 / 한양공대와 동 대학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후 연구소에 근무하며 평신도 사역자로 살았다. 그 후 미국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t Amherst 컴퓨터공학 박사과정을 하다가 전임 사역으로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미국의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석사를, Fuller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대원을 졸업한 후에는 미국 이민 교회로부터 한국교회까지, 개척교회부터 초대형 교회까지, 그리고 부교역자부터 담임목사까지 13년간 다양한 경험을 했다. 현재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이자 '목회와 교회' 팀장으로 섬기고 있다. 이전에는 기독교전문대학원 Th.D. 과정 디렉터, 신대원 학생처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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