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건물이 아닌 성도의 연합과 교통, 그 자체다. 그런 교회는 늘 미래를 고민한다.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말씀대로 살면 된다고 말할지 모른다. 정작 교회는 모호한 이 말에 동의하면서, 다시 묻는다. '말씀대로 산다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인가'하고 말이다.

'공허한 질문과 구체적 대답' 논쟁을 앞에 둔 교회가 보여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 이러한 담론을 함께 생각해 보는 자리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열린말씀연대가 진행한 열린 말씀 컨퍼런스 '배움의 공동체로 부르심'이다. 지난 2일부터 4일까지 필라델피아에 있는 기쁨의교회, 챌트햄장로교회, 임마누엘교회에서 진행했다.

이번 컨퍼런스는 특별히 리더십 포럼을 함께 준비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목회자들과 함께 '변화 지향적 리더십을 향하여'를 중심으로 여러 주제를 논의했다. <미주뉴스앤조이>는 이번 목회자 포럼에서 진행한 논의들을 매일 하나씩 자세히 전달한다. 한규삼 목사(뉴저지 초대교회)의 기조강연 '교회의 시대적 현실을 진단한다'를 첫 주제로 시작해, 설교와 제자 교육, 다음 세대, 선교 논의를 이어간다.

첫 주제는 설교였다. LA 한길교회 노진준 목사가 발제자로 나섰다. 기사 최하단에 발제 영상을 첨부했다. - 기자 말

복음적, 변화, 설교, 리더십. 네 가지 주제 모두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하나의 이야기만 해도 길어질 테니,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 말하느냐에 따라 더 많은 내용을 말해야 한다. 그래서 '복음적 설교'를 중심으로 발제하려고 한다.

복음적 설교라고 하면 우리 목회자들은 '복음을 설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설교할 때마다 복음을 말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는 것 같다. 설교에 복음이 없다는 평가는 설교에 기반이 되는 복음적 장치가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종종 어떻게 복음만 전할 수 있느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복음적 설교는 단순히 복음만 전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설교라기보다 복음이 동기가 된 설교라고 보아야 한다. 복음을 설교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게 하는 전도를 목적으로 한 설교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 추구하면 안 된다. 복음적 설교는 복음이 동기가 되어 인격의 변화까지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복음적 변화를 설교하는 리더십'을 주제로 발제한 LA 한길교회 노진준 목사.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복음적이지 않은 설교 동기

교회 안에는 복음이 아닌 다른 것들이 설교 동기가 되는 시대다. 예전에는 주로 '기복'이라는 주제와 연관이 깊었다. 어떻게 하면 복을 받고, 잘살 수 있는가를 중심으로 설교했다. 교인들의 변화를 유도하고, 움직이게 하는 동기가 기복에 있었다는 의미다. 반대편에는 언제나 저주가 있다. 저주와 재앙의 두려움이 동기가 되어 움직였다.

최근에는 '재미'와 '감동'이 설교 동기가 된다. 소비 지향적인 사회에서 목회자도 '일단 현대인들에게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감동이 있으면 더 좋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 만족하고 싶어 자리에 앉아 있는 교인들 역시 어떻게든 재미있어야 하고, 감동해야 한다는 소비 지향적 문화로 교회를 결정한다.

세속적 동기도 크게 작용한다. 세속의 반대를 교회라고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경건하고 거룩하다고 하면, 종교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결국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철학적 사고를 세속주의라고 부른다면, 지금의 세속은 개인주의를 말한다. 세계관이 하나님 앞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관 형성이 중요한 이슈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가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설교 동기로 삼고 있다.

하나님나라의 강조점 변화

복음적이라는 말을 하나님나라의 관점이라는 표현으로 쓰면 어떨까 생각한다. 먼저 하나님나라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살피면 좋겠다.

마이클 볼튼 교수 등이 강조하는 '투 킹덤'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투 킹덤' 개념은 하나님나라 이야기를 주로 공동체를 중심으로 풀어 간다. 예전에는 하나님나라를 교회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개념이 건강하지 않다는 지적이 높아졌다. 자연스럽게 우리 삶이 하나님나라여야 한다는 점이 부각됐다. 그리고 생활 영성이 강조됐다. 세상으로 나가서 세상을 변화하고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노 목사는 "우리가 말하는 위로는 그야말로 하나님나라에서 살아가는 삶을 격려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러한 지적이 나온다.

"삶 전체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옳다. 그런데 그렇게 강조하니 정말 하나님나라를 이루며 살았는가 생각해 보면, 오히려 생활 영성이 교회를 잃게 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에 변화는 거의 이루지 못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구별된 부분이 없다 보니, 아무것도 하나님 것이 아니다."

모두 하나님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됐다는 말이다. '교회에서 삶으로'라는 생활 영성을 강조했는데, 개인주의와 만나면서 본질적인 하나님나라를 위한 우리 사명을 잃게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논의에서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이 다시 중심이 됐다. 개인적으로 주님과 만나고 동행하는 삶이 강조되면서 공동체적 하나님나라를 잃었다. 결국, 하나님나라의 사명은 교회가 하나님을 위한 거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하나님나라가 된다고 했던 시대를 지나, 교회를 벗어나 개인의 삶이 하나님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제 이 시기를 지나 다시 돌아가자고 한다.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거처가 된다는 의미가 중요하다.

참위로와 위로 설교

미국 목회는 위로 목회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민자 설교는 대부분 위로 설교이라고 들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 타협하는 것 아니냐는 의미다. 그럼 나는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고 되묻는다. 목회 위로가 아니고 다른 목회를 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실제 목회는 모든 경우에 위로의 설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위로라는 말의 잘못된 선입견이 문제다. 목사들은 위로의 반대가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사명 목회, 사명 설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세상을 바꾸고,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가고, 선교하고, 모두 주님께 드릴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사명을 말하지 않고, 자꾸 위로만 하려고 하기에 문제가 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나는 위로 설교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위로의 동기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고 여긴다. '당신이 곧 잘될 것이다', '지금은 힘들지만 곧 성공할 것이다', '하나님이 부자가 되게 할 것이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등의 이런 말이 위로라면 의미가 없다. 이런 말은 복음적이지 않고, 위로가 될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위로는 그야말로 하나님나라에서 살아가는 삶을 격려하는 것이다.

"험한 세상을 살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나라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아닌가. 이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다. 세상 유혹이 너무 크니 말이다. 세상 기준과 가치관을 따라가려는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간다."

함께 정체성을 확인한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에 있겠는가. 가치관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도 어려운 세상이다. 그 사람이 놓은 위치가 변화는커녕 견디면서 버티는 것으로도 벅찬 자리일 수도 있다.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럽겠나. 이때 우리 정체성과 자리, 가치를 다시 확인하고 살아가도록 위로하는 게 중요하다.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재미와 감동을 강조할 때 조심해야 한다. 성과주의, 성장주의, 성공주의가 모두 배경에 있을 수 있다. 사명을 중요하게 삼았을 때 더욱 문제가 될 수 있다. 교인을 닦달하고, 감동하게 해 헌신하게 유도하는 탓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 동기를 잘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과주의, 성공주의로 빠진다.

우리가 자주 듣는 오류도 성찰이 없어서 나온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 지금은 고생하지만 나중에 다 잘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아니다. 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것도 모든 걸 다 이룰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해 믿지 않는다. 제자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말씀이 소비 지향적인 복음으로 변질된다.

복음적 변화는 결국 주권의 변화다. 누가 주인인가 제대로 아는 문제다. 죄와 싸워 우리 삶과 교회의 주인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팀 켈러는 그리스도인의 결혼 생활에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주권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못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 정도로 마치는 게 아니다. 부부 싸움을 해도 이 정도는 다 인정한다. 문제는 아내가 더 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래서 싸우는 것이다. "내가 다 잘했다는 거 아니야. 하지만 당신도 문제가 많아"라고 한다. 죄인이라는 거 인정하지 않는다.

교회에서도 같다. 목사가 문제를 일으키며 "제가 죄인인 것 압니다. 그런데 이걸 말하는 당신은 더 큰 죄인입니다"라고 말한다. 죄인이라는 것만 인정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인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복음적 변화는 결국 최후의 승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복적 승리를 이야기한다. 계속해서 쓰러지고 넘어져도 다시 복음으로 일어서는 것이 중요하다. Already와 Not Yet의 긴장 관계가 중요하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고백하지만, 인간이 주인이 되려는 시도가 여전하므로 선포하고, 상기하고,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나라가 임했으며, 그 주권이 우리 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복음적 변화는 결국 최후의 승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복적 승리를 이야기한다. 계속해서 쓰러지고 넘어져도 다시 복음으로 일어서는 것이 중요하다. <미주뉴스앤조이> 경소영
애매하다고? 가장 급진적이다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말씀 안에서 확신하며 살지만,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넘어지는 것이 불가피하지만, 일어서는 긴장이 우리 삶에 있어야 한다. 복음과 율법의 역설적 긴장이 있어야 한다. 죄를 알게 하고, 타락을 막게 하고, 은혜 가운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게 하는 긴장이 항상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복음 없이 율법을 말할 수 없다.

'할 수 없다'와 '할 수밖에 없다'는 긴장이 있다. 현대는 할 수 없으면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할 수밖에 없는 긴장이 싫다. 그러나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그러한 설교를 해야 한다.

우리는 목표가 보이는 것을 좋아한다. 무엇이든 우리는 가시화하려고 한다. 조금 더 분명한 목표를 이야기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설교하는 것이 애매한 것 같아 보인다. 우리가 복음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그리스도 설교는 다르다.

우리가 타락한 상태에 있는 현 상황을 분석하고, 해결책이 예수라고 말한다. 타락한 인간을 전재한다. 기복주의의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안정을 추구하고, 부를 추구하는 것에 있다. 세속과 세상을 타락했다고 말하면서, 타락한 상태에 머물려고 하는 것이다.

복음적 설교는 이러한 죄와 대립하기 때문에 절대 대중적일 수 없다. 대중적이려면 법률 스님처럼 해야 한다. 어느 목회자 사모가 법률 스님에게 질문했다. "남편과의 관계, 교회에 문제가 있는데 어쩌면 좋을까요." 스님이 "예수 잘 믿으세요"라고 답했다. 현대인은 그걸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복음적 설교는 대중적일 수 없을 정도로 급진적이다.

목회자가 설교할 때, 세상을 향해 설교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성도에게 이야기해야 하는데 말이다.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 과정을 돕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바꿔야지'라고 생각하기보다, 현장에서 살아가도록 강조하는 것이 설교자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목사의 메시지가 급진적이어야 한다기보다 성도의 삶이 변화해야 가장 급진적일 수 있다.

유영 / <미주뉴스앤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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