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이번 주가 에스더였다. 수요일 저녁마다 성도에게 성경 낱권들을 소개하는 데 말이다. 에스더, 하면 누구나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잘 알려진 문구를 떠올리게 된다. 고 안이숙 사모도 그 문장을 애용했고, 책명으로도 사용했다. 신앙의 시련기를 거친 이마다 이 경구에 맞는 놀라운 체험과 천상의 은혜를 받았을 것 같다. 나 또한 커다란 문제 앞에서 이 어휘가 선사하는 단호함을 사랑하곤 했다.

이것은 사실 모르드개가 그의 사촌 에스더 왕비를 향해 결연하게 촉구하는 말이기도 하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에스더 자신이 왕비라는 자리에 있는 이유를 제대로 깨우칠 정도로 강력한 호소였다. 그런데 이 촉구가 요즘 나라의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던져지고 있다는 생각, 지울 수 없다.

나라가 백척간두라 할 만큼 어렵다. 한국호가 마치 영화 '터널'처럼, 터널을 통과하는 듯하다.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위험이 있다. 더 큰 문제는, 마치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전망이 어둡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의 입장 때문이다. 나라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여인이 내려야 할 절체절명의 결의가 미뤄지며 변명되는 대목에서 그렇다.

그런데 내 마음 깊이 짓누르는, 내 마음에 넓게 자리 잡는 생각은 이것이다. 대통령과 독대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한 이정현 대표나 황교안 총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은 국회와 정부 내에서 신앙인으로 두루 알려져 있다. 대표 기독교 방송에 출연해 간증까지 한 이 대표는 교회 집사로 소개됐다. 황 총리는 목회자 후보생을 위한 신학교 학습까지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대표는 얼마 전 국회 의사 처리 과정에서 결기를 가지고 집권당 대표로서 금식까지 했다. 황 총리는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날 정도로 자기 관리와 소신이 뚜렷하다고 한다. 때문에 작금의 현실에 대한 이 두 사람의 역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최순실 게이트 이전까지 반대쪽 진영에서는 이들을 집권당·청와대·정부를 두둔하고 비호한 인물로 비쳐져 왔다. 여당과 정부쪽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는 청와대·정부를 전방위로 대변하며 보호한다는 우호적 평가를 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단지 반대편 쪽 진영에서만 이 두 사람에 대해 우려하고 분개하는 게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국민 절대다수가 원하는 대통령 퇴진 혹은 하야에 대한 일정 부분의 몫이 이 두 사람에게 주어져 있기도 한데,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쉽게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을 보이고 있다.

최근 이 대표가 보여 준 대표직에 대한 집착은 여당 내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열린 첫 국회 질의응답에서 보여 준 황 총리 답변은 실망스럽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그래서일까. 두 사람이 국회 안 여러 방면에서 개인적 모멸감까지 받는 일이 생겼다. 정부와 청와대를 비호한다고 그런 행동을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럴 이유도 없다.

자리 보존이나 진영 논리에 갇힐 여유가 없을 정도로 국민이 받은 상처가 심각하다. 국가 존립도 위태롭다. 지금은 두 사람 다 최고 통수권자를 아끼거나 존중하는 방식을 확실히 바꿔야 한다. 질서, 기강보다 국기, 민심을 우선해야 한다. 이 두 사람이 청와대를 향해 쓴소리, 직언을 해야 한다는 소리가 오래전부터 여당 내에서 심심찮게 들려왔다. 간청을 넘어 청와대를 촉구해도 모자랄 시국이라는 판단에서 말이다.

두 사람보다 연배가 있는 보수 교단 교회 장로인 한 사람은, 올해 4·13 국회 총선 전에 박근혜 대통령의 영구 집권 시나리오를 나름대로 포착해 인터넷 한 언론 매체에 나와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대담을 갖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해직 교수였던 이 사람은 11월 15일 국정화 교과서 발행에 반대하는 정견을 발표하는 지도층 인사 사이에 서 있었다. 1980년대 기독교와 역사의식 관련 주제의 책들로 젊은 보수 기독 지성의 각성을 일으킨 인물이기에 더 신뢰가 갔다.

이제 교회와 교인들은 이 국가적 위기 가운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부 교회 목회자와 교우들은 12일 광화문광장 집회에 참여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교우들을 이끌어 가며 설득해 함께 역사 현장으로 나간 교회와 지도자가 부러웠다. 이와 달리 서울역 극보수 단체가 '미스바 성회'라는 이름으로 주관한 단체에 일부 목회자가 등장해 벌인 정치적 발언을 인터넷상에서 접하고 아연실색했다. 정말 부끄러웠다. 야당, 시위하는 시민들을 향한 지탄이 대부분 시민에게 어떻게 비칠까 심히 우려됐기 때문이다.

지난 주일예배 통성기도 시간에 필자는 교우들을 대상으로 기도를 제안했다. 나라를 사랑하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나라를 아끼는 마음은 같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제는 청와대가 민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하자고 한 것이다.

단출하게 구성된 교우 가운데는 그동안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자세를 가져왔거나 유신 시절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분의 며느리이자 현 대통령 애호자도 있었다. 조심스러웠다. 그렇지만 해야 할 일이라 생각되었기에 목회자로서 의무를 최소한이나마 실천하고 싶었다. 몇 주간 걸쳐 시국을 위해 '국가권력', '사법 정의', '언론 사명', '국민 안위'라는 네 가지 제목을 설정해 간절히 기도했다.

현 난국을 돌파할 몫이나 역할이 저마다 주어져 있다. 그런데 왜 이 두 사람인가. 이 두 사람은 청와대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다. 심리적으로 벼랑 끝에 몰려 있을 대통령에게 이런 분들의 충언이 적실하다. 이 대표의 경우에는 한나라당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대표 시절 선거운동을 할 때부터 '이너 서클'로서 '진친박'이라 불리는 네 사람 중 한 사람에 속했다.

그중 한 사람은 박 대통령 변호를 최근에 맡아 대국민 발표를 했다. 여성 박근혜의 사생활까지 이해해 달라는 어리둥절한 요구를 곁들이면서 말이다. 그렇게 국민의 상처 난 감정을 더 건드려 더 거센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 대표와 황 총리도, 현재까지 두 사람이 보인 스탠스만 본다면 크게 다르지 않다. 궤도 수정이 필요한 때다.

이 대표는 이제 당이 환골탈태할 수 있는 길을 여는 데 기여하는 쪽을 선택해야만 한다. 박 대통령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언도 전할 수 있을 정도로, 신임을 받는 자기 역할을 제대로 살려야 한다. 그것은 곧 박 대통령의 질서 있는 퇴진, 이유 있는 하야를 간청하며 촉구하는 일이다. 그것이 나라를 살리며 국민을 위하는 길이다. 이 '생즉사 사즉생'의 길을 신앙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 대표 자신이 지난번 단식할 때 읽었던 욥기와 시편 중 시편 1편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겠다.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가 무슨 뜻인지 생각하면서. 자신의 거취를 신앙적으로 결단하고 나서 청와대를 향할 때 비로소 그 힘이 실릴 것 아니겠는가.

황 총리도 사법 권력 정상화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량을 뒤늦게나마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검찰 출신으로, '겁찰'이라 불리는 검찰의 위상을 제대로 세우는 일에 나선 현 김현웅 법무부장관과 머리를 맞대야 할 일이다. 무엇이 국가를 위한 일인지, 새벽에 깊이 묵상한 후 민심이 천심이라는 통찰력으로 주 하나님께 여쭐 일이다.

총리로서 이제는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퇴진, 하야 로드맵을 소상히 설명하고 제시하는 직언을 대통령께 해야만 한다. 부인 되시는 분과 지인들에게 대통령 마음을 움직여 달라는 중보도 요청하면서. "나를 위해 금식하되"라는 에스더의 심정처럼.

이 두 사람에게 한국 성도가 무엇을 요청할 수 있을까. 그분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이라면 뭐라고 권면할 수 있을까. 모르드개의 말이 아닐까.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중략)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에스더 4:14)

이 같은 절절한 촉구로 인해 에스더가 움직이고, 놀라운 일은 일어난다. 당시 페르시아제국에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만의 끔찍한 집단 살육의 음모와 집행에서 벗어난다. 거대한 음모가 드러나고 파헤쳐지는 과정이 통탄·비애·허망을 자아낸다. 하지만 다른 한편 '지금'이라도 드러난 것이, 도올 김용옥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보우하셨던 것이다.

지금 최순실 국정 농단 피해자면서도 주범·공범으로도 인식되는 대통령을 향해 이 두 분이 갖춰야 할 행보는 분명해 보인다. 에스더의 말처럼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왕의 규례를 어기며 나갔지만, 결국 왕을 움직여 유다 백성을 그 위급에서 벗어나게 한 그 에스더의 결기와 행동이 지금 이정현 집사님과 황교안 전도사님께 절실히 필요하다.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태도 말이다. 그래야 퇴로는 열릴 수 있다.

이 위기의 때에 두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이유다. 

석창훈 / 바로그교회 담임목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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