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가 인간 정신의 구조와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정립한 여러 이론과 가설 중에는,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이제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섹슈얼리티와 사회화라는 과제를 통해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과 대면하는 인간화의 과정이 필연적으로 비극을 내포하고 있다는, 결코 반갑지 않은 진실을 전달하는 신화적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장과 비극의 이중주는 비단 개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한 사회가 성장이라는 모티브로 운용되는 동안 개개인의 삶에 쌓여 가는 필연적인 고통은, 자랄수록 피부를 파고드는 내성 발톱처럼 더욱 예리하게 비극의 깊이를 더하게 마련인가 봅니다. 억울한 죽음을 맞은 한 시민의 주검을 앞에 놓고 벌어지는 희극을 닮은 어느 비극에서 우리는 고속 성장을 이룬 대한민국 사회 안에서 그간 '아무도 모르게' 자라온 서글픈 괴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허나, 성장과 비극의 필연적인 동반 관계를 운명이라고 순응하기에는 인간이라는 개별적 존재가 고통에 매우 민감하다는 현실을, 제 눈을 찔러 버린 오이디푸스의 형상을 통해 소포클레스의 비극이, 그리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역설하고 있는 듯합니다.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성장 영화라는 장르화된 공식 또한 고통과 성장이 맞물린 인생의 진리를 소재로 삼지만, 그 안에서 개별화된 의미를 생산해 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대개, 성장 영화의 미덕과 교훈은 다름 아니라 고통을 이겨 내고 성장을 이뤄 내는 주인공의 투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장과 고통의 명쾌한 일차함수는 그리스 비극이, 그리고 프로이트가 담아내려는 인간화의 아이러니를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매우 특별한 성장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부모에게 버려지고 사회에서 잊혀진 채로 도시 한복판에서 성장하는 네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결코 간단히, 가볍게 풀어낼 수 없는 이 어마어마한 비극의 핵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시도합니다.

1988년 일본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나시 스가모 사남매 방임 사건을 소재로 해서 2004년에 만든 이 영화는 주인공을 연기한 12세 소년 야기라 유야가 최연소 칸느영화제 남우 주연상을 수상하면서 평단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쿠엔틴 티란티노 감독이 수많은 영화제 출품작들을 보고 나서 단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바로 이 영화 속 소년의 얼굴이었다라고 했을 정도로, 히로카즈 감독의 사려 깊은 카메라는 성장과 비극의 틈바구니에 갇힌 소년 아키라와 어린 형제들의 모습을 잊지 못할 이미지로 관객의 마음에 각인시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동경의 한 아파트로 후쿠시마 모자가 이사를 오는 것으로 시작하지요. 주인집 남자는 어린아이가 있으면 다른 세입자들이 불평을 많이 한다고 주의를 줍니다. 젊은 엄마는 이제 중학교에 진학하는 외아들 아키라가 얌전하고 공부를 잘 하는 모범생임을 강조하며 주인을 안심시키고는 부지런히 이사짐을 정리하지요.

명랑한 톤으로 가볍게 움직이는 카메라와 무심한 듯하지만 인물들의 디테일한 움직임과 시선을 이어 붙이는 편집은 여느 이삿날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을 담아내면서도 아키라와 엄마가 주고 받는 은밀한 눈빛 안에 숨겨진 비밀의 존재를 암시합니다. 이삿짐 속에 섞여 있던 두 개의 커다란 여행 가방 안에 막내 유키와 장난꾸러기 시게루가 각각 숨어 있었던 것이지요.

저녁이 내려앉은 낯선 거리를 지나, 아키라는 기차역으로 바로 밑의 여동생인 쿄코를 데리러 나갑니다. 재잘거리는 네 아이들이 저녁 식탁에 다 모이자 엄마는 큰 아들인 아키라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규칙을 정합니다. 빨래를 담당하는 쿄코는 베란다에 설치한 세탁기까지는 나갈 수 있지만 어린 시게루와 유키는 아예 집 밖 출입을 할 수 없다고 말이지요.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학교에 갈 수도 없는 네 명의 아이들이 속절없이 갇혀 있는 비좁은 아파트에도 어김없이 새날의 아침이 찾아들고, 거실 깊숙이 팔을 뻗은 햇살을 동무 삼아 네 명의 아이들은 일하러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하루를 보냅니다. 이사 온 지 며칠 후, 아버지가 각기 다른 이 아이들의 엄마는 또 다른 사랑과 그 사랑이 약속하는 행복을 찾아 아이들을 남기고 떠납니다.

무책임하게 사라진 아빠들을 대신해 여지껏 아이들을 맡아 왔다고 주장하는 철없는 엄마에게 아키라는 쉽게 따지지도 못하지요. 간간히 돈을 부쳐 주는 것으로 엄마의 존재를 희미하게 느끼지만 이제 아무런 보호 장치없이 12살 아키라와 그의 어린 동생들은 세상을 향해 조금씩 발을 내딛습니다.

모두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만 모두가 불행해지고만 이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부지런히 자랍니다.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한 동경의 한복판에서 네 아이들의 행색이 눈에 띄게 남루해지는데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현실을 극명하게 암시하는 몇개의 롱숏는 '아무도 모른다'라는 영화의 제목에 숨겨진 언중유골을 드러냅니다. 사실, 이 영화는 모두가 다 알지만, 누구도 알고 싶어하지 않기에 아무도 모르는 그 지점을 보여 주려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모른다'의 진정한 매력과 힘은 누구를 탓하지 않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키라와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 엄마나 애초에 사라져 버린 아빠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무관심에 상처받는 것 같지도 않고요. 부모 그늘에 사는 다른 아이들을 부러워하거나 자신들의 처지가 부끄러워 세상으로부터 숨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지메로 상처받고 소외된 여학생 사키를 보듬기까지 하지요.

절망과 박탈감에서 자유로운 네 아이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지만 굳이 그것 때문에 성장을 멈추거나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쉼 없이 자라고, 키가 자라고, 표정에서 언뜻언뜻 나이보다 웃자란 세상에 대한 이해심이 배어날 때, 관객은 아이들에 대한 먹먹함이나 미안함보다는 비극과 접붙은 성장에의 본능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순간까지도 살아 있는 생(生)의 동력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특히, 자신의 생일에 엄마가 돌아 올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기차역에 나가 엄마를 기다리겠다는 막내 유키의 첫 번째 외출 장면이 그렇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아파트를 빠져나가야 하지만 막내 유키가 고른 신발은 이제는 좀 작아지고 추워 보이는, 걸을 때마다 뽁뽁 소리나는 슬리퍼지요.

사람이 꽉 찬 저녁 거리에서 오빠 손을 잡고 야무지게 간판에 쓰인 글씨를 읽으며 지나가는 유키의 발걸음에 맞춘 슬리퍼 소리는, 나름의 비극에 눈먼 이 세상이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해도 난 이렇게 살아 있다라고 외치는 아이를 위한 행진곡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오지 않을 엄마를 한참 기다리다가 텅 빈 거리를 통과해 집으로 돌아오는 유키의 슬리퍼는 이 서글픈 장면에 관습적인 눈물 대신 리듬을 불어 넣습니다.

히로카즈 감독은 일 년의 긴 촬영 기간 동안 비전문 배우들인 아이들과 지내면서 비극과 함께 성장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섬세하게 관찰하고 예리하게 잡아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미 성장을 멈춘 누군가의 시선으로 아이들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잊혀지고 버려진 아이들의 눈물보다는, 아무 데서나 터져 나올 준비가 된 아이들의 높은 웃음소리와, 잡초 씨를 받아다가 다 먹은 컵라면 그릇에 심고 자신들이 마실 물을 나누어 주면서 기어이 싹을 틔우는 아이들이 표현하는 살아 성장하는 모든 것에 대한 동질감, 그리고 극도로 곤궁한 중에도 누구 하나 적으로 몰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아이들의 천진함을 관객이 보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영화의 후반부는 가혹한 현실을 무시하고 세상을 동화로 포장하는 데 급급한 성장 영화의 뻔한 결론을 버리고, 아이들의 눈높이에서도 너무나 분명하게 감지되는 비극의 깊이와 그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유키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묘사합니다.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어떤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 마음을 정하기 어려울 만큼 세상의 도움을 받아 본 적 없는 아이들은 막내 유키의 주검을, 아파트에 이사 온 그날 엄마가 그랬듯이, 여행 가방에 넣고 유키의 마지막 외출을 준비합니다.

이 지긋지긋한 반년을 보내면서도 아이가 끊임없이 자랐던 듯, 유키의 시신은 이사 올 때 들어갔던 작은 여행 가방에 더 이상 맞지 않습니다. 더 큰 여행 가방에 유키와 유키가 좋아하던 초코 과자를 잔뜩 넣은 채로 길을 나서는 아키라와 사키는, 큰 소리로 한 번 울지도 않고 동생을 묻고 나란히 돌아오죠.

텅 빈 기차 안에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망연히 앉은 두 아이들의 모습은 그간의 성장, 성장과 함께 깊어진 고통, 그리고 고통과 함께 전진하는 생의 운동력을 조용히 관찰하게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동경 하늘에 원을 그리는 모노레일 트랙을 닮은 이 성장과 비극의 순환 고리 안에서 여전히 악착같이 자라는 아이들을 대견한 듯 바라보며 끝을 맺습니다.

관객의 눈을 파고들며 작렬하는 여름 한낮의 태양빛을 온몸으로 견디며 함께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카메라의 시선을 차마 거두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이죠. 숙명처럼 성장에의 요구와 고통의 늪 사이에 놓인 인간 안에서 작은 기적을 발견하려는 감독의 인내심에 박수를 보냅니다.

*이 글은 웹진 <제3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웹진 <제3시대> 바로 가기: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

이희승 / 뉴질랜드 오클랜드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 미디어영화학과에서 '각색 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정신분석학회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라캉포럼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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