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1월 17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순종' 일부 장면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편집자 주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말은 어쩌면 오만이다. 김경주 시인은 '비정성시(非情聖市)'에서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라고 썼다. 상대의 경험이 특별하면 특별할수록, 고통을 상상하는 일은 더 힘들다.

테러나 학살이 자행되는 장면을 목도한다면, 가족의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장면을 눈앞에서 본다면, 거기서 발생한 트라우마는 한 사람의 생을 압도해 버릴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비롯되는 고통이 대체로 집단 기억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시리아 난민들이 모여 사는 레바논 자흘레 난민촌이나, 우간다 내전을 겪은 아프리카인들이 모여 사는 딩기디마을이 그렇다.

CBS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순종'은 이 두 마을 사람들과 이곳을 품는 두 선교사의 삶에 주목한다. 레바논에서 사역하는 김영화 선교사, 우간다에서 사역하는 김은혜 선교사(그리고 그 가족들). 다큐멘터리는 각 공동체에 대한 이들의 헌신을 통해 '순종'의 의미를 짚어내는 데 88분 러닝타임을 할애한다.

카메라는 두 선교사가 사역하는 장면을 교차편집 형식으로 비춘다. 자칫 산만해 보일 수 있는 연출이지만 두 사람 모두 학교를 기반으로 사역을 해 나가기 때문에 장면 전환이 낯설지 않다. 사실 이들이 하는 사역 자체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목양 활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종이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를 뿐, 심방을 하면서 각자의 필요를 챙기고 관심을 쏟는다.

공동체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은 기구하다. 부모가 반군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본 소녀는 때때로 급작스럽게 발작을 일으킨다. IS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장을 잃은 가족들… IS가 진열해 놓은 시체들을 숱하게 목격하고 온 이들, 쫓기듯 고향에서 도망쳐 나와 불안한 눈빛으로, 다큐멘터리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난민들이 있다. 이들의 집단 기억은 '상실'이라는 동굴을 형성하고 있다.

레바논 자흘레에는 시리아 난민이 모여 사는 난민촌이 있다. IS로부터 도망쳐 나와 불안 속에 갇혀 사는 이들이 있다. 영화 '순종' 스틸컷
김영화 선교사는 레바논 자흘레 난민촌에서 학교 사역을 하고 있다. 영화 '순종' 스틸컷

김영화 선교사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대기업을 다니다가 그만뒀다.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동생, 나이 든 부모를 한국에 내버려 두고 척박한 땅을 선택했다. 자흘레 난민촌에 컨테이너 학교를 세웠다. 오로지 이들을 향한 사랑,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

김영화 선교사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각자 마음을 나누라고 제안했을 때,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마음을 풀어놓는다. 이 선교사의 헌신을 경험했기에, 난민들은 조금이나마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 있었다. 하반신 장애를 앓는 소년 '알리'에게 학교에 나오라며 매일같이 찾아가는 김영화 선교사 모습도 인상적이다.

김은혜 선교사는 자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사실 김은혜 선교사가 하는 사역의 유산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다. 아버지 고 김성종 목사는 우간다 딩기디마을 식구들에게 삶을 쏟았다.

월세방에서 하루하루 건사하는 것도 빠듯한 생활 가운데 대출을 받으면서까지 사랑을 실천한 김 목사의 모습이 당시에는 원망스러웠다. 그때의 서운한 마음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묵묵한 순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김은혜 선교사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우간다 딩기디마을에서도 학교 사역을 하고 있다. 영화 '순종' 스틸컷
김은혜 선교사가 한 아이를 안고 있다. 김 선교사는 아버지 고 김성종 목사에게서 사역을 물려받았다. 김성종 목사의 삶은 딩기디마을 사람들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영화 '순종' 스틸컷

다큐멘터리의 클라이맥스는 김 목사 도움으로 건강을 되찾은 '플로렌스'라는 아이가 김 목사 무덤 앞에서 한국어로 "목사님"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선교사가 쌓은 하루하루 일상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상처받은 나그네들의 삶에 사랑을 녹여내는지 잘 응축하고 있다.

'순종'이 무엇이냐는 제작진의 질문에, 김영화 선교사는 이 사람들과 함께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김 선교사는 시리아에서 겪은 참상을 쏟아 놓는 자흘레 난민들에게 '한 가족'이라고 이야기한다.

'읽히지 않는 고통'을 알게 될 때

다시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라는 김경주 시인의 시구절로 돌아가 보자. 도무지 '읽힐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숱한 인생에게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선교사들의 일상은 그 답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증언한다.

'거리의 철학자' 김상봉 교수(전남대 철학과)는 말했다. '홀로 주체'를 넘어 '서로 주체'가 돼라고. 나의 고통이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앎의 차원으로 나아간다.

함석헌은 모든 앎은 앓음이라고 했다. 김상봉 교수는 함석헌의 말을 끌어와, 한 사람의 고통이 모두의 고통이라는 앎의 차원으로 갈 때 더불어 연대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아파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형성하는 단초다.

김은혜 선교사와 김영화 선교사가 이들과 함께 몇 년을 동고동락했는지, 그동안 어떤 아픔을 공유하고 겪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이 나그네 삶을 사는 난민들·아프리카인들과 공동체를 꾸려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을 준다. '세월호', '구의역' 등으로 명명되는 이 시대 '난민들'에게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보여 준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김영화 선교사의 헌신은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이 무엇인지 화두를 던진다. 영화 '순종' 스틸컷
소년 '알리'는 하반신 장애로 다리를 제대로 쓸 수가 없다. '알리'의 엄마는 가족들과 살 터전을 만들기 위해 독일로 떠났다. '알리'는 엄마를 그리워한다. 영화 '순종' 스틸컷

예수는 말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

신은 '난민'과 같은 얼굴로 우리 곁에 서 있다. 이들에 대한 환대,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일상을 함께 사는 것. 서로 단단한 일상을 쌓아 가는 것. 그게 '읽히지 않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읽고 나눌 수 있는 단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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