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제제기 - 칼뱅의 예정론이 갖는 일반의 한계

필자는 성경에 기록된 예정론을 믿는다. 그러나 칼뱅식의 운명론적 예정론은 거부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칼뱅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적 예정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교회(개혁 교회)를 풍미하고 있는 예정론은 칼뱅의 예정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특히 그의 '이중 예정론'은 그 중심 자리를 차지한다. 이중 예정론이란, 하나님은 영생(永生)을 얻을 자와 영멸(永滅)을 당할 자를 창세 전에 (단번에) 예정해 놓으셨으며, 이러한 예정의 적용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하다는 교리다.

전도 무용론(無用論)과 유기(遺棄)(버림)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론 등등, 그의 예정론이 갖는 치명적 약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숱하게 제기되어왔다. 그럼에도 칼뱅의 예정론이 그간 개혁 교회 중심 교리로 견고히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대체할 만한 마땅한 예정론이 등장하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우선 그 논리 출발점부터, 옳고 그름을 떠나서, 강력한 신앙적(성경적) 용어들로 보호막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의 불가항력적(거부할 수 없는) 은혜,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인간의 겸손 등등. 그의 예정론의 담론으로 등장하는 이러한 용어들을 개별적으로 살펴보면, 이들 중 어느 것 하나도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 없고, 숭고하지 않은 가치가 하나도 없다. 적어도 칼뱅으로서는 구원을 이룸에서 필연적인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었던 비성경적 차원의 인간의 자유의지론 등으로 - 부정하거나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배제하려는 인간의 그릇된 생각들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예정론에서 언급하는 선택과 유기의 원칙에 대한 "저들의 무지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진정한 겸손을 심각히 감소시킨다"고 보았다[장 칼뱅, <기독교강요 중권>(생명의말씀사, 1990), 500쪽].

이 같은 칼뱅의 논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지닌 문제점을 비판하는 자들은 그들이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도전하고 하나님 영광을 저해하는 겸손치 못한 자들로 매도될 수밖에 없는 든든한 방비책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한 일은 이런 그의 확신과 방비책이,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칼뱅 자신마저도 온전한 복음적 예정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차단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칼뱅으로서는, 당대에 제기되고 있던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왜곡된 부분(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의 선행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도덕론에 근거한 인본주의적 주장 등)의 위험성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이중 예정론으로 이를 막아서려 했던 것으로 필자는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칼뱅이 성경에서 밝히 증거하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간의 선한 자유의지의 싹마저 잘라 버린 점(앞의 책 상권, 380~400, 460~490쪽)은 대단히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타락이 인간의 선한 자유의지마저 완전히 상실케 했다고 본 것(인간의 전적 부패)은 성경에 대한 이해 부족의 결과로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왜곡되거나 부정적인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예수 그리스도) 없이, 율법 준수나 선행 등 자기 의지의 노력만으로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구원 과정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지적 응답 영역이 남아 있음을 성경은 밝히 증거하고 있다(마 4:17, 막 1:15, 행 16:31, 17:30 등등).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행 16:31)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1-1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응답자들(요 1:12)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하셨다(구원을 이루셨다). 예정된 자만이 아닌 그 누구라도 "예수를 믿으라"(행 16:31),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하나님의 요구와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그 자손들이 죄 아래 있음으로 자력 구원이 불가능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만한 선한 의지마저 상실되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응답'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칼뱅은 인간의 '자유의지적 응답'을 간과한 점이 있다.

악의 축이라 불리는 북의 정권하에 사는 북한 동포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전적으로 부패하여 선한 의지마저 상실한 자들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 아닌가. 폭압적인 정치 상황에서 힘이 없어 어쩌지 못하고 사는 것은 맞으나, 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고 누군가 구해 준다면 얼마든지 바른 판단을 하고 탈출할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기 의지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드러내지 못하고 숨겨져 있었을 뿐, 상실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칼뱅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응답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전적인 은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겸손 등을 변호하는 방편으로, 선택된 자만이 응답할 수 있다는 이중 예정론만을 고집한 것은 복음적 예정론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중 예정론'이 아니더라도 구원과 관련하여 얼마든지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전적인 은혜를 말할 수 있다(이 점은 추후 거론할 입체적 구원론과 결부하여 이해할 때 비로소 그 참뜻을 알게 될 것이다).

#2. 칼뱅의 예정론이 갖는 본질적인 문제점

우리는 칼뱅의 예정론을 비판하면서 현실적인 문제 제기 정도가 아니라, 본질적 차원에서 이 예정론이 과연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느냐는 문제를 갖고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칼뱅의 예정론은 성경에서 보여 주는 복음적 예정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우선, 그의 예정론의 지향점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다음의 구절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영원한 선택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망을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거절하신다는, 이 대조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앞의 책 중권, 500쪽)

여기서 '영원한 선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칼뱅이 그의 예정론에서 언급하는 영원한 선택이란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어떤 자는 영생에, 어떤 자는 영멸에 처하도록 그 결말이 미리 정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기에 도중에 변경되는 것은 불가하다(앞의 책 중권, 513쪽).

칼뱅 주장대로라면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예정 계획에 따라 종국적으로 천국에 가기로 된 사람 중에 지옥 가거나, 지옥 가기로 된 사람 중에 천국(천당)에 갈 사람은 전혀 없게 된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렇게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어쩌지 못한다는 게 칼뱅 주장이다. 그의 예정론은 한 번 정해진 예정대로 결말을 봐야 한다는 그런 이론이다.

한 사람의 존재가 조성되기도 전에 이미 그의 운명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 결정되어 버린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선택과 유기를 떠나 이 얼마나 숨 막히고 두렵고 (칼뱅마저 인정했듯이) 무서운 교리인가.

칼뱅은 왜 이런 무시무시한 교리를 만들어 냈던 것일까. 칼뱅의 답은 이렇다. 이런 예정론만이 성경이 계시하는 바이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옹호하는 것이며, 이러한 선택과 유기(버림)의 극한 대조를 통해 하나님은 구원받는 자들에게 그 구원이 '인간의 선행(善行)'의 결과가 아닌 '당신의 은혜'로 된 일임을 극명하게 드러낸다고 보았다(앞의 책 중권, 제21장의 요지).

이 같은 이중 예정에 근거한 칼뱅의 운명론적 예정론은 그 누군가에게는 복음과는 정반대 상황, 곧 그 누구도 해결할 길 없는 '원천적 절망'을 가르치고 있다. 이 같은 칼뱅의 운명론적 예정 교리로는 기독교의 충만한 은혜의 장(場)인 복음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의 예정 교리가 칼뱅의 운명론적 예정론 행태를 고수한다면, 이 시대 기독교는 설 자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본래 기독교 진리와 복음이 절망하는 자들에게 희망을 전해 주는 것인데도 말이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 4:16)

#3. 세상의 영성을 교화하기에 역부족인 칼뱅의 예정론

우리에게는 양반과 상놈, 적자와 서자로 신분을 구분 짓고 차별하던 슬픈 역사가 있다. 태어나기도 전에 한 사람의 운명은 결정되었고, 그 결정된 운명대로 어떤 이들은 영광의 삶을, 어떤 이들은 절망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신분이 보장된 양반집 자제들은 온갖 추태를 부려도 그 신분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가도 상놈은 여전히 상놈 신분이다. 하늘이 조각나도 양반이 상놈 되는 법 없고, 상놈이 양반 되는 법 없었다. 일이 이쯤 되자 탐관오리가 들끓고, 변방의 오랑캐가 이 땅을 우습게 보고 넘나들었다.

이러한 부조리한 세상에서 차별 없는 세상을 세우려 한다며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그 역시 양반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재가한 여인의 몸에서 얻은 자식이라 서자 취급을 면치 못했다. 그가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꾼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 정신을 이은 제2대 교조 최시형의 말을 들어보라.

"사람은 한울이라 평등이요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인위(人爲)로써 귀천을 가리는 것은 곧 천의에 어긋나는 것이니 제군은 일체 귀천의 차별을 철폐하여 선사(先師)의 뜻을 잇기로 맹세하라." (한자경, <한국 철학의 맥>(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358쪽)

동학교도들이 꿈꾸던 차별 없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양반 자제여도 잘못하면 그 책임을 스스로 지는 세상, 아무리 천민이라도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양반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이었을 게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를 쥐고 태어난다"라는 자조 섞인 탄식이 있다. 이를 제대로 들어 보라. 대를 이은 기득권은 평생 이어진다. 이런 차별이 있는 현실에 개탄하는 젊은이들을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되레 우롱하는 지도층의 무책임한 막말과 추태가 범람하는 이때,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던지는 기독교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자유와 평등과 공의는 기독교 기본적 가치이다. 기독교는 근본 차별 없는 세상을 지향한다. 차별 없는 세상이란 하나님이 부여하신 천부인권(天賦人權)을 누리며, 같은 신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평등한 세상이다(차별 없는 세상이라 해서 개개인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가 어찌 동등한 삶을 누릴 수 있겠으며, 배운 자와 못 배운 자가 어찌 동등으로 하나 됨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차이가 없도록 강제(强制)하는 세상이 불평등한 세상일 것이다).

아무리 성실하고 부지런해도 극복할 수 없는 벽이 있고, 신분제도에 묶여 원천적으로 배울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다면 철폐되어야 마땅한 불평등한 사회제도가 아니겠는가.

칼뱅의 이중 예정 교리는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 사람의 구원 여부가 결정되고 만다는, 본질로부터의 원천적 차별을 강조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기독교의 진리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로마서 9:20-23절 말씀(토기장이의 비유)을 해석하면서, (이 말씀에 대한 성경의 바른 이해 대신에) 칼뱅의 예정교리로 인하여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 대한 원천적 차별쯤은 감내해야 할 일이다"라고 주장한다면 말이 되는 소린가. 이 같은 비성경적 해석이 신분 차별이 허용되던 칼뱅 당대에는 통했을지 모르나, 인권이 신장된 지금 세상에서는 통할 수 없는 논리 구조다.

솔직히 말해 보자. 칼뱅의 이러한 예정교리를 들이대면 요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 아니 우주 만물이 조성되기도 전부터 인간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믿으라고 강조한다면, 그들이 과연 이런 기독교의 가르침을 인정하고 따르기나 하겠는가. 그렇다고 성경 해석을 시류에 맞춰 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본래 성경이 보여 주는 복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본래부터 차별을 철폐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다(행 15:9, 롬 3:22, 10:12, 골 3:11, 약 2:4, 2:9).

칼뱅의 예정론이 그가 말하는 것처럼 '선택과 유기'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논리라고 치자. 그렇다면 그 예정론이 그 진가를 제대로 드러나기 위해 선택받은 자들 수가 특정한 사람들로 제한되어져야 하는가. 그의 주장대로라면 어쩌면 선택받은 자의 수가 적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풍성하고, 선택받은 자들의 겸손은 더욱 깊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드높이게 되는 논리 구조다. 이것만 보면, 과거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이방에 복음 증거하는 것을 훼방했던 유대인들이나, 지금도 최종 구원받을 자들 수를 14만 4,000명(계 7:4, 14:1, 3)으로 한정하고 자신들만 여기에 포함된다며 복음의 본질을 흐려 놓는 이단 무리의 주장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진정 우리 시대(신약의 세대) 가운데서도, 이미 창세전에 예정한 자들만 선택하시고 그들만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는가? 동시에 영멸하기로 예정된 자는 도무지 구원 대상조차 될 수 없는 일인가? 과연 성경이 말하는 예정론이 이러한 예정론인가.

칼뱅이 말하는 영생과 영멸이라는 이중 예정의 강조점 이면에는, 인간의 어떤 행위(악행이나 선행)로도 하나님의 예정을 변경하거나 막아서기에 무능력하고 역부족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적 예정론을 다루기에 앞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영생을 얻을 자로 예정되었다면 상관없겠지만, 설령 영멸당하도록 예정된 자라고 해서 그의 운명을 막아서게 할 아무런 방책이 없는 것인가. 인간의 선행(善行)으로 불가하다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피라면 어떨까. 칼뱅이 말하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비교할 수 없는 은혜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아버지(하나님)의 의지나 뜻과는 상관없는 아들(예수)의 독자적(獨自的) 행위였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이 복음적 예정론의 방향성을 설정해 준다(이에 대한 진전된 논의는 다음 편의 복음적 예정론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4. 구원 역사는 칼뱅의 예정론에 제한받지 않아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을 위한 의의 역사는, 특정한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차별적인 의의 역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공히 주시는 공정하고도 공평한 의(公義)의 역사다(행 15:8-9, 롬 3:22, 10:12, 골 3:11 등등).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롬 10:12)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 3:11)

자, 어떤가. 성경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의 역사를 선포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강조하는 칼뱅의 예정론이 과연 이러한 성경적 영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가. 이미 필자가 속한 교단(예장통합)을 비롯해 세계 교회들은 칼뱅의 운명론적 예정론을 수정하여 받아들이는 실정이다.

그러고 보면 이제라도 칼뱅의 예정론에 대해, 예수 복음의 시각에서 제대로 그 사실 여부를 따져 봐야 할 때가 됐다. 칼뱅은 자신의 예정론이 성경에 근거한다고 주장하지만, 필자로서는 성경 어디에서도 이런 칼뱅식 예정론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예수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칼뱅식 예정론은 구원을 이루는 복음의 능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칼뱅의 예정론은 신약성경(복음)과 그 지향점이 전혀 다르다. 오히려 구약의 시각(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을 반영한 예정론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칼뱅의 예정론이 갖는 치명적인 문제의 근원은, 구속사적 차원에서 예수의 초림을 분기점으로 하는 신약의 세대(선택)와 구약의 세대(유기)를 구분하지 못하고, 신약의 세대들에게도 선택과 유기의 틀을 같이(동일하게) 적용해 버린 데 있다. 그로 인해 '운명론적 예정론'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사실, 이런 칼뱅식 예정론을 예수 복음의 시각에서 진단해 볼 때, 하나님 영광 대신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교리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게 그의 예정 교리를 접하다 보면, 하나님은 오로지 당신의 절대주권과 영광을 위해 그 누군가를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해야 하는 이상한 존재로 둔갑하게 된다.

한편, 칼뱅식 예정론은 그 멸망 책임을 철저히 하나님께 돌리는 구조다. 그러고서야 하나님께서 예수 재림의 날에 그들을 대하여 심판할 자격이 있으시겠는가. 원천적으로 멸망하도록 정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 심판하신다? 맹신자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런 논리를 이해하려 하겠는가.

이처럼 한 가지(그것도 왜곡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의 영광)에 집착하다가 나머지 모든 것(복음의 능력과 제대로 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잃어버리는 것은 예수님 말씀과도 역행하는 처사다(마 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 5:29)

칼뱅은 자신의 예정론이 성경에 근거한 '독보적인 교리'라며 자부하고 있다(앞의 책 중권, 501쪽). 하지만 성경적 교리라면 성경의 논리 안에서 증거되고 통일되어야 하는데, 사실 칼뱅의 예정론에 대해서는 당대로부터 이미 수많은 성경적 비판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것으로도 칼뱅식 예정론이 성경의 다른 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 있는 교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칼뱅은 성경의 예정에 관한 말씀들을 언급하면서도(행 4:28; 롬 8:29-30; 고전 2:7; 갈 1:15, 엡 1:5, 9, 11, 3:11 등), 성경 속 예정론에 관한 일반 정서마저도 제대로 읽어 내질 못하고 있다. 예정론과는 잠시 비켜서 있는 서신서의 다른 말씀들을 살펴보자.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롬 11:21-22)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원 가지들로 비유하여 말하기를, 그 원가지도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이 그 원가지에 접붙임을 받은 우리(이방의) 그리스도인들을 -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때 – 찍어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경고하고 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칼뱅식 예정론을 인정하는 그 원주창자(原主唱者)가 맞는다면 바울은 여기서 결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예정받은 자라는 확신도 자긍심도 전혀 보여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뱅식 예정론자들은 이 성구(롬 11:22 "너도 찍힌 바 되리라")를 '그들도 결국은 찍힌 바 되도록 예정된 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 성구는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9:27)

바울은 그 귀한 예수 복음을 다른 이에게 전해 준 후에 정작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한다(고전 9:23-26)고 고백하고 있다. 칼뱅식 예정론에 따라 구원받은 자라는 확신이 없어서일까. 아니다. 그가 애당초 칼뱅식 예정론을 주창한 바 없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결코 '운명론적 예정'을 말하지 않는다.

복음적 예정론자들은,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하나님 뜻을 저버리고 다시금 죄 가운데서 사는 자들이 있을 수 있고(딤전 4:1-2), 그러한 자들이 회개하고 돌이키지 아니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 얼마든지 버림받을 수 있다는 성경 속 경고를 바울처럼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믿음의 바른 성찰과 고백이, 오늘 주어진 삶의 현장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근거를 제공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히 3:12-13)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 4:1-2)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히 6:4-8)

성경의 이러한 흐름은 성경이 칼뱅식 이중 예정론을 지지할 수 없는 논리 구조로 되어 있음을 보게 한다.

#5.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절대 자유를 전제(前提)

칼뱅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옹호하려 한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다만, 칼뱅 예정론의 문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려다가 하나님을 자기(칼뱅) 식의 예정론에 가두어 버리는 잘못을 범했다는 데 있다. 성경의 계시대로 하나님은 '절대주권자'다. 그러나 동시에 '절대 자유자'이기도 하다.

설령 어느 한 사람을 창세전에 영멸할 자로 예정했다 치자. 한 번 정하셨으니 하나님은 그 사람을 어쩌지 못하고 영멸하도록 내버려 둘 때라야만 절대주권자로서 권위가 세워지는가? 자유로운 하나님이 왜 칼뱅식 예정론 울타리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그 절대주권과 권위로, 영멸할 자를 상황에 따라 멸망의 자리에서 건져 주실 수도 있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라면 마땅히 그리하실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성경에 이르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으셨다(살후 1:8-9, 요 10:27-28, 행 2:38-41, 16:31, 9:23, 롬 1:16, 8:31-33 등등). 그래서 복음이다.

#6.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든 하신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고(행 2:38-41, 마 22:9,10) 의롭다 하시고,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다. 이 일을 두고 누가 시비를 걸 수 있단 말인가(롬 8:31-33). 이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자유로운 선택에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백성 아닌 자를 백성이라 할 자는 하나님이시다(롬 9:15-16). 죄인 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할 아무 권한이 없다(롬 9:14, 23).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절대주권'은 '절대 자유'를 전제로 할 때라야 빛을 발하게 된다. 하나님이 절대주권을 가지셨다면 온전한 자유함으로 그렇게 당신이 원하심을 따라 언제든 뜻을 돌이킬 수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성경이 강하게 설파하고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신 30: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욜 2:13-14)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욘 3:9-10)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1 1:9)

이렇듯 그 뜻을 돌이키심도 하나님의 절대 권한(주권)의 범주 안에 있다. 하나님은 본래가 자유로운 분이시다. 자유로운 하나님은 무엇이든 선하신 뜻 가운데 당신 원하는 대로 하실 수 있다. 욥은 이렇게 고백한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욥 42:2-3)

전에는 멸망의 자녀요, 저주받은 백성이요, 버려진 자들이었으나 이제는 구원받은 자녀요, 복 있는 자들이요, 다시 부름받은 자녀들이 되게 하셨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하에 있다.

"그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사 12:1)
"전에는 네가 버림을 당하며 미움을 당하였으므로 네게로 가는 자가 없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를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리니 네가 이방 나라들의 젖을 빨며 뭇 왕의 젖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사 60:15,16)

죄인 된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어도, 당신께서 그토록 기뻐하신(마 3:17, 17:5, 벧후 1:17)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얼마든지 죄인들에 대한 당신 뜻을 돌이킬 수 있다(계 1:5).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노여움을 푸셔서(살전 5:9, 엡 1:5) 우리와 화목하게 되었다(롬 5: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4)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 5:11)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롬 5:17)

우리도 다른 자들처럼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불러 주셨다.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시 106:45)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엡 2:3-5)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 2:25)

하나님이 멸하기로 준비한 진노의 그릇을, 이제 영광의 자리로 이끌어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신들 이 일에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롬 9:22~24). 아들을 내어 주기까지 하신 하나님께서 그 무엇인들 주시지 못하겠으며, 그 무엇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그 뜻을 돌이키심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서는 당신이 원하심을 따라 설령 영멸할 자라고 해도 얼마든지 부르실 수 있는 자유로운 분이시다(행 2:38-41, 마 22:9-10).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22-24)

어디 우리뿐이겠는가. 우리를 본보기 삼아 모든 자들을 향해서도 그렇게 얼마든지 부르고 계신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행 2:39-40)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딤전 1:13-17)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을 범주 안에서는 그 뜻을 얼마든지 돌이킬 수 있는 분이시다. 아니, 그렇게 함으로 더 큰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 43:7)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사 48:9)

#7. 칼뱅식 운명론적 예정론의 대안, 복음적 예정론

필자는 장로교회에서 나고 자란 신앙인으로 한동안 칼뱅 예정 교리 신봉자였다. 이 예정 교리의 오묘한 진리의 깊이를 누가 알겠느냐며 그것만이 가장 고상한 교리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목회자가 된 후로는, 더는 칼뱅식 예정론을 일반 교우들에게 가르칠 수가 없게 되었다. 본 글 앞머리에서도 언급했듯 이중예정에 근거한 칼뱅의 운명론적 예정론은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적 예정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복음적 예정론은, 칼뱅이 이중 예정론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의 영광,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고스란히 수용한다. 그러면서도 칼뱅의 예정론과는 격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 그뿐 아니라, 알미니우스가 칼뱅과 대립각을 세우며 그토록 지켜 내고자 했던, 성경에 근거하는 바 인간의 자유의지마저도 또 다른 차원에서 온전히 녹아 있는 그런 예정론이다. 복음적 예정론은 칼뱅의 예정론과 알미니우스의 자유의지론 모두를 포괄하면서도 상충(相衝)함이 없이 새롭게 융합하는 상위의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신 하나님은 성경의 말씀대로, '복음적 예정' 가운데서 가장 온전함으로 당신의 선하신 뜻(구원의 역사)을 이루고 계심을 우리로 보게 하신다. 다음번에 다룰 내용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적 예정론'이다.(계속)

김수원 / 태봉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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