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왕은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느니라." (잠 20:26)

지금 국가는 위기 국면이다. 크리스천들은 정치적으로 대통령 하야, 탄핵, 다양한 의견을 내고 있다. 이 기회를 더 근원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성경적 대안을 생각하는 발전과 도약의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복음주의 신앙은 기본적으로 정치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의 '전적 주권'(the sovereignty of God)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단 2:21)

기독교는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에 개혁을 시도할 때 성경의 원칙으로 돌아갔다. 오늘날 대통령 지위에 해당하는 '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성경 인물은 삼위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기 위한 사람들이었다. 모세, 여호수아, 요셉 등 모든 리더는 예수님의 예표였다. 사무엘의 왕, 선지자, 제사장의 삼중 직분도 예수님을 예표했다. 그 실체로 예수님이 오셨다.

다니엘은 조국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에 멸망당한 것이 하나님 징벌임을 알았다. 인간 세상의 정치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봤다. 그는 이 사실을 알았기에 조국을 멸망시킨 바벨론 제국을 위해 총리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나님 말씀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왕의 명령을 거역하기도 했다.

구약성경의 다니엘과 친구 세 명은 세속사 관점이 아닌 구속사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보았다. 성경의 정치관은 무엇인가. 통치자 중심 관점이 아니다. 그를 세우거나 폐하는 창조주 하나님,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서 봐야 한다.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왕이나 통치자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상 왕들은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거나 적대적일 수 있다. 이들은 종교를 내면적 자기 수양의 사적 영역으로 축소하고자 시도한다. 이것이 정교분리 정책이다. 구약은 대부분 국가의 정치사다. 선지자들 대부분은 왕권과 고위층에 대한 예언과 말씀을 선포했다. 기독교가 변질하면 구약보다는 신약 영성을 강조하거나 내세를 지향하게 된다.

그 결과, 교회는 정치에 냉소주의나 무관심을 보이게 되고, 이는 불의한 정치권력의 전횡이나 폭정으로 연결된다. 그 영향으로 정치적, 경제적 불의를 겪게 되거나 백성은 고통당한다. 하나님 통치와 주권이 희석되어 교회와 정치권력이 동시에 타락하거나 서로 견고성을 유지하고 왜곡·변질된 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한다. 서로가 공생하거나 부패하고 만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인들은 잘못된 정치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이나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외시하게 된다. 결국 부당한 정치나 체제나 질서에 저항이나 현실의 타개와 전망을 망각한다. 본질보다는 현상에 머물게 된다. 단지 내면의 일시적 고통을 덜거나 위안을 얻고자 교회를 찾게 되고, 기도나 개인 영성에 치중하는 관념적인 교리나 비성경적 신앙 행위에 매몰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가리키는 위정자들에 대한 선지자적 역할이나 부당한 권력의 피해자들,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라는 준엄한 명령을 위반하게 된다. 물론 기도는 중요한 신앙 수단이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사회, 경제적 이슈를 내면적 영성으로 회피하거나 대체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현실의 고통, 갈등, 모순을 타파하거나 변혁하는 일을 회피하는 현실도피처가 아니다. 이렇게 내면세계나 내세주의로 개인들을 몰아가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체제 순응적 태도, 역기능을 가리켜 마르크스는 '인민의 아편'적 기능이라고 지적했다. 반면에 국가 사회에서 기독교의 순기능을 강조한 막스 베버는 '소금과 빛'의 역할로 보았다. 우리가 아는 복음은 죄인과 죄악으로 왜곡된 세계 구조를 변혁한다.

공평과 정의, 사랑과 평화의 나라

하나님나라 신앙은 내면의 거룩, 개인의 연단, 안정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나라는 공평, 정의, 평화, 사랑의 나라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통치를 온전하게 받아, 그분의 본질인 '선'과 '그 의'를 추구하는 자들은 현실을 극복하고 이기게 된다.

세상 리더들은 누구나 한계가 있다. 성경의 인간론에 입각하여, 타락한 결과로 나타난 인간의 부패성이 정치적 또는 통치적 부패로 나타난다. 구속사적 정치관은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성경적 패러다임의 연속선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이다. 모든 신음하는 피조물, 기존 질서의 재구성이 성경의 종말론적 시각이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 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5)

현실 정치관에서 실천을 정당화하는 성경 기준은 어디까지나 '해석된 성경'이다.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다. 성경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하나님나라는 창조 때의 아름다운 질서가 회복되고, 또한 창조가 완성되는 상태로 설명하고 있다. 인간과 피조물의 관계와 피조물과 피조물의 관계의 파괴를 초래했지만, 구원은 분리되고 단절되었던 모든 것의 회복으로 나타난다. 구원은 종말론적 구속사 안에서의 은혜다.

"하나님은 친히 구원의 일뿐만 아니라 창조의 세계를 보존하시고 유지하시는 일에 관여하고 계신다." - 낸시 피어시

칼빈은 두 통치(교회, 정치)가 분리가 아니라 유기적인 관계임을 말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직접 참여가 아닌 성경 해석으로도 정치 영역에서 하나님 영광이 나타나도록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올바른 길(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현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먼저 성경 진리로 무장해야 하고 기도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영적 각성과 도덕성 회복은 물론이고 경건한 의식과 행위도 전제되어야 한다. 성경은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에 국가적 개혁을 시도할 때 성경의 원칙으로 돌아가 하나님 말씀으로 기준을 삼았다. 말씀을 듣는 영적 갱신으로부터 개혁 운동은 시작된다.

성경적 리더십의 핵심 원리

창조에서 시작해 타락과 구속 및 완성으로 진행되는 구원 역사에서 그 진행 과정과 구속사 흐름을 보면 성경적 리더십의 중요한 원리를 발견한다. 마침내 하나님의 섭리와 의도된 목적과 그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구심점의 전 과정이 '왕의 제도(kingship)'다. 구약성경은 왕들의 스토리다. 왕조 중심 역사관이다.

성경에는 중요한 3대 언약이 있다.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이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생명체를 다스리는' 역할과 사명을 부여했다고 한다. 이는 '문화 위임령'(창 1:28)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한 언약이며 규약으로 이해한다.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

엄밀하게 보면, 다스리고 섬기고 보존하고 창조적으로 잘 관리하라는 의미다. '언약'의 규약이 처음 등장한 성경 내용은 창세기 6장 18절이다. "그러나 내가 너와는 언약을 세우리니…", 언약의 체결을 언급한다. 창세기 문화 위임령을 근거로 한 언약의 재가와 확증의 의미로 해석된다.

인간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 관계였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으로 동산에서 추방당해 언약 관계가 파기되고 흐려졌다.

본래 신분과 사명대로라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로, '왕적 수행'을 통해 모든 만물을 대리 통치해야 했다. 비록 인간의 죄로 언약 관계는 파국으로 흘러갔지만 하나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고 다시금 생명체에 대한 지배 권한을 세워 주신다. 원래의 지위를 회복시켜주신 것이다. 이러한 구속의 경륜 안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와 언약(창 12:1; 15;18; 17:8)을 맺으셨다. '복'의 근원 아브라함의 지위를 부여해 주신다. 땅과 후손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약속을 하신다. 이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 이미 '칭의' 개념이 내재되어 나타난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는 구절에서 '이신칭의' 개념을 언급했다.

인간은 죄인이다. 거듭나도 위치나 신분상 의인이지, 실제적로나 상태적으로 완전한 의인이 아니기에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인간은 의지의 대상이 아닌 사랑과 이해, 용서 대상이다. 의지할 분은 오직 삼위 하나님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고,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는 표현처럼 좋은 땅을 주시겠다고 한다. 그리고 큰 민족이 이루어지고(창 12:2),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죄와 타락에서 이를 극복할 후손, 왕의 출현을 예고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착으로 현실화된다.

모세 언약은 출애굽 시대 리더였던 모세를 민족 해방의 지도자로 세우겠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스라엘을 애굽의 430년 동안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언약이다. 의는 하나님과 인간, 쌍방이 성실하게 이행해야 하는 조건이다.

하나님나라 복음은 구약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구속사를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다. 사람은 죄로부터의 정화와 영적 거룩으로 하나님과의 '의'를 지키기 위해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왕정의 폐해 염려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 시에도 모든 가나안 족속을 멸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들과의 전쟁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왕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의 정치 질서에 비해 늦은 시점에 왕이 등장한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이 성경 본문 핵심 단어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스라엘 왕', 다른 하나는 '자기 소견'. 사사기에 이 말이 기록된 배경을 먼저 알아야 한다.

창세기 아브라함 언약과 출애굽 후 광야에서 받은 '모세율법'을 통해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신정정치를 이해해야 한다. 신명기 왕의 법전에 의하면, 이스라엘 왕은 철저히 모세율법에 따라 백성들을 다스려야 한다. 신본주의적 왕의 위상(신 17:18-20)과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 이후, 다윗 왕조가 등장한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는 '언약'이 선포된다. 다윗은 실수나 허물이 많았지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다. 아래는 신앙과 삶,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다윗의 신앙고백이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대상 29:11-12)

성경은 66권이다. 구약은 39권, 신약은 27권으로 되어 있다. 구약성경 역사를 보면 국가를 다스리는 왕정시대의 유래와 그 흐름을 통해 국가와 리더의 관계를 알 수가 있다. 국가 형태가 갖춰지기 전 하나님 통치 시대인 원역사와 아담이 있던 창조 시대 이후,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이 있던 족장 시대, 모세가 있던 출애굽 시대, 광야 시대, 정복 시대, 사사 시대로 이어진다.

이때 백성이 하나님께 이스라엘 왕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왕정의 폐해를 염려하시나 백성들 요구를 들어주신다. 하나님 뜻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지시적인 뜻과 허용적인 뜻이 있다.

사사 시대 신정정치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여 살면 그만이었다. 가장 이상적인 신정국가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신정정치를 누리고 살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사사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음 의식이 행해졌고, 사울 왕이 최초로 세워진다. 기름부음을 받는 자는 제사장, 선지자, 왕, 이렇게 세 직분이다.

하나님나라를 위한 영적 전투

이스라엘 왕은 반드시 선지자가 기름을 부어야만 왕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왕정 시대다. 사울 왕, 다윗 왕을 지나 솔로몬에서 남과 북으로 분열된다. 그리고 이방 국가의 침략과 패망으로 포로 시대로 들어간다. 이후 다시 국가가 회복되기에 이른다. 회복, 이방 민족 침입과 혼란, 일시적 평화의 시대를 교차하면서 신약으로 이어진다.

창조부터 도도히 진행되는 구속사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정점에 이른다. 결국 구약 모든 왕은 하나님 언약 안에서 통치권을 행사했으나 온전치 못한 역사였다. 백성은 물론이고 왕들도 하나님 언약과 사명을 망각하거나 반역했다. 권력 남용과 불순종, 타락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결국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부여된 그 권세를 온전하게 사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인간의 반역과 자기 한계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안에서 극복되고 마침내 하님과의 온전한 지위와 신분이 회복되는 길, 오직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왕이요, 영원한 구원자라는 것을 드러나게 해 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아버지 뜻을 다 이루셨다. 마지막으로 선언하신다. "다 이루었다."(요 19:3) 이것이 지상의 참된 리더의 길이요 하나님의 대리 통치 원리인 권세와 왕적 지위와 다스림의 길이다. 이 언약적 사랑이 진리와 의와 함께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진리가 없으면 사랑이 온전치 못하다. 의가 없으면 불완전한 화평이다. 서로 대립하고 충돌한다. 결과적으로 사랑은 진리를 요구하며 화평은 의에 의존한다.(시 85:10-1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재림까지,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기 위해 영적 전투를 치러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교회에서나 신학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영적 전쟁'이란 말은 오류다. 성경에는 영적 전쟁이나 영적 전투라는 단어는 없다. 다만 '싸움'이라는 단어가 영적 전쟁으로 표현됐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정사와 권세, 정치권력에서 비롯되는 모든 사건들 배후에 영적 실체가 있다는 말씀이다. '영적 전쟁'이라는 말보다는 '영적 전투'가 올바른 표현이다. 전쟁과 전투는 국가의 패망이나 존망을 좌우한다. 전투는 국지전이나 전쟁은 전면전을 말한다. 2차 대전 때 초반에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연합군이 최후 전쟁에는 승리한 경우가 그 예다. 작은 전투에서 져도 전쟁에서 승리하면 이기게 된다. 이미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전쟁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셨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도래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긴장 관계에 있다. 승리의 최종 선언만 남았다. 우리는 날마다 영적 전투를 한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이미 이겨 놓은 상태에서 다만 전투를 치르는 것이다. 예수님 권세에 힘입어, 삼위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해서. 말씀과 성령의 역사, 믿음과 기도로.

황준배 / <카리스마적 리더십>, <통일과 크리스천 리더십>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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