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성경 윤리> / 알렌 버히 지음 / 김경진 옮김 / 솔로몬 펴냄 / 408쪽 / 1만 8,000원

알렌 버히 박사는 미시간 그랜드래피즈에서 출생하여 칼빈대학과 칼빈신학교에서 공부한 개혁파(Christian Reformed) 목회자요, 이후 예일대학에서 윤리학과 신약신학을 전공한 보기 드문 신약윤리학자이다. 홀랜드의 호프칼리지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다가 말년에는 듀크에서 가르치고 2014년에 소천하신 명망 있는 개혁파 신학자였다.

그가 자신의 두 전공 분야를 살려 완성한 책 <신약성경 윤리>(솔로몬)는 <The Great Reversal: Ethics and New Testament>라는 제목으로 1984년에 나온 이 분야 고전과 같은 책이다. 성경 윤리는 모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한국교회는 이제 '무엇을 믿느냐'(what to believe) 논쟁에서 '어떻게 믿느냐'(how to believe) 논쟁으로 흘러가고 있다. 한마디로 올바른 성경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알렌 버히 <신약성경 윤리>는 이 점에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단지 윤리학적 이론에 기초한 윤리가 아닌 구주 예수께서 가르치신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나라 윤리를 고스란히 제시하고 있다. 교회는 언제나 도덕적 지침을 얻기 위해 예수의 가르침에 의존해 왔다. 이 점에서 신약 백성의 윤리를 제시하는 가장 최적의 출발점은 복음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 핵심은 무엇일까? 예수의 공생애 사역 첫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유대적 배경(특히 묵시문학)에서 비추어 볼 때,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인간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최후 심판과 최종적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위였다. 하나님은 세계를 파괴하고 쇄신하신다. 이제 구약에서 예언하던 그 하나님나라가 예수 안에서 성취가 되었다.

예수는 더 이상 미래적 하나님나라를 천명하지 않는다. 그는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여 주었다(눅10:18). 하나님 주권(다스림)의 현재적 영향력을 강조하며 그의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훈계했다(막 13:33, 35, 37). 하나님 통치와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을 드러냈다. 이미 예수의 말씀의 "권위" 속에서, 그리고 기적과 가르침들 속에서 나타내었다(막 1:21-28).

예수로 인하여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요구한 윤리는 무엇이었을까. 분명 예수는 어떤 새로운 질서로 나아가는 점진적, 진보적 낙관주의자는 아니었다. 인간 행위를 무익하고 보잘 것 없게 보는 광신적 묵시론자도 아니었다. 예수의 요구는 능력으로 나타난 하나님나라에 대한 긴박한 응답의 요구였다. 때문에 예수의 윤리에 관한 첫째 되고 근본적인 명제는, 응답(response)이었다. 임박해 있으면서 그 능력을 이미 보이고 있는 하나님의 묵시적인 행위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어떤 식으로 응답해야 할까? 어떠한 응답의 윤리를 요구하시는가?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현시대의 "대반전"(a great reversal)을 기대한다. 그것은 매우 사회적이며 개인적이면서 혁신적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나라의 복은 전통적으로 그것을 가장 받을 것 같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약속된다.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우는 자, 멸시받는 자들(눅 6:20-22; 마 5:1-12; 눅 16:25)이었다.

반면 하나님나라의 저주는 부자와 그 명성을 즐기는 무사태평한 자들(눅 6:20-26)에게 임한다. 종교와 그들의 율법 지식을 자신과 자기의 경건한 명성과 금전적 이익만을 위해 사용하고 주장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마 23:13-36; 눅 11:42-52; 막 12:38-40; 눅 6:32-35; 마 6:16-18)에게 임한다고 선포되었다.

하나님나라는 가치 전환을 요구한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막 10:31) 이 구절에 따르면, 회당의 상석에 앉기를 고집한 랍비나(눅 11:43) 현시대 위정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악한 시대에 속한 자들임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예수를 통해 소외된 자들에게 복이 임하기 시작한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눅 7:22)

예수는 여자들과 공공연히 대화하며, 아이들을 용납하고 축복하며, 사마리아인들과 대화하며,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 교제를 가지며, "죄인들의 친구"로 알려진다(마 11:19; 눅 7:34). 권력이나, 특혜, 관습적인 의로 무장한 사람들은 그의 곁에서 쫓겨나기 시작한다. 그는 집요하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도전에 응수하며, 이익을 위해 종교와 율법을 이용하는 지도자들을 책망한다.(막 11:15-17) 이미 종말론적 대반전은 예수 안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예수는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 7:23) 어떤 이들은 하나님나라가 가져온 가치의 반전과 구질서에 대한 파탄으로 인해 실족한다. 그들은 기꺼이 하나님나라의 대반전에 동참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음으로 그 복을 놓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특히 소외된 자들과 죄인들은 하나님나라와 예수의 사역 속에 나타난 그 통치를 환영한다. 그들은 회개하고 복을 받는 것이다.

예수의 일관된 윤리적 명령 첫 번째는 "모든 사람의 나중이 되라"는 것이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 예수의 우리를 향한 제일 명령은 겸손한 섬김이다. 그 섬김의 본질은 자기의 권리와 특권을 주장하지 않고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하여 타인(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예수에게 자신을 따른다는 것은 사회적 지위와 관습상의 권리와 특전을 기꺼이 포기하고 섬기는 것이다. 특히, 이미 특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과 그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그 특권을 거절해야 한다. 랍비나, 아비, 지도자로 칭함받기를 거절해야 하며(마 23:8-10) 상석을 차지하려 하지 말고(눅 14:7-11) 오히려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눅 4:13, 21)을 후대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따라 대반전의 삶을 사는 자들에게 주시는 예수의 두 번째 윤리 강령은 "염려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재물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와 안전에 대한 포기는 하나님 나라의 "대반전"의 일부이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임하며(눅 6:20) 부자들에게 심판이 임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이다(눅 6:24).

많은 사람이 "하나님나라와 의"를 단순히 복음 전도, 교세 확장의 의미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마태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기존의 세상적 가치관과 질서를 초월한(역전하는) 하나님나라 윤리인 것이다.

마태가 이야기했던 '그의 의'는 세상적 불의와 도덕적 문란(amoral)에 대한 도전적 의미로서의 도덕적 '의'(righteousness)였다. 마태에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예수 안에서 요구되어지는 새로운 가치관,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수준 높은 도덕적 의를 성취하라는 의미다.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이며 하나님의 요구인 것이다.

이 세상을 살면서도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여 염려하지 않고 도리어 힘써 구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일관되게 명하신 명령이다.

재물에 대한 염려 없는 태도는 곧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구제로 나타난다. 구체적인 명령은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눅 12:33)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자기 희생적으로 후하게 돕는, 그것이 하나님나라 통치에 환영하는 반응이다["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눅 19:9)].

이같이 하나님나라를 환영하며 자기 희생적 구제에 동참하는 방법에는,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목마른 자들을 마시우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벗은 자를 입히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을 찾아보는 것 등(마 25:31-46)이 포함된다. 결국 "재물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너그러운 배려로 나타날 것이다.

너그러운 배려는 여자와 아이들에게 나타나야 한다. 1세기 팔레스타인의 인습적인 여성 멸시의 배경에서 볼 때, 여인들을 향한 예수의 행동은 진실로 "대반전"이다. 여성들과 공개적으로 대화를 나눔으로(요 4:1-26), 그들을 자기 제자 가운데 포함시켜(눅 8:1-3) 관습을 깨고 있다. 예수는 여자를 칭찬하며(막 12:1) 옹호한다(눅 7:39-40; 막 12:40).

당시 자존심 강한 랍비들은 이러한 일을 참을 수도, 참으려 하지 않았다. 여성들을 향한 예수의 다른 가치관과 행동은 여성들에게 기쁜 소식이었음이 분명하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끝까지 지켜보았던 이도 한결같이 여성들임을 복음서는 증거하고 있다.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과 새로운 여성의 역할 사이에서 갈등이 빚어졌을 때, 예수는 한 말씀으로 분별력을 제공하신다.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 10:42)

그 나라에서 여성의 새로운 자리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도래하는 나라는 여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무시받던 어린아이들에게도 기쁜 소식이다.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이 말씀 속에 전통적 약자들에 대한 하나님나라의 반전이 있다. 강자가 대접받고 약자가 무시받는 사회에 대한 반전이 담겨 있다. 사람들의 허영과, 의례, 권위에 대한 도전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곳이다. 여성의 지위가 빼앗기지 않고 어린아이들이 돌보아지며 사랑받는 것. 이것이 예수 안에서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통치다.

한국 기독교에 윤리가 부재하다는 비판이 있다. 단순히 한국교회 도덕성 문제로 국한해서 들으면 안 되겠다. 버히의 <신약성경 윤리>에 의하면, 한국교회는 예수의 복음이 가지고 온 "대역전의 윤리"(a great reversal)를 전혀 시행하고 있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현재 "하나님나라"를 구현하기보다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과 풍습을 따라가고, 세상의 다스림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는 않은지 - 급진적 사회 개혁 측면에서, 재물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가난한 자들과 여자와 아이들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 성찰하며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것이다.

이제 진정한 신약성경의 윤리, 하나님나라의 윤리다. 대반전의 윤리를 보여 주는 교회와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신동수 목사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시카고 한미장로교회 영어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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