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비리 사건을 호칭할 때 꼭 붙이는 말 '게이트(gate)'. 1972년도 미국의 유명했던 워터게이트사건에서 유래했다. 어쩌면 흔하고 사소했던, '도청'이라는 선거판 정치 공작이 대통령 하야까지 이어진 것. 여러 가지 우연과 필연이 뒤얽힌 이 사건의 본질은, 거짓말이 꼬리에 꼬리를 이어가다 어느 순간 수습 불가의 지경에 이르렀다는 데 있었다.

대통령 입장에서, 창피를 무릅쓰고 "아이고. 선거하다 보니 뭐 이런 일이 다 있네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아랫 것들 혼쭐내겠습니다" 정도 말만 했으면 대략 수습 가능한 해프닝이었다. 대통령 닉슨은 그러지 못했다. 그만의 뜻은 아니었다. 닉슨을 보좌해 온 당대 백악관 최측근들의 완전범죄에 대한 허망한 믿음도 한몫했더랬다.

그들은 닉슨과 함께 누려 온 드높은 권력의 맛에 취해 살았다. 이자들이 누려 온 권세는 왠만한 소국 대통령보다 높았다. 전화 한 통화면 언제 어디서든 20분 안에 출발 가능한 비행기가 준비됐다. 미국 내 박물관, 미술관에 전시된 어떤 작품도 임대 형식으로 자기 사무실에 걸어놓을 수 있었다. 권력을 놓칠까 겁에 질린 백악관은 권한을 동원해 각종의 거짓말, 변명, 은폐를 늘어놓았다.

우리 귀에도 친숙한 <워싱턴 포스트>의 '칼 번스타인' 같은 명기자들이 뻥뻥 매일같이 특종을 터뜨렸다. 여론에 떠밀린 경찰국 FBI가 조사에 들어가면, 대통령은 CIA를 동원해 조사를 방해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특별검사 취조 앞에 18일 만에 붕괴된 천재들의 말 맞춤

의회는 워터게이트특별위원회를 설립해 백악관 직원들을 소환 조사하기 시작했다. '사악한 천재', '더러운 협잡꾼'이라 불리던 찰스 콜슨(Charles Colson) 대통령특별보좌관을 비롯한 백악관 비밀전략팀은 특별 검사의 조사를 앞두고 말을 맞추고 법률적 대비를 시작했다. 준비는 완벽해 보였다. 미국 최고 대학 출신의 이 천재 변호사 출신 보좌관들은, 풋내기 특별검사를 혀 안의 사탕처럼 마음껏 휘감을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단 18일 만에 드러났다. 법률 천재들의 조작은 특별검사의 취조 앞에 낱낱이 드러났다. 당황한 대통령은 특별검사를 해임해 버리라고 법무장관에게 요구했으나, 장관은 이를 거부하고 사임했다. 흥분한 대통령이 차관에게 대신 지시하자, 차관도 사임했다. 민심이 극도로 험악해지자 닉슨 대통령은 노상에서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I am not a crook)"라는 유명한 호소를 했지만, 국민들은 마음에서 이미 대통령을 '사기꾼'으로 단정해 버린 상태였다.

결국 대통령은 초라하게 하야했다. 찰스 콜슨을 비롯한 백악관 수뇌부들은 중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갔다. 한 시대를 수놓은 이 정치 게이트는 무수한 뒷말을 남긴 '역사적 기록'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 인간의 삶이 완전히 뒤바뀐 실존적 경험이기도 했다. 워터게이트사건 주범이자, 워싱턴 정가에서 '악랄한 천재', '더러운 속임수의 달인'라 불리던 악명 높은 찰스 콜슨의 삶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 계기였다.

과거 그의 원수 같던 야당 지도자들은 감옥에 있는 콜슨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수를 믿지 않는 자였으나, 감옥에 있는 동안 사랑했던 가족들을 잃고, 미국 최고 지도자 그룹에서 밑바닥 제소자로 추락하는 경험을 했다. 그는 삶을 다시 돌이키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새 소망을 빚으며 살게 되었다.

콜슨은 옥중에서 기독 신자가 되었다. 허망한 정치적 욕망으로 들끓던 악명 높은 명망가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새 삶을 다짐하게 되었다. 출소 이후 콜슨은 목회자가 되어 평생 감옥의 제소자들을 돕고, 복음을 전하는 보드라운 홑이불 같은 경건한 이가 되었다.

2012년 향년 80세를 일기로 숨진, 과거 '더러운 거짓의 정치 달인'은 '제소자들의 전도자'로, 미국 사회 가장 영향력있는 복음주의자로 기억되게 되었다.

거짓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생전에 콜슨은 그의 신앙 자서전에서 천재 변호사들의 만반의 음모와 전략들이 왜 풋내기 특별검사에게 보름 만에 무너졌는지 통찰하듯 고백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이 바로 '거짓말'이었기 때문. 거짓말은 결코 가려지고 덮여지지 않는다는 것. 거짓의 풍경화에 어떤 흰색 도료를 덧칠하든 결국 어둑한 진실은 드러나고야 말았다. 당대의 천재 변호사도, 최고의 권력자도, 음모와 협잡의 달인도, 결국 거짓말로 도탑게 쌓인 둔덕은 무너지고야 만다.

콜슨과 그의 동료들이 지켜야 했던 것은 진리가 아니었다. 특별검사와 특별조사위원회 앞에 지키려 했던 건 달콤한 이문이었고, 세상을 쥐락펴락하며 맘에 안 드는 인간을 신나게 쥐어박을 수 있는 권력이었다. 겨우 그따위 것들이 제대로 지켜질 리 없었다.

요 며칠, 우리는 궁지에 몰린 권력자들이 벌이는 말의 향연을 먹먹히 듣고 있다. '몰랐다', '아니다', '통화도 안 해 본 사람이다', '누군지도 모른다', '내가 안 했다', '나는 시킨 대로만 했을 뿐이다'. 그 외침이 너무 절박해 언뜻 솔깃하여 진짜인가 싶지만, 결국 몇 시간이면 들킬 거짓말들이다. 거짓말을 덮으려 더한 거짓말이 동원되고, 음모와 협잡이 반듯한 청기와 아래, 그리스식 기둥으로 둘러쌓인 근엄한 여의도의 법의 사원 아래를 떠돌고 있다. 어차피 아스라이 부서질 것들. 결국 낯뜨겁게 다 드러날 것들.

지금 이 순간도 범행에 가담한 권력자들은 요사스럽고 기이한 술책을 살피며, 법률적 빈틈을 살피며 단죄를 우회할 방안을 살피고 있을 터. 글쎄, 고인이 되신 콜슨 목사의 담담한 고백과 같이 아마 잘 안될 거다.

그저 세상의 허망한 풍파를 바라보며, 담담하며 또 한편으로 다소 울적할 뿐. 하늘 아래 하찮고 작은 정치와 권세를 욕망해 온 어떤 삶들. 그것이 높아져 봤자 얼마나 드높겠으며, 권세라고 해 봤자 그 영혼의 허기와 하자를 고치기에 단 한 스푼이라도 기여할 수 있겠는가.

이 땅 위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비극적 낙관

나는 이 일을 통하여 악이 단죄받는 순리를 바라는 것을 넘어, 이 청와대발 게이트에 연루된 이들이 부디 콜슨 목사의 삶과 같이 하나님 앞으로 귀의하며 실존을 돌이키는 은총을 경험하길 바랄 뿐이다. 내가 아는, 한때 몹시 촉망받던 어느 정치가께서도, 정치가 시절의 온갖 추문과 협잡과 부조리에 경악하시고, 지금은 과거의 허망한 영광을 버리고 재야의 조용한 목회자로 살고 있다. 그의 삶을 축복하고 싶다.

거짓이 진리 앞에 그 초라한 낯을 힘없이 드러내며, 온 국토에 생중계되는 지금. 과거 기독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비극적 낙관'이라는 역설적 개념을 말한 바 있다. 불행의 궁극이 선한 희망으로 귀결될 거라는 존재론적 의지의 낙관이다. 한철의 권세, 그게 뭐라고. 고개 뻣뻣이 들고 창공을 향하던 이카루스 날개의 아교풀이 녹는 지금. 나는 그럼에도 프랭클의 고백처럼, 이 무수한 거짓들 속에 진리가 조심스럽고 소담스레 낯을 드러내는 희망을 낙관해 보고 싶다.

영원 아래의 삶이란 무수한 비극으로 점철하여 있으나, 그럼에도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낙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이 신자의 세상살이란.

배재희 / 현직 특수교사이며 남양주에 위치한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소속 온생명교회를 출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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