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영훈 대표회장)은 짧은 기간 안에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현안에 대한 시국 성명을 두 차례나 발표했다. '개헌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용단을 지지한다'(10월 24일)라는 성명과 '시국 현안에 대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입장'(10월 27일)이라는 성명이다.

첫 번째 성명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10월 24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제안한 개헌 추진을 제안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시급히 발표되었고, 두 번째 성명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의 도움을 받아 국정을 농단했다는 사실을 직접 고백한 다음에 발표된 것이다.

한국교회에는 정치적 사안에 초연한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게 오랜 관행으로 여겨지고 있었는데, 차제에 한기총이 나서서 공식적으로 정치적인 입장을 밝힘으로써 오래된 터부를 깨뜨려 준 것에 환영하는 바이다. 이제는 자칭 한국 기독교를 대변한다는 한기총이 기독교인의 정치적 입장 표명을 자유롭게 하였으니, 각계각층 기독교인들의 다양한 응답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글도 그 응답의 일환이다.

우선 아래에서는 한기총의 성명서에 드러나는 한기총의 정치적 편향성에 대해서, 그 다음에는 이 성명서에 나타나는 영적 타락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기총의 첫 번째 성명은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제안이 나오자마자 이를 거의 앵무새처럼 반복했다는 것 외에 특별한 내용은 없다. 물론 한기총은 이 같은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제안과 이에 대한 지지 선언이, 당시 소위 '최순실 게이트'(엄밀히 말하자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지만)로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져 있던 박근혜 정부를 자칫 기사회생시켜 줄 수 있는 사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정치적 함의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정치적 입장을 표명했다면 더 문제다.

첫 번째 성명서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성명서다. 10월 25일 박 대통령은 90초짜리 기자회견에서 연설문뿐 아니라 국가 기밀이 포함된 기타 문건들을 최순실에게 넘겨주어 검토하게 했다고 직접 밝혔다. 그럼에도 한기총은 소위 이 최순실 "의혹"으로 "국정 공백"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면서 개헌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은 박 대통령 본인이 이미 '사실'로 확인해 준 사안을 '의혹'으로 축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사자 입장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오늘 대한민국은 국정 공백이 우려될 상황인 것이 아니라, 이미 헌법과 법률에 정한 절차를 거쳐 민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국정이 두 사람에 의해 이미 공동화되어 버린 상황이다.

국정 공백은 개헌 논의를 못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자격도 없는 이들이 -심지어는 사이비 종파 교주의 딸을 중심으로 한- 사적 관계망을 거쳐 단지 연설문 정도가 아니라, 정부 인사, 국가 사업, 교육 시스템, 심지어는 대북 관계 및 외교 등 대한민국 전 영역을 광범위하게 파괴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 대다수 시민은 박근혜-최순실 두 사람에 의해 국가 시스템 자체가 이미 철저히 붕괴되어 버렸다는 것에, 그뿐 아니라 민주주의 기본 근간 자체가 파괴되고 국민의 주권이 짓밟혔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절망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도 한기총은 반복적인 성명서 정치로 대다수 시민의 열망을 짓밟고, 기껏해야 박근혜 정부와 여당에게만 도움이 될 뿐인 개헌 논의의 불씨를 살리려 하고 있다. 이처럼 맹목적으로 대통령과 정부 여당을 지지하는 것만이 국정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한기총은 과연 자신들이 평소 증오해 마지않는 북한의 김정은과 그를 옹위하는 무리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한기총의 성명서는 국정을 농단한 당사자들을 옹호하고자 하는 의도로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영적 빈곤과 궁핍함을, 그리고 자신들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에 철저히 반하는 영적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다.

한기총의 두 번째 성명에 의하면, 우리 사회는 "일자리 창출을 통한 경제 회복", "지속적으로 성장 가능한 기반"을 다져야 할 것 등 시급한 과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사회"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체제,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개헌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 같은 한기총의 현실 인식은, 우선 어째서 개헌이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지 논리적 설명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허구이고 거짓이다. 개헌을 하면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말인가? 개헌을 하면 갑자기 부부들이 애를 낳기 시작한단 말인가? 개헌하면 노인들이 젊어지기라도 하나? 더 나아가서 이 같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현실 분석은 오늘날 '헬조선'이라 불리는 한국 사회에서 소외되고, 절망하며, 배제된 채 살아가는 이들의 눈물을 단 한 줄도 반영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 과연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뿐인가?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맘몬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우리가 읽는 신구약 성서 여기저기에서 하나님은 약자를 보호하고 돌보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 줄 것을 명령하시지 않는가?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경제성장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왜 저들은 그다지도 집요하게 더 많은 돈을, 더 지속적으로 버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가?

한기총의 영성은 모든 이의 눈물을 닦아 주고자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성령의 공동체의 영성이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세상 주권자들의 영성이고, 바알과 아세라, 맘몬의 영성일 뿐이다.

한기총은 자신들이 원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자신들의 보수 기득권 지향적인 정치적 입장을 드러낼 것이다. 민주주의국가에서 막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기총의 성명서를 당연시하는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되새겨 보아야 한다. 가진 자들과 권력자들에 빌붙어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되새기던 시절은 지나갔다.

2016년 10월, 무수히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신학생들이, 목회자들이, 그리고 신학자들이 무너진 이 땅의 민주주의를 되살리고, 필요하다면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겸손히 고난의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고 고통당하는 자들과 연대하는 일들을 해 나가고자 일어서고 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우리 사회를 새롭게 갱신해 나가시리라 믿는다. 나아가 왜곡되고 뒤틀린 우리의 영성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성으로 변화되어 가는 새로운 길이 시작될 것이다.

이용주 /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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