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구절이 있다. 로마서 13장. 

"권위에 복종하고 위정자에게 충성하라."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오랜 기간 불문율처럼 내려와 현재 한국교회를, 크리스천 청년들을 극도로 보수적으로 만든 구절이다. 교회는 두 가지 면에서 언제나 이중적이었다. 첫째, 세상을 변혁하라. 둘째, 정치에는 관심 갖지 말라. 다시 두 가지 면에서 또한 이중적이었다. 첫째, 위정자를 위해 기도하라. 둘째, 보수 정권를 지지하라.

기묘한 구조가 오랜 시간 자리 잡혀 왔다. 근대 시민 사회에서 정치적 권리는 국민에게 있다. 이것이 기본인데 비정치적일 수 있는가? 정치적이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다시, 왜 권력자들을 위해 기도만 해야 하는가? 기도만 하면 그들이 정말 회개하여 좋은 정치를 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실제로는 이런 식으로 비판 정신을 잃고 권력에 순응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기르라는 말 아닌가.

또 하나의 이중적인 태도.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비정치적이길 강요하는 주체는 목사들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며, 보수적이며, 때로는 극우적이지 않았던가. 누가 정치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가. 누가 교회 안에서 나누어지는 이야기 중 친정부적인 발언을 많이 하며, 누가 설교권을 악용하여 성도들에게 일방적인 정치 성향을 주입하는가.

뭐 그렇다 치자. 신학적, 성경적 논박을 해도 조금도 바뀌지 않는 것이 한국교회 문화 아니던가. 그런데 심각한 한계 상황이 왔다. 로마서 13장 말씀은 작금의 박근혜 정권에게도 유효한가? 권력을 사유화하고, 모든 것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이 현실에 한국교회 불문율은 유효한가?

현실에 어떤 태도를 지니느냐 이전에 정치적 판단 자체에 대한 요구가 목전까지 밀어닥쳤다. 이 상황에서 모른 척한다든지, 본인 사역에 집중하겠다는 것은 누가 봐도 책임 회피다. 무책임하며 염치없는 모양새에 다름 아니다. 전혀 올바른 태도도 아니다. 로마서 13장이 무슨 근거로 성경 전체보다 우월성을 지닌단 말인가.

모세는 파라오와 싸웠다. 사무엘은 왕을 갈아 치웠다. 나단은 다윗의 범죄를 좌시하지 않았다. 만군의 여호와는 열왕의 범죄에 심판으로 응대하셨다. 신약은에서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두개인, 장로들과 정면충돌하셨다. 바울은 산헤드린과 충돌했다.

로마서 13장의 권면은 선교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바울과 사도 시대 당시의 지혜로움이다. 아무 데나 무턱대고 적용할 구절이 아니다. 본받는다면 바울의 지혜로운 선택과 사도들의 선을 이루고자 하는 집요한 노력을 본받아야 한다.

언제 개신교도가 이런 식으로 보수 우파가 되었던 적 있는가. 종교개혁에서 루터와 칼뱅이 보여 준 모습은 기본이다.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를 전복했고, 올리버 크롬웰은 절대군주 찰스 1세를 죽였다. 보편적 민주주의 권리를 외친 수평파나 디거파는 모두 독실한 청교도들 아닌가.

사회계약론을 주장할 때 존 로크나 토마스 페인은 모두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비판했다. 시민혁명의 중요한 자리에서 개신교도들은 언제나 책임을 다했다.

지금 한국 상황이 공산주의나 사회민주주의 혹은 아나키즘 같은 급진주의 수용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인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근간을 두고 벌어지는 국가 정체성 싸움 아닌가. 자유민주주의가 길게는 칼뱅의 귀족 민주주의와 관련이 있고, 무엇보다 영국혁명, 미국독립혁명 때 벌어진 주제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누구보다 더욱 격렬히 저항하며 대한민국 정체성을 위해 싸워야 할 사람들은 청교도 후예인 우리 개신교도 아닌가?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거나 오히려 박근혜 정부를 두둔한다면, 그토록 모멸적으로 부르는 중세 가톨릭이 하는 짓과 뭐가 다른가.

중세 사회 모순을 외면하고 오히려 세속 권력자와 결탁하고 그 대가로 면벌부 판매 수익을 올려 베드로대성당을 지었던 게 그때 아니었던가. 한기총과 한교연이 반나절도 못 간 박근혜발 개헌론에 누구보다 앞서서, 거의 유일하게 즉각적인 지지 성명을 발표한 것이야말로 이를 반증하는 단적인 모습 아닌가.

종교개혁가와 당대 청교도들 관점에서 보면, 최순실의 행태는 엘리 제사장 자녀들 모양새와 다를 바 없다. 비느하스는 창을 들어 이방 여인과 간음하는 동족 등에 꽂았다. 잔혹한 게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간절히 지키고자 했던 '하나님의 정의'와 신앙적 정체성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며 정의로우시기에, 용서도 하시고 구원도 하시지만 회개를 요구하시며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럴싸한 말로 죄를 용인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이야말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짓고 있는 자들 아닌가.

심용환 / 작가,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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