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 첫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광주지방법원 제3형사부(김영식·유병호 판사)는 10월 18일, 양심의자유를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조 아무개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조 씨는 작년 6월,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항소했다.

조 씨는 여호와의증인 신도로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막 12:31),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을 것이다"(사 2:4)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 어느 국가에 속해 전쟁을 연습하지 않고 하느님나라의 한 시민으로서 엄정 중립을 유지한다는 교리를 따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에서 "대체 복무 없이 군복무를 강요받는 것은 양심의자유가 억압되는 것이고 나의 인격과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존엄성이 무너지는 것이 된다"고 했다.

1심 광주지법 목포지원은 조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병역의무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국가 안전보장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국민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가 보장될 수 없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양심 실현의 자유가 이런 헌법적 법익보다 우월한 가치라고 할 수 없다"고 판단해 조 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 광주지법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첫 항소심 무죄판결이 나왔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1년 4개월 후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하고 조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문은 면밀하고 논리적으로 작성됐다. 지금부터 재판부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살펴본다.

국제적 인식 변화 발맞춰야…대체복무제 안 만든 국가 문제

먼저 세계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살폈다. 재판부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과한 국제 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자유권규약)을 언급했다. 대한민국은 자유권규약 선택 의정서에 가입했다. 자유권규약위원회(Human Right Committee)가 개인 통보 제도(Individual Communication)로 자유권규약 위반 여부를 심사할 권한을 부여하고, 위반 사실이 인정되면 구제 조치를 취하겠다는 약속이다.

자유권규약위원회는 2006년부터 한국에 양심적 병역거부로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된 사람들에게, 개인 통보를 통해 양심적 병역거부가 자유권규약 제18조에 의해 보호된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

하지만 한국 대법원은 "규약의 조문에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는 명문 규정이 없고, 규약 제정 과정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포함하자는 의견에 다른 국가들이 부정적이었으며, 개개 가입국이 양심적 병역거부권 및 대체복무제도를 인정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병역의무 자체를 거부하는 게 아니다. '집총'이 들어간 군사훈련에 반대하는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살아 있는 문서 이론'(The Living Instrument Doctrine), 즉 예전에 제정된 규약이라도 현시대 민주주의 국가 시대정신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방법론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유럽인권재판소는 2011년 자유권규약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도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외에도 2009년 발효된 유럽연합 기본권 헌장, 2013년 유엔인권이사회 결의 등 국제사회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대체복무제 실시를 권고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한국도 병역법에 따른 '입대하지 않아도 되는 정당한 사유'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포함하는 것이 국제사회와 발맞춰 나가는 것이라고 재판부는 설명했다.

국가는 신체 등위뿐 아니라 학력, 연령, 적성, 직업, 부양가족의 생계, 귀화, 북한 이탈 주민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구체적 병역을 처분한다. 그런데 유독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서는 집총 병역의무를 면제한 사회 복무를 마련해 주지 않고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한다. 재판부는 "이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며 이들의 대체 복무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 국민 간 실질적 형평을 기하는 일이라고 했다.

재판부는 헌법상 기본권과 국민의 의무 등 헌법적 가치가 충돌하고 대립하는 경우, 어느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충돌하는 가치를 모두 최대한 실현할 수 있는 '규범 조화적 해석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경우, 양심의자유와 국방의 의무가 잘 조화하고 실현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피고인은 병역의무의 완전한 면제나 특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자신의 종교 교리상 집총 병역의무를 이행할 수 없으니 대안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 대안을 찾아내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며, 세계 여러 나라의 경험상 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게 아닌데도, 국가는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중략)

비유하자면, 도로의 설계가 잘못되어서 다수가 이용하는 한 방향만 통행이 가능하고 소수가 이용하는 다른 방향은 그 이용이 불가능한데도, 국가는 도로의 잘못된 설계를 바로잡을 생각 없이 무조건 소수에게만 인내를 요구하거나 생각을 바꾸어 다수에 합류하라고만 하고 있다."

'병역기피' 늘어날 거라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한국은 북한과 대치 상황이기 때문에 국가 안보가 중요하다. 재판부는 2011년 헌법재판소 결정을 예로 들며 "결국 우려하는 바는 안보 상황 자체라기보다는 이념 대립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다. 과연 현재 국민 의식에 비추어 대체복무제 도입이 안보 상황을 악화할 것인지 의문이 있다. 오히려 대체복무제 도입은 다소 이견이 있다 하더라도 소수자 보호라는 헌법적 가치를 실현해 사회 통합을 공고히 하는 효과가 있다. 이런 성숙한 민주주의 역량을 토대로 도덕적·정치적 우위를 점해 국가 안보를 튼튼히 할 수 있다"고 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받아들이면 병역기피가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재판부는 국제사회에서 그런 예가 구체적으로 공론화한 적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최근 메르스나 대형 재난 사고에서 보는 것처럼, 재해 복구, 재난 방지, 의료, 소방 영역에서 이뤄지는 대체 복무가 결코 군 복무보다 편하다거나 더 안전하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대체 복무의 내용, 강도, 기간 설정 등을 통해 얼마든지 현역 복무와 등가성 있는 대체복무제도를 설계할 수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사회적 공감대도 형성됐다고 봤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올해 5월 국민 1,0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국민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보면서도(72%), 대체복무제 도입에는 찬성(70%)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7월 소속 변호사 1,29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가 양심의자유에 포함된다고 보는 견해가 74.7%, 대체복무제 도입 찬성 견해가 80.5%로 드러났다.

재판부는 다음과 같이 판결문을 마쳤다.

"일부 판사들은 두 차례 헌법재판소 결정이 있었는데도 연이어 위헌 제청을 신청하고 있고, 대법원이 전원합의체 판결까지 거쳐 유죄 의견을 밝혔는데도 하급심에서 무죄판결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단일 법 조항에 대한 일선 판사들의 이런 혼란은 사법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중략)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형 확정 후에 교도소로 보내져 일반적인 정역 의무를 부과받아야 함에도, 일률적으로 미결 수용소인 구치소에서 교도관의 행정 및 운영 업무를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사실상 병역의무 대신 대체 복무 또는 사회 복무를 이행하고 있는 셈이다.

피고인으로서는 대체 복무를 요구하면서 실정법을 어겼다고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국가는 대체 복무는 불필요하다고 하면서 막상 유죄를 선고한 후에는 사실상 대체 복무를 부과하는 이런 역설적 상황을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굳이 유죄 선고를 거쳐 전과자 신분으로 이런 의무를 담당하게 할 것이 아니라, 대체복무제도 도입으로 병역의무에 갈음해 떳떳하게 우리 공동체를 위하여 기여하고 이바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함이 마땅하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