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많이 올려다보아야 하늘을 보게 될까?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사람들의 통곡 소리를 듣게 될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이미 많은 이가 죽음을 당했음을 알게 될까? 친구여, 대답은 부는 바람 속에 있다네. 대답은 그 바람 속에 있어."

올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반전과 평화를 노래하는 가수 겸 음유시인, 미국의 대중가수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 가사다. 시공을 초월해 이 시대의 정치, 사회 현실에도 필요한 메시지를 던지는 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교회 절대다수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대해 침묵하고 외면할 때마다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 되는 기분이 드는지. 왜 부끄러움은 크리스천들의 몫이 되는 기분이 드는지.

한국의 현실을 보자. 대통령 주변 인물의 국정과 관련한 논란, '미르·K스포츠 의혹'과 전경련 관련 불법 모금 의혹, 권력형 부정과 비리, 국가 시스템의 붕괴, 미해결된 세월호 사건, 백남기 선생의 죽음에 대한 가족들의 억울함과 경찰의 강제 부검 시도, 시민들의 분노…. 참 암울한 정치적 현실이다. 한마디로 민주주의 역행과 위기다.

박근혜 정권은 이제라도 국정 전반에 걸쳐 한 점 의혹 없이 모든 것을 밝히고,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대의제 민주주의국가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는 길이다. 아니면 버림받는다.

백남기 선생 사인도 의사 다수가 인정하고 있으며, 22일 방송된 SBS '그것이알고싶다'에서 재연한 물대포의 가공할 파괴력을 보아도 '외인사'로 정정해야 한다. 그래서 가족들의 피맺힌 절규와 한을 풀어 주고, 관련자 처벌과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한다. 국가가 도의적으로 장례를 잘 치르도록 지원 협력해야 한다.

바라건대 국가는 사적 이익이 아닌 이 땅의 농민을 위해 헌신하다 숨진 백남기 선생을 '국가 의사자'로 예우해야 한다. 유족들에 위로와 배상 또한 해야 한다. 인간 존재 의미의 최후 보루인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짐승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

이번 이화여대 시위는 평화적이었기에 효과가 극대화되었고, 국민적 지지와 소기의 목적을 일차적으로 달성했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폭력적이고 과격한 시위를 할 이유도, 폭력적 진압도 사라지게 되고, 이 아픔이 민주 시민 의식과 국격을 높이는 전환점이 되리라 생각한다. 대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박근혜 정권이 잘 마무리되는 것이 국가적으로도 바람직한 방향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스토리이면서 왕과 사람들에 관한 내용이 중심이다. 한 나라에 선한 왕도 있었고, 국가에 평화가 임한 때도 있었다. 반면 불의한 정치권력, 전쟁과 폭정이나 압제와 이에 시달리고 고통받는 백성들, 사회적 약자 위에 군림하는 권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그 악한 권력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받았다는 사실도 엿볼 수 있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사 3:15)

성경은 말하기를 악이 그 악인을 죽인다고 하였다. 권력과 권위는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것으로 선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 글에서 언급할 아합 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은 그들의 권력과 권위를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게 사용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에 상응한 결과를 거두고 말았다. 이미 그러한 죄를 계속해서 짓고 있다는 자체가 악인이라는 증거이고,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이다.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시 125:5) 하시는 것도 중요한 심판이다.

성경적 정치관이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본 정치다. 하나님께서는 창조물마다 창조질서에 따라 최적의 위치를 부여하셨고, 그 관계를 아주 조화롭고 균형 있고 적확하게 하셨다. 이 측면에서 정치와 종교는 분리가 아닌 상호 보완적인 측면에서 구별의 성격을 띠고 있다. 궁극적으로 기독교 정치에는 '올바른 창조질서의 이행'이라는 사명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합(Ahab)과 이세벨(Jezebel)의 국가 폭력…권력 사유화와 인권유린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서 올바른 정치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스라엘 왕 중 대표적인 폭군이자 악한 왕이었던 아합. 그는 오므리 왕의 뒤를 이은 북이스라엘 제7대 왕이다. 22년간 통치했다. 당시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집'이라 부를 만큼,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북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최강자로 대두되었던 시기였다.

그는 화려한 상아 세공 제품을 만들고 궁전을 건축했으며 요새들을 세웠다. 아합이 이러한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 데는 페니키아 항구도시 중 하나인 시돈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 계기로 이방 여인 이세벨이 아합 왕에게 시집오게 된다. 시돈과 두로는 지중해 교역으로 부를 누리던 도시국가였다.

아합은 이세벨과 결혼 후,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 사당을 건축하고 바알을 위해 단을 쌓아 이스라엘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였다(왕상 16:31-32)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여 이스라엘이 이방 신을 따르는 전성기를 이루게 하였다. 그는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길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다(왕상 16:30-31).

요세푸스에 의하면, '엣 바알'(바알의 종이라는 뜻)은 바알과 아스다롯의 제사장을 겸임한 자로 그의 딸 이세벨을 통해 바알 신앙을 보급해 여호와 신앙을 말살하려는 계획을 품었다. 이세벨은 여호와 선지자들을 말살시키기 위한 살해 명령을 지시했다. 이 일은 아합의 묵인 내지는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세벨은 많은 선지자들을 죽였는데, 왕궁을 맡은 자 오바댜가 숨겨 둔 선지자 100명을 제외하고 이스라엘 거의 모든 선지자를 죽였다(왕상 18:4). 이때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극에 달했다. 바알 숭배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대결한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가 각각 450명과 400명이 되었다(왕상 18:19).

여로보암은 북왕국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숭배와 잘못된 정치 리더십으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했던 자였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군사 쿠데타로 세워진 정권이었다. 여로보암은 세겜을 수도로 정하고(왕상 12:25) 나라를 세운다.

이들은 여호와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 금송아지를 함께 섬겼다. 벧엘과 단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왕상 12:32-33), 레위인이 아닌 일반 백성으로 자원하는 사람들 중에서 제사장을 삼는다(왕상 12:31). 성경은 이러한 우상숭배를 "여로보암의 죄"라고 표현한다. 나라가 두 개로 분열되었을 때의 우상숭배를 말한다.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제사를 위해 남유다 예루살렘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 벧엘과 단에 산당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제사를 하게 했다. 이것이 대대로 전해지는 여로보암의 죄다. 이러한 왜곡되고 변질된 신앙 전통은 오므리 왕조의 아합 왕 때부터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북왕국은 솔로몬 아들 르호보암에 대한 반역으로 시작된 왕조였다.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쿠데타는 지속되었다.

여로보암이 세운 여로보암 왕조는 여로보암이 22년 만에 죽은 후(왕상 15:28), 그의 아들 나답이 2년간 왕위에 있다가 바아사의 쿠데타로 밀려난다. 바아사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되자 이번에는 시므리가 쿠데타를 일으킨다(왕상 16:8~20). 하지만 시므리의 쿠데타는 7일 천하로 막을 내린다. 시므리를 죽이고 왕이 된 오므리에 의해 오므리 왕조가 세워진다. 이 오므리의 아들이 바로 아합이다. 아합은 국가 최고 리더로서의 자질과 품성, 의지나 도덕적 능력이 대단히 취약했다.

그는 아내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모두 죽이는 일을 방관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과 인접한 이방 왕 시돈 왕, 엣 바알의 딸이었다. 그녀는 열렬한 바알 숭배자였다. 남편 아합으로 하여금 사마리아에 바알 산당을 짓고 단을 쌓게 하고, 또 아세라 목상을 세우게 했다(왕상 16:31-33). 권력을 업고 종교를 강요하는 것처럼 무서운 재앙은 없다.

권력은 힘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방향으로 흘러

이들은 여호와의 참선지자들은 배척하고 바알 선지자들을 의지했다. 이러한 죄로, 이스라엘에는 3년 6개월간의 가뭄이 찾아온다. 아합은, 하나님 뜻으로 경고하는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폄훼했다.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참신을 밝히기 위한 대결에서 승리하고, 백성들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모두 죽이고, 그때서야 하늘에서 비가 내렸음에도 아합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였다.

아합(Ahab)과 그의 아내였던 이세벨(Jezebel)의 국가 권력의 사유화, 전횡과 인권유린을 일삼았다. 이 정권에서 저지른 또 하나의 악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권력 남용과 약자의 사유재산 침탈이다. 바로 아합이 저지른 나봇의 포도원 탈취 사건이다. 나봇(Naboth, 뛰어난 사람)은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나봇의 포도원'은 아합 왕궁 인근에 위치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그 포도원 대지를 자기 소유로 삼으려 했다. 나봇에게, 다른 곳의 포도원과 바꾸든지 아니면 땅값을 지불할 테니 그 포도원을 양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나봇은 아합 왕의 요구를 거절했다. 나봇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나누어 준 하나님의 기업인,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팔 수 없었다. 하나님의 율법에서도 조상의 기업을 남에게 팔지 말라고 금하고 있었다.

이 일로 아합이 근심하게 되자 아내 이세벨이 궤계를 꾸며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위증했다. 그렇게 나봇을 장로와 귀인들 앞에서 돌로 쳐 살해했다. 이렇게 심판으로 처형된 시체는 방치되어 개가 그 피를 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작은 포도원을 갖고 싶다는 아합 개인의 욕심이 엄청난 죄악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권력은 그 힘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방향으로 흐르려는 속성을 가진다. 그것을 대항하는 자들에게는 폭력과 위협, 공포와 모략과 술수로 무력화한다. 이세벨은 거짓 증인 두 사람을 세워 하나님과 왕을 모욕했다며 나봇을 살해하고 포도밭을 몰수해 아합 소유로 만드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녀는 교활했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의지가 약한 왕과 권력에 굶주린, 파렴치하고 교활한 여인의 결합은 그야말로 최악의 조합이었고 국가적 비극이었다.

나봇의 포도원 탈취 사건은 권력형 비리, 권력형 폭력이고 권력형 살인이다. 막강한 절대 권력으로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재판을 조작하고, 모략과 거짓으로 살인까지 저질렀다. 악한 권력의 모습이다.

한 나라의 왕이 순진한 농부의 작은 포도원 하나를 갖지 못해 식음을 전폐하며 자리에 누웠다. 왕의 면모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이세벨의 부당한 지시에 굴복한 장로와 귀족의 동조는 또 어떠한가. 나봇은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 갔다.

변호 기회도 주지 않고 한 생명을 처단해 버린 이들은 모두 살인의 공범자들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아합 정권과 그 시대의 총체적인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반전의 역사가 있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알리신다.

악을 행하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

사람이 악을 행하고 있다면,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 심판의 결과다.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 형상을 본받아 선하게 살도록 지음받았기 때문. 그래서 악과는 공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세벨은 결국 왕의 권세가 하나님보다 더 높다는 교만과 망상으로 자신은 물론이고 남편 아합 왕마저도 죽음에 이르도록 했다. 그녀는 불세출의 요녀였다. 무고하게 흘린 피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은 결과였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임하셔서 그들에게 경고하신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고 예언하라고 하신다. 엘리야는 그 사실을 전하고 아합과 이세벨에 대한 통렬한 심판을 선포했다. 예언을 들은 아합은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했다.

아합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의 진노는 잠시 누그러진다. 그 재앙이 아합 아들의 때로 넘어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신다. 이러한 폭정과 종교 탄압 가운데서도 '남은 자'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시려는 모습을 보여 주신다. '남은 자'는 아합과 왕후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며 여호와 신앙을 말살하고 백성을 핍박할 때 굴속에 숨어서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섬긴 의인 7,000명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쟁과 고통과 죽음에서 하나님께서 살려 주셔서 구원하시고 하나님 뜻을 이루시고자 살아남아 있는 자를 의미한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시험과 고난과 시련을 견뎌 이기고 승리한 자들이다. 이렇게 아합과 이세벨의 결혼으로, 북이스라엘은 물론 남유다까지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선지자가 바로 엘리야다.

아합은 그 예언대로 아람 군대와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그 시신을 운반한 병거를 물에 씻을 때 개들이 그 피를 핥게 되었다. 그가 탄 수레에 피가 흥건하였고 피를 씻은 사마리아 못은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는데 개들이 그 피를 마셨다(왕상 22:30).

성경은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이 예후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나봇의 포도원에서 죽었다고 언급한다. 아합과 이세벨이 나봇을 모함해 돌로 쳐 죽인 장소다. 그곳에서 이세벨의 아들이 죽었다. 이세벨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한 보응을 하시려고 이세벨 아들 요람이 성인이 되고 왕이 될 때까지 기다리신 하나님은 무섭게 보응하는 분이다. 의인 나봇의 피 흘림을 절대 잊지 않으시고, 가장 무서운 방법으로 심판하셨다.

이세벨은 죽음을 앞두고도 자신을 치장했다.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악한 자들은 임박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회개치 않고, 외모를 치장해 내면의 죄악을 감추려고 한다.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왕하 9:30)

예후가 이를 보고서 "내편이 될 자가 누구냐"라고 소리치자, 함께 있던 내시가 이세벨을 창밖으로 던져 죽게 하였다. 그 피는 벽에 흘렀고, 개들이 사체를 먹어 두골과 발과 손바닥만 찾게 되었다. 개들이 시체를 먹고 조각은 거름 같이 밭에 버려 이세벨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하나님의 예언 그대로 모든 사건이 이루어졌다.

국가 지도자의 트라우마는 국가적 비극을 불러온다

아합은 이세벨에게 악행의 동기를 제공했고, 이세벨의 악한 계략을 알았지만 모르는 척했으며, 억울한 나봇의 죽음을 묵인한 채 포도원을 차지했다. 아합은 교묘하게 악행을 저질렀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악을 처벌하시고 가장 합당한 때에 처벌하신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죄인이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계속된 경고가 있었고, 용서와 구원에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음으로 멸망을 자초했다.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신 27:17)을 어기는 죄악인 동시에 의인을 억울하게 죽인 악행이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계 2:20)

계시록의 모든 예언이 이루어지는 때에 아합 왕 이세벨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우상을 섬기게 하는 선지자가 있게 된다. 그러나 엘리야가 이방 선지자를 물리치고 이겼듯이 이길 수 있다.

한국의 정치 현실을 보자. 박근혜 대통령을 보면 아직도 과거의 '트라우마'와 '상처'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 분야 전문가는 아니라 정확하게 분석할 수 없으나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한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국가적 사건과 가족사, 큰 사건을 겪고 정신분석 전문가, 상담 전문가에게 장기간 치유를 받아야 하는데 그리하지는 못한 것 같다.

목사를 사칭한 이교도 최태민이나 어설픈 유사종교 같은 데 정신세계에 의존하고 영향을 받지 않았나 유추한다. 한 개인으로서는 안타깝다. 불행한 기억과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내면에 드리워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큰 사회적 문제는 타인의 고통이나 반응에 무감각하거나 공감 능력이 약하다는 점이다. 무의식적으로, 부지불식간에 '나보다 더 큰 고통이나 불행을 겪은 사람은 없다'는 식으로 타인의 고통을 왜소화하거나 축소하는 자기 연민을 보이는 듯하다.

내면에 잠재된 적대감과 증오심,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적대감, '의존적 심리 상태'의 문제다. 그 결과, 종교적인 면이나 특정 개인에게 쏠리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개인적 문제로 그녀가 저지른 일에 자유나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한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가 있었고, 이것이 개인, 사회, 국가 공동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 리더들의 성품이나 성장 과정은 중요하다. 유대인 학살 같은 비극을 주도한 히틀러 내면에도 상처가 존재했다고 많은 전문가는 분석하고 있다. 영향력이 큰 사람의 잘못은 더 큰 오류와 잘못을 양산한다. 한 나라의 최고위 리더의 실수나 죄악은 권력자 개인은 물론이고 국민이나 나라까지도 망하게 한다.

황준배 / <카리스마적 리더십>, <통일과 크리스천 리더십>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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