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떡같은 위로를 주는 사람들이 있다. 개떡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밑바닥을 훑어 내는 그들의 신묘함은 울음마저 그치게 한다. 그들을 찾아가면 슬픔도 눈물도 하물며 우울도 그칠 수 있었다. '불안'한 마음도 어찌할 수 있을까 하여 찾아가 물어보았지만, 그들의 신묘함도 '불안'을 처분하지는 못하였다.

'나는 불안하다'

불안을 인식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보통 긴장이나 공포로 불안을 혼동할 때가 많으며, 그 원인을 제거하기만 하면 이내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안은 어떤 긴박하거나 무서운 사건에 앞서 닥쳐오는 긴장감이나 공포와는 다르다.

예를 들어, 한 여자가 대중 앞에서의 연설을 앞두고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고 해 보자. 그녀는 다시는 대중 연설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침밥을 먹다 말고는 불안을 마주한다. 여자는 이제 아침밥은 건너뛰기로 한다. 이때, 큰 소음을 내며 지나가는 쓰레기차의 소리가 창문 밖에서 들려오자 더욱 거세진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에 여자는 불안의 원인을 규명할 수 없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된다.

이제 여자는 불안을 '죽이기' 위한 다른 방도를 찾는다. 많은 선인들과 상담가들이 일러 주었듯, 심호흡과 명상을 시도한다. "괜찮다, 괜찮아"라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감독하며 상황을 안정으로 이끌어 내 본다. 잠시 괜찮아지는 듯하여 마음을 놓아 보지만, 휴대폰의 채팅창을 확인하고 나니 어인 탓인지 다시 불안해지어 하던 명상을 포기하고 만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서 요동하는데, 명상이 될 리 없다. 그대로 불안이다.

즉, 공포와 긴장은 그것들의 원인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반면 불안은 그 원인을 찾지 못한다. 공포와 긴장의 원인을 찾았던 그 방식으로는 더욱이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공포와 긴장감은 이 시간(순간)이 지나가 버리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곧 잘 해결되지만, 불안은 쉬 지나가는 일이 거의 없기에 명상이나 기도로는 약발이 들지 않는다.

특히 "괜찮다,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채근한다고 불안한 마음이 달래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헛다리다. 그러니 평안과 안식의 방향으로 불안한 마음을 질질 끌고 갈 필요가 없다. 또한 불안은 엄마나 아빠에게로부터 받은 상처에서 비롯된 내면적 심리 상태(혹은 결정론적인 상태)가 더 이상 아니다. 그러니 이제 필요한 것은 불안을 향한 '판단 중지'이다. '어디서', '왜'라는 물음을 중지하는 것부터가 '불안 죽이기'의 역설적 시작이다.

다음으로는 불안증에 지친 스스로를 바라보는 일을 하면 된다. 이는 심장이 널뛰는 채로, 아랫배가 뒤틀리는 채로, 입이 바짝 마른 채로, 다시 말해 몸뚱이가 전하는 불안을 그대로 드러내며 자신의 존재를 가만히 마주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불안은 은폐돼 있던 내가 다시 나에게 폭로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곧, 불안하다는 것은 실존으로 나아가는 바로 '거기'에 내가 '나가 서' 있는 것이다. 불안을 타고 오는 '존재의 요구' 즉, 하이데거의 말처럼 존재의 "말 건넴"에 응답하는 것, 이때의 응답은 '나는 불안하다', 혹은 '지금 여기에서 불안해하는 것은 나다'라고 할 수 있겠다.

'불안할 수 있어 다행이다'

'지금 여기에서 불안해하는 것은 나다'라는 응답은 나 개인의 고백에서 비롯되었다. '말 건넴'과 그에 따른 응답. 이 지루하기도,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찾아낸 오직 하나의 기쁨이라면 '내가 불안하기 때문에 사유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아니, 불안하기 때문에 사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왜냐하면 불안은 필연적으로 존재론적 질문을 몰고 오기 때문이다. 즉, 나를 사유하게끔 만들었던 것이 바로 불안이었다.

신, 죽음, 삶, 사랑, 몸, 아름다움, 권태, 실존 등을 사유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고독 속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고독한 것이 불안한 것보다 나았기에, 나는 차라리 고독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밖에 나가지 않기'를 작정한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최소로 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요, 반대로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불안증이 잦아들거나 환기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 또 다른 하나였다. 도피이면서 도피가 아닌 상태. 불안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으면서도 도망가지 않으려 하는, 그러니까 사르트르의 말처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도 가릴 수도 없다는 그 불안을 적나라하게 목도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음식을 사러 나가는 일 말고는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근 반년의 세월을 그리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철학자들의 위로 덕분이었다. 내가 대단한 철학적 사유를 해서도 아니고, 할 수도 없었지만 그들의 위로는 채 표현할 수 없는 위로 곧, '고독한 위로'였다. 찰떡같이 위로하던 이들도 해내지 못했던 '불안'에 대한 물음을 그들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불안 속을 헤매어 잠도 이루지 못하고, 심장이 배 밖으로 튀어 나온 줄로 착각하던 때에 하이데거는 내 귀에 속삭였다.

"네가 지금 불안한 것은 허무감이나 무상감 때문이 아니야. 네가 남들(세인)과 똑같이 살아가려는 것을 멈추기 위한 것이야. 세계 속에 내던져져 있는 네 존재가, 온전하게 지속되기 위한 일종의 면역반응인 거지. 바로 독자성과 자립성을 기르기 위한 시간인 거야. 그간 은폐되어 있던 본래적 너를 발견할 바로 그때가 지금 온 거란 말이야. 너의 실존 가능성을 개시할 때 말이야. 그러니 너는 이제 가능성이란다! 비본래적인 너를 벗어 던질 준비가 되었니? 불안한 지금, 바로 환희와 기쁨의 시간 속에 네가 '나가 서' 있단다."

이보다 큰 위로는 없었다. 그의 속삭임처럼, 나는 '비본래적인 나'에서 '본래적인 나'로 돌아서는 길목에 서 있었다. 불안할 수 있어 비로소 다행이었다.

'기분에 충실하기'

화염같이 일어나기도, 가랑비처럼 내리기도 하는 불안을 막지 않기로 작정하는 것. 철학자들이 건넨 '고독한 위로'의 힘이다. 그런데, 이처럼 '불안을 작정'하는 것, 다시 말해 불안한 그 기분을 충실하게 느끼는 것은 진짜 나에 가까워지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분이야말로, '저절로' 일어나는 본래적이고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웃고는 있지만 기분이 딱히 좋은 것은 아니야"라고 할 때,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 더 진짜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기분은 늘 우리 안의 본향을 향해 있다. 오늘의 기분이 어제의 기분과 같을 수 없고, 지금의 애인과 있을 때의 기분과 과거의 애인과 있을 때의 기분이 같을 수 없다. 우리가 어떠한 기분에 늘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기분은 이성보다 앞서 벌어지는 현상이며, 그러기에 나의 존재를 이성보다 앞서 규정하는 아주 근원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오늘 느끼고 있는 기분에 충실한 것이 나의 근원을 캐묻는 일이 된다.

나를 '괜찮다'라고 타이르는 행동이 약발이 들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절로 "피어오르는 기분"이 이성으로 꺼질 리 없다. '괜찮다'라고 나를 타이르는 행동이 고안된 것이라면, 기분은 말 그대로 "나를 덮치는 것"으로서, "우리가 말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저절로 지어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음의 조언은 틀렸다. 늘 방구석에만 쳐 박혀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니, 나 같은 여자도 밖에 나가야 하지 않겠나. 어느 날 '밖'에 나가는 것 자체로 불안하여 외출을 지체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밖을 안이라 생각하라"라고 조언하였다. 당시에는 발상의 전환이라며 무릎을 쳤지만, 그런 이성의 간계가 불안한 기분과 그에 따른 몸의 변화를 막아 내진 못했다. 몸이 이성보다 앞선다는 것을 알던 이였지만, 그의 조언은 허위다.

다시 강조하자면, 기분은 "강제되는 것이 아닌 우리가 그리로 빠져들어 버리게" 되는 것이기에, 기분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는 것이야 말로 아주 근본적인 존재 물음이 된다. 이성보다 한 발 빠르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기분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오늘의 진짜 나'를 만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결국 나를 사로잡고 있는 아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불안을 잘 붙들어 매어 놓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 봤자 불안하다면, '불안하면 불안하기'로 하면 되는 것이다. 본래적 자기에로 나아간다는 말에 고독한 위로를 삼으며 불안함을 애써 움켜 본다.

*이 글은 웹진 <제3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웹진 <제3시대> 바로 가기: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

김정원 /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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