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다. 동물은 영혼이 없다. 인간처럼 하나님 영으로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받는 존재가 되기 부적절하다. 동물 건강을 위해 기도할 순 있지만 이것도 궁극적으로는 주인인 인간을 위한 기도다. 기도는 영적인 개체와 하나님과의 통신 수단이자 인격적인 교제 수단이다."

[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정말일까. 동물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축복받을 수 없는 것일까.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일까.

최근 대한성공회가 주관한 '반려동물 축복식' 기사가 나간 후 인터넷에서 '배틀'이 일어났다. 동물도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축복받는 게 당연하다는 반응과 동물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구원도 없고 축복받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여러 질문을 품고 10월 18일 이화여자대학교 장윤재 교수(기독교학과)를 만났다. 장 교수는 동물·생태·여성신학에 관심을 두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학자다. 2015년에는 '무지개의 하나님, 푸줏간의 그리스도, 그리고 동물신학의 탐구'라는 논문을 썼다. 성공회 신부 앤드류 린지가 쓴 <동물신학의 탐구>(대장간)를 번역했다.

다음은 장 교수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 동물 축복식부터 이야기하려 한다. 성서적으로 근거가 있는가.

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피조물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복을 빌어 주신다. 이 복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게 아니다. 성경을 보면 친히 짐승, 물고기, 새를 만드신 후에도 생육하고 번성하라 축복하신다. 노아 홍수 이후에도 동물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성경을 잘 읽지 않아서 모르는 것뿐이지 분명히 나와 있다.

- 어떤 사람은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이유로 동물신학 자체를 부인한다.

기독교는 한 번도 다른 생명에 혼이 있음을 부정한 적이 없다. 대신 영혼에 등급을 매겼다. 식물은 생혼, 동물은 각혼, 인간은 영혼이 있다고 했다. 이때 하나님의 구원은 이성적인 존재이자 영혼이 있는 인간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짚어야 할 점이 있다. 정통 기독교는 절대 '영혼 구원'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영혼불멸설을 믿지 않는다. 존재를 전인격적으로 본다. 영혼만 따로 떼어서 보지 않는다. 사도신경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함께 믿는 종교다. 바울은 육체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는 영혼 구원만 강조한다. 죽은 후 영혼이 본향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이는 플라톤이 설파한 '이데아론'에 가깝다. 사도바울은 플라톤 교설 속에서 몸을 긍정하는 설교를 했는데, 현재 한국교회는 플라톤 교설을 따르고 있다.

이 부분은 영지주의와도 연결돼 있다. 영지주의는 기원 후 1세기부터 3~4세기까지 창궐했다. 안타깝게도 플라톤 의견을 받아들여 '가현설'에 빠졌다. 영과 정신은 신성하고 육신과 세상은 악하다고 보았다. 그 결과 예수가 인간 몸을 입고 오신 것 자체를 부인했다. 세상에서 살던 예수의 육신은 가짜라고 했다.

그러나 요한일서 4장에는 영지주의를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른다. 정통 기독교는 첫 이단인 영지주의에 맞서 투쟁하며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왜 다시 그 이론을 믿고 있는지 모르겠다.

- 인간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가.

그렇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한다. 이 때 "세상"은 헬라어로 "코스모스"다. 온 우주 만물을 뜻한다. 또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후 "좋다"는 말을 일곱 번 하셨다. 마지막은 "참 좋다"고 했다. 아이를 낳은 어미가 자식을 보면서 "너무 좋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거다. 자신이 배 아파 낳은 피조물인데 어떻게 구원하시지 않겠는가.

기독교인 대부분은 이 우주 만물에 인간만 포함될 거라 생각하지만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 영혼만 구원하시지 않는다. 당신이 만드신 것들을 모두 긍정하고 사랑하신다. 영지주의와 싸우며 정통 기독교를 세운 신학자 이레네우스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라는 말씀에는 인간뿐 아니라 사자, 나무, 별, 달도 포함된다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종종 동물도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성서적으로 보면 자연과 동물은 구원이 필요 없다. 죄가 있어야 구원에 의미가 있다. 죄는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만 짓는다. 그런 의미로 보면 동물은 구원, 구속이 필요 없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동물에게 대속 역할을 한다. 예수 시대가 도래한 후 동물 제사가 필요 없어졌다. 단 한 번으로, 예수가 모든 죄를 사했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동물에게는 살육으로부터 대속이라고도 할 수 있다.

▲ 동물 축복식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인간 중심으로 해석했던 성경을 열린 눈으로 본다면 놀랄 일이 아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 기독교인들이 그간 성경을 인간 중심으로만 해석했다는 지적으로 들린다.

선과 악, 영혼과 육체로 나누는 이원론적 신앙이 인간중심주의 신학을 만들어 냈다. 기독교인 대다수는 인간만 하나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구절, 하나님이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명령을 인간에게만 하셨다는 것을 근거로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레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차분히 살펴보면, 이게 얼마나 반성경적이고 종(種) 차별적인 이야기인지 알 수 있다.

하나씩 이야기를 꺼내 보자. 창세기 1장 28절에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말이 나온다. 많은 기독교인이 이 말씀을 근거로 정부가 생태계를 파괴해도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자연을 개발하는 것을 당연하다 생각한다. 성장만 답이라고 말하는 서양 문명이 옳다고 여긴다.

그러나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말은 인간 탐욕대로 마구 파헤치고 뒤엎으라는 말이 아니다. 다스리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적정 위치에 오른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만큼 피조물인 인간을 귀중하고 고귀한 존재로 본다는 말이다. 동물을 하대하거나 자연을 파괴해도 된다는 게 아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28절 이후에 나온다. 29절을 보면 인간에게 씨 있는 채소를 먹으라는 명령, 30절은 동물에게 채소를 먹으라는 명령이 나온다. 타락하기 전, 하나님은 채식을 명령했다. 한국교회가 뒷 구절을 보지 않아 자세히 다루지 않지만 우리는 29~30절을 살펴봐야 한다.

- 종교적 이유로 채식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직 채식은 한국교회에는 낯선 주제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해 보자. 홍수는 멸망, 심판 이야기가 아니다. 새로운 창조를 위한 시작이다. 비가 많이 왔다고 알고 있지만 아니다. 땅에서 샘물이 솟고 궁창을 여셨던 첫 창조 때로 하나님이 상태를 다시 돌려 둔 것뿐이다. 여기서 봐야 할 것은 하나님이 노아가 드리는 제사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에 있는 다른 생명을 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신다. 아마 후회하신 것 같다.

무지개 약속도 그렇다. 사람들은 무지개 언약을 보면서 하나님이 다시는 인간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라고 한다. 창세기 9장을 다시 봐야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땅에 육체 가진 것들을 멸하지 않겠다고 한다.

삼자 계약 하는 장면도 그렇다. 창세기 9장을 보면 자기가 누구와 언약을 맺는지 여섯 차례나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2번만 강조해도 어마어마한데 여섯 번을 말씀하신다. 내가 노아와 동물, 이 땅과 언약을 맺는다고 거듭 이야기하신다. 재밌는 점은, 인간과 동물에게 "번성하라"는 축복은 하시지만 새 언약을 맺을 때는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으신다. 첫 언약 때 하신 말씀을 거두어들이신 거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계약을 맺고 나서는 하나님이 육식하되, "피째 먹지 말라"고 하신다. 유대인은 피에 생명이 있다고 보았다. 이는 동물을 함부로 학대하거나, 짓밟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고기는 대부분 피째 먹는 식이다. 요즘 우리 식탁에 올라오는 고기는 생명의 산물이 아니라 죽음과 고통, 탐욕의 산물 덩어리다.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진 고기를 먹는 건 성경에 어긋난다.

이사야 65장으로 넘어가면 더 재밌는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면서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다고 말씀하신다. 육식했던 사자가 채식으로 돌아간다. 이런 맥락을 보면 하나님이 현재 육식을 허용한 건 "피째 먹지 말라"는 엄격한 조건하에 임시적으로 용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채식은 성경적 실천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채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장 교수는 기독인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봐야 한다고 했다. 성경 곳곳에 차별적인 말씀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 구약에서는 동물을 제사 드리는 용도로 쓰지 않았나.

맞다. 성경에는 반대되는 개념이 나올 때가 많다. 우리는 성경에서 특정 인종을 비하하는 구절을 찾아낼 수 있다. 반면 성서적이지 않다고 반박할 구절도 찾을 수 있다. 한 예로 성경은 여성에게 잠잠하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여인에 비유하면서 가부장제를 우습게 만드는 구절도 있다.

누가 맞는 것인가. 복음서만 보더라도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과연 신약성경 27권을 간추린 사람들이 이걸 몰랐을까.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 만나러 갔던 여인 이름, 숫자가 다른 걸 몰랐을까.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네 개의 다른 기둥을 토대로 교회를 세웠다.

성경은 절대 국정교과서가 아니다. 한 가지 메시지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치열하게 기도하고 사색하며 열린 하나님 말씀을 마주해야 한다. 성경 전체 맥락을 봐야 한다. 군데군데 차별적인 구절이 있다 해서 하나님이 차별적인 분이 아니다. 사랑, 평화의 하나님이 여성과 흑인은 2등이라고 말씀하실 분이 아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 마지막으로 기독교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현재 이화여대 교수이자 교목으로 활동 중이다. 매일 학생들을 상대로 채플을 인도한다. 교회 다니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한다. 15년 전에는 10명 중 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지금은 1명만 교회에 출석한다. 부끄러워서 손들지 않는 경우도 있다.

비기독교인이 교회를 낯설어한다. 기라성 같은 목사님이 설교를 해도 학생들은 무관심하다. 기독교가 말하는 메시지에 관심이 없다. 우리는 은혜 받았다고 말하지만, 비기독교인에게는 지적 호기심과 영적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세상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법을 알아야 할 거 같다. 교회는 상식이라고 여겨지는 지독한 편견, 고립되고 소외된 상황을 탈피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인간이 우월하다는 편견에 갇혀 있지만 철학, 예술, 과학 분야에서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정설이 깨지고 있다. 실험을 통해 동물에게도 자의식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선이 허물어지고 있다. 교회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