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쇠얀 키에르케고어 - 불안과 확신 사이에서> / 매튜 D. 커크패트릭 지음 / 정진주 옮김 / 비아 펴냄 / 120쪽 / 7,000원

도발인가 호소인가

쇠얀 키에르케고어는 1813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거대한 사회적 격변기 속에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그는 우울증 증세가 있었고, 육체 또한 허약해서 불구가 되었으며, 청년기에 파혼을 겪으면서 마음과 정서는 어둡고 우울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은둔하는 삶을 살았던 몇 안 되는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쇠얀 키에르케고어의 글에 대해 학자들은 그가 다양한 필명과 문체 그리고 복잡하고 폭넓은 논증 방식을 사용해 난해하며 쉽게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고 평가한다. 또한 그가 42세의 짧은 생을 마친 후, 키에르케고어 사상은 국가와 교회의 품위를 중상하고 비방하는 파렴치한 도발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쇠얀 키에르케고어의 글이 진짜 불편한 이유는 그가 사회, 정치, 교회, 국가를 향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글을 읽고 있는 독자, 나 자신을 향하여 비판을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지적들을 도발로 생각한다면 중간에 화를 내고 책을 덮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도전들을 진심 어린 호소로 받아들인다면, 자기 스스로 모르고, 만나기를 외면하고, 정당화해 왔고, 변호하고 옹호하고 싶었던 거짓된 자아를 발견함으로, 아름답지 못한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은 것과 자기 자신에 대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욕망을 걷어내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 자신에게 보여 주고 싶은 진정한 나의 모습을 직면하는 순간은 결코 유쾌한 순간이 아니다. 그래서 쇠얀 키에르케고어는 자기 자신의 불완전함을 직면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고 강조한다.

개인과 윤리

본서는 쇠얀의 여러 가지 사상들 중에 '개인과 윤리'에 관해 압축해서 세 가지로 소개하고, 이 소논문보다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쇠얀 키에르케고어의 저작들과 다양한 사상을 논의한 책들을 요약 소개하고 있다.

쇠얀은 인간의 다중성을 지적한다. 즉, 한 개인의 삶을 빠짐없이 기록해서 본다면 그의 말과 행동이 일관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소신)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자신이 유리한 대로 행동할 뿐만 아니라 그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바꾸어 버린다.

이러한 삶의 주체인 나는 과연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가? 그는 개인으로서 합리와 윤리의 기준이 매우 자기중심적이라는 점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자기중심적이지 않다고 변명하고 싶고, 스스로를 변호하거나 옹호한다. 그리고 자신이 변명하고 옹호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그 모습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거나 관찰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판단들, 행위들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져 보라는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왜 이렇게 반응하고 있는가?', '나는 왜 이렇게 느끼고 있는가?' 등의 질문을 통해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나야 하고, 진정한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 스스로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에게 윤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타자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윤리적일 수 없다고 경고한다.

자신이 죽어야만 자신이 태어난다

쇠얀 키에르케고어는 현대 기독교 신학에 중요한 영감을 제공해 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죽어야만 자기 자신이 태어난다"는 명제이다. 분명 기독교는 '거듭남'에 대해 오랜 시간 연구해 왔다. '거듭남'은 '성화(聖化)'로 설명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영화(榮華)'에 도달하는 것이다. 성화의 과정을 통해 영화의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여기까지가 구원론적 설명이다.

쇠얀 키에르케고어는 신학적 입장에서 개인의 윤리를 설명하지 않고 실존적 입장에서 개인의 윤리를 설명한다. 물론 성경의 내용들을 함께 다루면서 신학적 내용들이 논의에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중심 흐름은 인간 실존적 관점이다.

그런데 이 관점이 참 재미있다(물론 책에서는 복잡하고 난해하게 설명하고 있다). 거듭남의 대상인 '옛 자아'와 '새 자아'는 '비윤리적 개인'과 '윤리적 개인'으로 대입해 볼 수 있다. 자기중심적인 비윤리적 자아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비윤리성을 직면하여 죽임(회개)으로 윤리적 새 자아로 변화된다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진정한 자아가 태어날(거듭남)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성령의 도우심이 배제되고 인간의 자발적 노력의 강조로 오해받을 수 있는 대목이지만, 자신을 직면하고 만나고 깨닫고 회개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과정 속에 성령의 역사하심을 보충 설명한다면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구원론으로 대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영화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는 것이므로 '진정한 자아(자신)'로 표현하는 것도 무리 없을 거라고 본다.

진정한 자신과 만나기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쇠얀 키에르케고어가 던지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여러 신학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나야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는 소크라테스나 델포이의 아폴론신전 입구에만 기록된 명제가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것은 성경 전체의 명령이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지속적인 역사이다.

자기를 돌아보지 않으며 자신을 만나지 않는 종교나 신앙생활은 인간 자신의 욕망과 탐욕, 그리고 정욕 등을 자기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며 투사하는 종교나 신으로 전락할 수 있다. "진정한 자기 자신과 만나라"는 쇠얀 키에르케고어의 날카로운 칼날의 끝이 다른 사람의 죄와 이 세상, 그리고 타 종교를 향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해 있기에 매우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불편함 또한 잘라 버려야 할 옛 자아임을 받아들인다.

본서의 부제는 '불안과 확신 사이에서'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직면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가 바로 '불편한 진실을 만날까 봐' 불안해서이고, 우리가 쇠얀 키에르케고어와 같은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분명 불편하고 불쾌할 것이다'는 확신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 직면하기 전까지는 불편하고 불안하다. 그러나 직면의 순간은 고통스럽고, 직면한 후에는 자유의 기쁨이 있다. 키에르케고어가 말한 '윤리적 개인'에게 주어지는 특권이 바로 '자유'인데 빈 말이 아니다. 본서는 쇠얀 키에르케고어를 왜 읽어야 하며,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좋은 안내서이다.

*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강도헌 / 크리스찬북뉴스 운영자, 제자삼는교회 담임목사, 프쉬케치유상담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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