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수다의 힘을 믿는 이가 있다. 일상을 살아가며 받은 상처를 서로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고, 그 모임을 이끌어 가는 또 다른 여성. 미국 홀리네임즈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는 박정은 교수 이야기다.

박정은 교수는 가톨릭 수녀다. 처음 박 수녀를 만났을 때 받은 느낌은 일반적인 '수녀' 이미지와 전혀 달랐다. 수녀복을 입고 있지도 않았다. 뭔가 거룩하고 경건한 모양새를 상상했지만 내뱉는 말 한마디, 몸짓 모두 경쾌했다.

그는 지난 4월 <사려 깊은 수다>(옐로브릭)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박 교수가 미국에서 20년 가까이 '지혜의 원'(Circle of Wisdom)이라는 이름으로 집단 여성 상담을 하며 느낀 점, 비슷한 모임을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건네는 조언 등을 담은 책이다.

<사려 깊은 수다>는 화려한 조명을 받지는 못했어도 사람들 입소문을 타고 퍼져 나갔다. 읽은 사람들 사이에서 '친구에게 권하고 싶은 책'으로 회자됐다. 읽으면서 치유받고,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는 '간증'이 쏟아졌다.

박정은 수녀가 한국을 찾았다. 한국에서 모임을 준비하는 이들을 격려하고 다양한 여성들을 만나 그동안 자신이 느꼈던 점을 나누기 위해서다. 10월 12일, 서울 안국동 인근에서 박정은 수녀를 만났다. 다양한 인종, 종교, 세대의 여성을 만나면서 느낀 점부터 신학 이야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 박정은 수녀는 미국 홀리네임즈대학교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친다. 그는 4월 <사려 깊은 수다>(옐로브릭)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읽은 독자들 사이에서 '친구에게 권하고 싶은 책'으로 회자됐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경계에서 찾은 영성

박정은 수녀는 <가톨릭뉴스> 기자로 활동하다 28세에 수녀가 됐다. 수녀원에 있으면서 잠깐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났는데 여기서 여성신학, 여성주의를 공부했다. '순명'에 익숙한 한국 수녀원에서 비판적 사고를 하는 수녀는 부담스러운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박 수녀에게 귀국을 종용했다.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두 갈래 갈림길 앞에서 박정은 수녀는 미국에 남아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한국 수녀원은 말을 듣지 않는 박정은 수녀를 제명했다. 수녀원은 퇴회를 제안했지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해 자발적 퇴회 대신 제명당하는 길을 택했다.

박 수녀는 당시를 회상하며 성경에서 말하는 '끊긴 자'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계기였다고 말했다. 한국 여성들을 돕기 위해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정작 한국과 단절되는 경험을 하고 나니 공허가 밀려왔다.

미국에서는 이방인이고 한국에서는 '짤린 수녀'였다. 어느 사회도 자신이 속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 한국 무당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끊긴 자'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구성원들이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존재가 벌이는 굿판은 수도자의 삶을 사는 박정은 수녀에게 적잖은 가르침을 줬다.

성서에도 경계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박 수녀는 하혈병 앓는 여인에게서 경계인 영성을 봤다. 그는 유대와 이방 중간에 있다. 경계에 서 있는 많은 이들이 그렇듯 기적의 순간에 혼자였다. 예수의 사역을 돌아보면 여인이 길에서 치유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박 수녀는 여인의 주도적 행동이 이를 가능케 했다고 생각한다.

"이 여인은 길에 혼자 서 있다. 주변에 아무도 없고 외로운, 소외를 체험하고 있는 사람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먼저 치유하신 것이 아니다. 여인이 주도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치유받을 수 있었다.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용기가 필요하다. 끊긴 사람이기 때문에 새로운 네트워크가 자신에게 다가올 때 주저하지 말고 잡아야 한다. 다른 이의 손을 잡아야 한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박정은 수녀. 그는 한국 수녀원에서 제명당하면서 어느 사회에도 속하지 않는 '끊긴 자'가 무엇인지 경험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지금 이 시대에도 중간자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원하지 않아도 어느 한 곳에 속하지 않는 삶. 신앙인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교회는 세상과 교회를 정확하게 구분하라고 가르쳐 왔다. 정작 매일을 사는 교인들은 교회와 세상, 두 경계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때가 많다.

박정은 수녀는 경계야말로 더 깊은 영성을 추구할 수 있는 자리라고 말한다. 종교다원주의 시대. 오히려 하나님과 깊은 관계 형성 없이는 다른 종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리스도인임을 자랑하는 시기가 없었다면 내가 그렇게 자유롭게 다른 것을 배울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사람마다 신앙 성숙 단계가 다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예수 이미지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예수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그때 갈등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그건 떠날 때가 아니다. 더 깊은 곳에 그물을 치고 더 깊이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초대일 수도 있다."

여성들이여, 더 많이 만나고 더 많이 나누라

박정은 수녀는 상처 입은 여성들이 모여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지혜의 원(Circle of Wisdom)' 모임을 오랫동안 이끌었다. 그는 '원'이라는 개념을 좋아한다. 앞서거나 뒤서는 것 없이 모두가 동일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박 수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원 앞에 지혜를 두어 '지혜의 원'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지혜'가 그리스도의 여성성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생물학적 남성이지만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여성성을 가리키는 말이 '위즈덤 소피아'다.

▲ '지혜의 원'. 박정은 수녀가 20년 가까이 많은 여성들과 함께 유지해 온 집단 상담 프로그램이다. 박 수녀는 여성이 자신의 아픔을 나누면서 어떻게 성장하는지 쭉 지켜봐 왔다. 박정은 수녀는 한국 방문 기간에도 여러 여성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사려 깊은 수다>를 보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자매애(sisterhood)'를 발견한 여성들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 만나는 여성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웃고 울며 자기 이야기를 말하다 보면 어느새 서로를 격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책을 읽으며 과연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궁금했다.

"공동체에서 잘리고 바닥으로 내려갔을 때 나를 보듬어 준 사람들은 여성이었다. 가끔 사람들은 여성이 여성을 질투한다고 오해한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지만 정작 밑바닥에서 여성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구조 중심에 있는 남성이 아닌 여성이다. 소외되고 고통받는 것이 뭔지 아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 회심의 체험이었다.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말은 좀 잘못된 말인 것 같다. 현실에서 여성의 적은 남성일 경우가 훨씬 많다. 아니면 둘 다 친구다. 그렇게 구분하는 것은 너무 임의적이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자기 속내를 말하는 것이 어색하겠지만 그래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말을 하면서 그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면서 나의 단점을 가리기 위해 무슨 수를 쓰고 있는지 듣는 사람들은 안다. 나를 방어하기 위해 어떤 기제를 사용하고 있는지 피드백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만 해결되면 나눔을 가장 잘하는 사람들이 한국 여성이다. 한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서로 아픔을 나누며 내가 겪고 있는 아픔을 나만 겪고 있지 않다는 걸 아는 게 정말 중요하다. 서로 정도 차이는 있지만 모두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걸 알면 그때 치유가 시작된다."

박정은 수녀는 연대를 강조했다. 같은 또래끼리 모이는 것보다 세대가 다른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좋은 경험이라고 했다. 30대가 안고 있는 고민을 50대 이야기를 들으며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살아왔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은 나에게 뭘 가르치시는 건지 고민해 보라고 조언했다.

그는 자신이 만난 여성 중 청소 일을 하는 50대 여성을 떠올렸다.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닌데 겸손한 자세를 보여 줬다. 겸손한 말투로 '나는 청소를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운을 떼는 것으로도 젊은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줬다고 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삶에서 품위를 찾고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발하는 것은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박정은 수녀는 다른 사람이 힘겹게 사는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 공감하는 것이 힐링의 원리라고 했다.

▲ 박정은 수녀는 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는 시대, 신앙인은 더 복음의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박 수녀는 복음 정신을 회복하고 영적인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복음의 기쁨을 회복하자

최근 가톨릭 복지시설 '희망원' 사건은 많은 이의 공분을 자아냈다. 교회는 또 어떤가. 목사 성폭력, 재정 문제 등이 꾸준히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고 있다. 한국교회는 점점 사회에서 고립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나아갈 길은 어딜까.

박정은 수녀는 복음의 가치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죄성'을 강조하기보다 조금 편안해지면 좋겠다고 했다. 이렇게 행동하면 벌주시고, 저렇게 행동하면 예뻐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편협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더욱 불편하게 한다고 했다.

대형 교회를 보며 가난의 영성이 부재함을 느낀 박정은 수녀. 가톨릭으로 치자면 강남 성당을 바라보는 느낌과 비슷하다. 그는 예수 믿으면 돈 많이 벌고, 저 교회 가면 사업이 잘된다는 신학으로 어떻게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되물었다.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영적 감수성을 키우면 좋겠다. 복음 정신을 회복하고 약자들과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려면 기도해야 한다. 주여, 주여 외치며 복 달라는 기도가 아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좋겠다.

어떤 때는 나도 무섭다. 정말 인간 같지 않은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 내가 저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해 주세요' 기도한다. 그런 훈련을 하지 않으면 사람 사이는 점점 갈라진다. 나는 여기, 너는 저기에 속하고 우리는 같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 나는 사회 불의를 보고 활동하는 사람이고 너는 아니다. 그러니 너는 의식도 없고 인간도 아니다. 이런 가르기는 좀 위험한 것 같다."

박정은 수녀는 미국에 산다. 한 발자국 떨어져 한국 사회를 바라본다.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오니 마음 아픈 젊은이가 많이 보인다. 우스갯소리로 시작한 금수저, 흙수저 이야기가 이제 또 다른 현실로 느껴지는 요즘, 한국 젊은이들은 자신을 어떻게 돌봐야 할까. 박 수녀는 자기를 더 사랑하라고 말한다.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자기를 격려하면 좋겠다. 때로 교회, 부모님 등 초자아(super ego)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는 경우가 있다. 내 한계를 알아야 나를 사랑할 수 있다. 3시간밖에 못 자면서 잘하고 있다 이야기 하라는 게 아니다. 내가 건강하려면 한계를 알고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에서는 자기를 담금질하는 경우가 많은데, 먼저 좀 편안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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