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남기 농민 사건에 연대하는 세월호 가족들. ⓒ뉴스앤조이 구권효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백남기 농민을 지키는 자리에 세월호 가족들도 있었다. 4·16가족협의회의 상징 노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이면, 경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도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세월호 가족들은 4만여 명이 모인 10월 1일 백남기 농민 추모 대회에서도 맨 앞자리를 지켰다.

서울대병원에서 노숙하며 백남기투쟁본부 기자회견을 페이스북으로 라이브 중계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한 아버지를 보았다. 그는 4·16가족협의회에서 진상규명분과 팀장을 맡고 있는 장동원 씨다. 그는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 장애진 양의 아버지다.

생존 학생 아버지로서 어떤 마음으로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안전 사회 건설을 위해 일하고 있을까. 10월 5일, 안산 합동 분향소에서 장동원 씨를 만나 1시간여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인터뷰를 꺼려 왔다는 장동원 씨는 말 하나하나를 조심스러워했다. 자식이 배에서 탈출했을 뿐, 그도 세월호 참사로 트라우마를 가지고 사는 피해자였다.

▲ 안산 합동 분향소 기독교예배실에서 장동원 씨와 대화를 나눴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아빠는 진상 규명 할 거지?"

2014년 4월 16일. 장동원 씨는 그날 아침 애진이 전화를 받고 진도로 향했다. "아빠, 배가 기울었어. 컨테이너가 떠다녀…." 믿을 수 없는 말에 상황이 그려지지 않았지만 "물이 가슴까지 찼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구명조끼 입었지? 빨리 거기서 나와!"

장동원 씨는 그날 애진이를 데리고 안산으로 돌아왔다. 애진이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다시 진도로 내려갔다. 애진이 친구들이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생존 학생들이 있었던 안산도 아수라장이었다. 병원에는 시도 때도 없이 기자들이 들이닥쳤고, 생존 학생 중에서도 자살을 기도한 아이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안산으로 갔다. 그렇게 한동안 진도와 안산을 왔다 갔다 했다.

애진이에게는 특히 친한 친구가 있었다. 하도 애진이 집에 많이 와서 장동원 씨를 '큰아버지'라 부를 정도였다. 2013년에는 애진이와 친구, 장동원 씨 셋이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수학여행 가기 전, 친구가 피구를 하다 손가락을 다쳤다. 수학여행을 갈까 말까 고민할 때 장동원 씨가 "인생에 한 번뿐인데 꼭 가라"고 했다. 이 말을 평생 후회하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진도체육관에서 그 친구 아빠를 만났는데… 그 눈빛을 지금도 못 잊어요. 그 아빠는 저희를 원망하는 게 아니라 '애진아, 너랑 같이 갔잖아. 왜 같이 안 있었어. 같이 있었으면 나왔을 텐데' 하는 거야. 진짜 무너지겠더라고… 서 있지를 못하겠더라고… 우리 집사람도 옆에서 주저앉아서 펑펑 울고. '죄송하다'고 '죄송하다'고.

비참하더라고… 자식 잃은 부모와 상처 받고 온 자식 부모가 서로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애진이도 정상일리 없었다. 배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장동원 씨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생존 학생들은 참사 후 바로 병원에 입원했고, 이후 두 달간 중소기업연수원에 있었다. 학교로 바로 돌아갈 수 없어 임시 조치를 취한 것인데, 이 기간 동안 학생들은 굉장히 힘들어했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심리 치료는 오히려 또 하나의 상처가 됐다.

"애진이가 연수원 나왔을 때 같이 여기 합동 분향소에 왔어요. 거기서 세월호에 대해 저에게 처음 말하는 거예요. '아빠는 진상 규명 할 거지?' 아이가 생각해도 너무 이상했겠죠. 왜 내 친구들이 죽어야 했는지, 왜 나는 이런 상처를 받게 된 건지. 그 말 때문에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 같아요."

▲ 배에서 나온 애진이가 친구들을 다시 만난 곳은 분향소였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내 아이는… 살아 돌아왔으니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생존자 가족 중에는 진상 규명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어떤 가족은 차라리 생각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빨리 잊어버리고 살려고 노력한다. 가정 형편이 서로 다르고 살아온 방식이 다르니 뭐라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어느 누가 참사를 잊으려 하는 피해자들을 탓할 수 있을까.

장동원 씨는 참사 초기부터 생존자 가족 대표로 활동하면서 유가족들과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유가족들이 뭐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아이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 자체로 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초반에는 유가족들도 장동원 씨를 경계했고, 생존자 가족들도 유가족 편을 든다며 그를 비판했다. 아직 애진이도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고 가족들도 힘들어했다. 몸무게가 12kg 빠졌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 못했어요. 나는 어쨌든 아이가 살아 돌아왔으니까…. 유가족분들은 정말 삶을 잃은 거잖아요. 그만하자는 생각 한 번도 안 했다고 하면 솔직히 거짓말이죠. 그냥 다 잊고 살자 싶고. 근데… 잊을 수 있을까, 이걸? 아마 내가 죽을 때가 돼도 잊지는 못할 것 같아."

그는 자기 자신보다 유가족들에게 누가 될까 매사에 조심했다. 참사 전 회사에 다니면서 노동조합 일을 했다. 노동자가 조합에 가입해 권리를 주장하는 건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가족협의회 안에 노조 활동했던 사람이 있다"는 말이 들릴까 노심초사했다. 실제로 세월호 3차 청문회에서 드러난 참사 당시 경찰의 보고서에는 "가족 대표 13명 중 '밀양 송전탑' 강성 시위 전담자도 있는 것으로 추정"이라는 말이 있다.

"저를 공격하는 건 괜찮아요. 근데 저 때문에 가족협의회가 공격을 당하니까. '노조' 이런 말 나오면 '종북 좌파'라 하고. 저번에 통신 정보 떼어 보니까 국정원과 종로경찰서가 내 휴대폰 내역을 조회했더라고요. 그런 게 두려운 거죠. 예전 같았으면 '그래? 어디 한번 해 봐' 이랬을 테지만. 괜히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볼까 봐."

▲ 백남기 농민 추모 대회에 참석한 장동원 씨(오른쪽). ⓒ뉴스앤조이 구권효

끝까지 '죽음'으로 기억되는 건 싫다

장동원 씨는 평소 애진이에게 "사람이 소중하고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노동조합 일을 하면서 여러 일을 경험해 봤고, 무엇보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주변 사람들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세월호 가족이 백남기 농민 사건에 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월호 참사 또한 많은 사람의 도움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누가 그랬듯이,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공사 현장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그 사람 목숨값이 몇 십억 몇 백억이다 하면 안전시설 안 만들겠어요? 돈이 아까워서라도 하겠죠. 대한민국은 사람이 죽은 거에 너무 소홀히 하는 것 같아요.

그 어린아이들이 304명이나 죽었는데. 그걸 전 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봤는데. 유리창 안에서 발버둥치는 아이들 하나도 못 건졌잖아요. 생존한 아이들은 뭐 국가가 구조한 겁니까? 그 아이들은 탈출한 거예요. 나는 진짜 이해가 안 가고… 이건 싸워야겠다, 이건 어떻게든 끝장을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요즘에는 세월호 간담회 일정이 잡히면 애진이와 같이 가려고 한다. 애진이도 성인이 됐고 스스로도 세월호 참사는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날의 기억을 되새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장동원 씨나 애진이나 그것이 자신들 몫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살아 돌아온 애들이 공통적으로 감정 기복이 심해요. 괜찮은 것 같아 보여도, 한번 이 기억을 하기 시작하면, 한번 울기 시작하면 탈진할 때까지 가요. 너무 가슴에 맺혀 있으니까. 울다 보면 더 생각이 나고….

저번에는 우리 집사람하고 나하고 TV를 보면서 한참 울었어요. 예능 프로그램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추억을 회상하는 거야. 고등학교 수학여행이 얼마나 재밌고 기억에 남아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회상하면 '죽음'이 떠오를 거 아니에요.

이런 아픔들이 해결되려면 제대로 정리가 돼야죠. 내가 애진이 친구 앞에서도 약속했어요. '이게 100%는 아니더라도, 사실은 이거였더라. 엄마 아빠들이 여기까지 밝혀 왔다. 그러니까 너도 원망 말고 잘 가거라.' 이런 말이라도 할 수 있도록. 제대로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 처벌하고.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 <다시 봄이 올 거예요>(창비)에는 애진이 이야기도 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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