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와 누가가 전하는 세례 요한의 마지막 장면은 낯설다(마 11:2-19, 눅 7:18-35). 우리가 기억하는 세례 요한,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하고, 당대 정치, 종교 권력을 향해 독설을 서슴지 않았던 그의 결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분봉왕 헤롯의 부정한 행동을 책망했고 헤롯은 그를 잡아 가뒀다. 옥에 갇히는 순간, 그는 죽음을 직감한다. 요한은 제자들을 불러 예수에게 물어보게 한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세례 요한의 삶을 미루어 봤을 때, 그의 마지막 질문은 불안하다. 평생을 광야에 살며 구원자의 길을 예비했던 그의 신념은, 죽음이라는 원초적 공포 앞에 완전히 사그라진 듯 보인다. 그를 사로잡은 불안은 무엇일까? 예수가 자신이 그토록 기다렸던 구원자가 아니라면, 삶 전체를 광야에 내던진 자신의 전부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은 아니냐는 두려움이었는지 모른다. 자신이 평생에 걸쳐 추구했던 외침이, 그 외침이 닿고자 했던 현실에 이르지 못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이 질문을 끝으로 세례자 요한의 음성은 복음서에서 사라진다. 요한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길을 잃었던 것일까?

▲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죄, 참회, 구원에 관하여> /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지음 / 정다운 옮김 / 비아 펴냄 / 140쪽 / 1만 원

어쩌면, 이러한 요한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회개를 외치고, 때로는 당대 정치, 종교 권력을 향해 독설을 서슴지 않지만 그 근본 바탕에는 어떤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무언가, 길을 잃어버렸다는 불안 말이다. 이 '상실'을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는 '언어를 잃어버렸다'는 말로 표현한다.

언어를 잃었다는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친숙한 문법이 아니다. 우리는 '언어를 잃었다'는 표현보다는 '믿음' 혹은 '신앙'을 잃었다거나, 믿음이 '흔들린다'는 표현에 더 익숙하다. 교회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무수한 교회가 잃어버린 신앙을 되찾고, 흔들리는 신앙을 붙들기 위해 능력 있는 설교자를 찾거나, 참신한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그러나 저자가 그리스에서 만난 상점 주인과의 대화에서 밝히듯, 이는 모국어를 잃어버린 채 번역어로 자신의 고유한 사고를 대체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번역어의 생동감은 원어의 생생함(원어가 가리키는 실재, 혹은 현실의 생생함)을 살려 냄으로써, 이를 적확하게 살려 내는 데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인들의 모국어인 죄, 참회, 구원이라는 언어를 잃어버린 채, 그 언어가 가리키는 우리 삶의 심연을 망각한다면 모든 번역 행위, 혹은 현실을 갱신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를 잃었다는 저자의 생각은 어떤 의미에서 역설적이다. 죄, 참회, 구원은 여전히 현실 교회를 작동시키며, 유지케 하는 문법이기 때문이다. 신학적 색채에 상관없이 많은 교회의 설교단에서는 여전히 '죄'를 '참회'하여 '구원'에 이르라는 설교가 그치지 않는다. 그것이 사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원죄적 측면을 강조하는 보수적 교회이든, 공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부조리에 집중하는 진보적 교회이든 죄, 참회 구원의 메커니즘은 비슷한 방식으로 기능한다.

문제는 이 언어 자체가 맥락을 잃고 삶과 언어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는 데, 저자의 말을 빌리면 나와 이웃, 나와 세계, 나와 하느님의 연결 고리를 상기하는 데 실패한다는 데 있다. 성직자, 혹은 신학자가 이 언어를 강력하고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이 언어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모국어임을 기억하고, 언어와 삶의 몸짓을 얼마나 가깝게 연결하는지가 중요한 관건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잃어버린 언어를 찾는 것은 현대라는 시선에서 보기에는 낯설고 민망하기까지 한 언어, 죄, 참회, 구원이라는 언어가 나(우리)의 모국어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거리끼고 부끄러운 모국어를 감추기 위해 세련된 번역어를 선택하는 우, 저자에 따르면 의학 언어와 법률 언어로 대체된 날렵한 번역어의 남용을 중단하고 고유의 언어를 찾는 일이 하느님과 나, 세계와 나, 나와 너를 잇는 첫걸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죄'라는 불편한 단어 앞에 직면하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희망이다. 죄가 나의 모국어였음을 인정할 때, "지금 내 모습과 하느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나'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아는 순간, 그 간극에 아파하고, 그 고통에 이름을 붙이며 더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순간, 그때 우리는 어제까지의 자신은 죽었음을 알게 되며 어제까지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내가 되는 새로운 삶으로의 여정"(82쪽)이 시작된다.

'참회'와 '구원'이라는 언어를 되찾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참회와 구원이라는 모국어는 '치료' 혹은 '정죄와 심판'이라는 번역어로 대체될 수 없다. 저자는 구원받음이라는 편리한 자동판매기를 만들어 회개라는 값싼 동전으로 언제든 구원을 뽑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참회와 구원의 모국어적 본질, 이 언어들이 등장하게 된 계기, 이 언어가 가리키는 실재를 잃은 데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참회란 "하느님이 주신 힘으로 행동하고 새로운 생명에 속했다는 놀라운 자유를 누리며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그 힘을 더욱 구하는 것"(112쪽)이다.

참회를 말한다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이 선택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가 신앙 여정의 종착이 아니라 출발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회의 본래 의미는 자연스럽게 구원의 본래 의미를 나타낸다. 구원은 추상적 상급이 아니라, 하느님의 세상을 향한 애통과 사랑을 우리 몸에 새겨 놓고 그것을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한 사람 혹은 한 사회의 정체성은 자신의 원초적 현실, 즉 모국어를 잃어버리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모국어가 담고 있는 고유의 의미는 대체 불가능하다. 저자는 "우리의 절망과 희망을 담아내는 데 신앙의 언어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언어는 없다"(124쪽)고 믿는다. 이를 가리키는 데 실패하는 번역어는, 어쩌면, 본문의 의미를 왜곡하는 번역처럼 사람들의 시야를 가릴 뿐이다.

세례자 요한의 질문을 다시 생각한다. 어쩌면 생의 마지막 순간, 그는 신념과 불안의 충돌 속에 굳건히 지켜왔던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예수께서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제자들에게 일러 그저 너희들이 보고 들은 것은 전하라 말한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이것이다.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이 이 말을 전해 들었는지에 대해 침묵한다. 나는 세례자 요한이 이 말을 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비로소 안식했을 것이다. 자신의 외침이 이르고자 했던 그 현실에 마침내 닿았으므로.

김형욱 /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희망의 신비>(비아)를 옮겼다. 현재 미국에서 목회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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