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교회를 만들기 위해 가정교회로 전환한 동심교회 ⓒ뉴스앤조이 김승범

지난 11월 9일 저녁 8시,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동심교회(염상만 목사)의 담임목사방에서 그들을 만났다.

염 목사를 비롯해 스무 명 남짓 되는 청년들이 둥그렇게 둘러 앉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함께 앉았다. 가정교회로 탄탄한 교회공동체를 일궈 온 동심교회, 그래서 이 교회 내부를 볼 수 있는 가장 큰 창은 각 셀의 리더들을 직접 만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서 직접 삶을 들어보고 생각을 읽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신준구 씨가 특별히 손님 맞이용 노래 한 곡을 띄웠다. 존 덴버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노래 '테이크 미 홈 컨트리 로드', 염 목사가 아예 청하는 것으로 봐서 모임에서 가끔씩 준구 씨가 이런 노래를 불렀던 모양이다. 사실 동심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며 준구 씨를 가장 만나고 싶었다. 염 목사가 들려 준 그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감동적이었던 까닭이다.

이런 이야기였다. 신체 장애를 가진 한 형제의 가정이 시련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아내는 가출하고 장애아인 자녀들 역시 방치된 상태였다. 준구 형제는 이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매일 퇴근을 이 형제의 집으로 했다고 한다.

밥을 짓고, 빨래도 하고, 아이들에게 공부도 가르쳤다. 이런 생활을 몇 달 하고 나자 이 형제가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 사람은 처음 봤다면서 태어나서 처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뒤로 그 형제는 자신의 삶을 정돈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염 목사는 교회가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오랫 동안 꿈구어 온 교회의 모습이라 했다. 준구 씨 노래가 끝난 뒤 염 목사는 데살로니가 전서 2장의 내용으로 함께 소감을 나누자고 제의했다.

모난 돌이 만나 둥근 돌로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뉴스앤조이 김승범
바울 사도가 목회자로서 살았던 고백들을 거울로 삼아 그들은 매우 신중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그들의 고백을 내놓았다. 바울의 고백은 어느 것도 그들이 생활하는 현장과 동떨어짐 없이 적용되고 그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됐다. 2000년의 시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까이 있는 서신을 그들은 대하고 있었다.

"몇 년 전 설악산에 함께 휴가를 떠났을 때 이 말씀을 목사님이 나누셨던 기억이 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 쓰면서 바울 사도가 '너희 아는 바와 같이',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기억하니', '너희가 증인이다'고 기록된 부분을 들면서, 바울 사도에게는 양들이 증인이 되고, 그들이 알고, 인정하는 삶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때 많은 다짐을 했습니다. 영혼들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처음에는 순수하고 뜨거웠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식어지고 또 무너지는 제 모습을 봅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다시 삶을 회복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수능시험을 치른 김진영 씨는 그동안 시험 때문에 미뤄 온 일을 하느라 바쁜 듯했다. 결혼을 앞둔 나이지만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기로 결정했고, 올 해 시험을 준비해 왔다. 진영 씨는 교인들이 마련해 준 방에서 살다가 지금은 교회 옥상에서 살고 있다. 동심교회의 사랑을 많이 받아 온 대표적인 형제다. 그 때문에 요즘은 누구보다 자신이 받은 사랑을 나누느라 바쁘다고 했다.

진영 씨의 유일한 재산은 자동차 한 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집을 나오며 아버지로부터 유일하게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자동차로 진영 씨는 동심교회 교인들의 '기사'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과묵하지만 힘든 일들을 도맡아 해내는 진영 씨가 결혼을 앞두고 바보처럼 늘 웃는다며 교인들은 요즘 시셈 반 핀잔 반으로 놀려댄다. 진영 씨의 '러브스토리'는 동심교회의 또 다른 자랑거리로 회자된다. 그와 교제하고 있는 자매 역시 셀리더이다. 그러나 진영 씨가 고등학교만 졸업한 데 비해 자매는 유명 대학의 대학원까지 나왔고, 가정형편 또한 큰 격차가 있어 쉽게 상식(?)이라는 걸 들이대면 맺어지기가 어려운 관계였다. 그러나 염 목사를 비롯해 다른 셀리더들이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그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 준 덕택에 결혼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염 목사와 셀리더들은 두 사람의 결혼이 동심교회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결혼관을 심어주기를 내심 기대한다. 가진 것, 배운 것, 그런 것이 결혼의 조건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진영 씨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읽는 사람은 양혁진 씨다. 역시 교회 식구들로부터 사랑의 빚을 가득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 최덕신 씨와 함께 주찬양선교단의 멤버로 활동하다가 염 목사와 '영적인 아비-자식' 관계를 맺고 동심교회에서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진영 씨와 한 방을 썼다.

지금 아내 역시 염 목사의 도움으로 교회에서 만났다. 가구에서 주방용품까지 혼수품 대부분은 교인들이 하나씩 선물한 것들이다. 이런 사랑 때문에 혁진 씨에게 교인들은 모두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며, 무엇보다 이런 가족을 얻은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 혁진 씨가 며칠 전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날 밤 날씨가 꽤 추웠어요. 보일러에 기름이 남아 있어서 방에 불을 넣고 누웠는데 진영이 생각이 나더라구요. 옥탑방 추운 것을 제가 잘 알잖아요. 녀석 생각하니 눈물이 나는 거 있죠. 그래서 전화해서 우리 집에 오라고 해서 같이 자게 됐죠.

저녁을 옳게 먹지 않은 것 같아 뭐 먹고 싶냐고 물었더니 통닭을 먹고 싶대요. 그런데 그날따라 주머니에 돈이 없었어요. 할 수 없이 자정을 넘은 시간에 지하철역까지 내려가서 돈을 빼다가 통닭을 사왔는데 진영이가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건 제 처지가 아니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그들의 이야기는 벌써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집이 먼 몇몇 자매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차를 가진 형제들의 도움을 받았다. 직장 갔다가 늦게 참여한 가족은 뒤늦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셀을 새롭게 편성하는 문제로 때로는 격론이 오가기도 했지만 염 목사가 아버지처럼 격려해준 덕분에 다시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염 목사는 모난 돌이 이렇게 부딪쳐서 깎이지 않으면 영원히 모난 돌 그대로 남을 것이라며 이를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그야말로 가족이었다.

▲염상만 목사 ⓒ뉴스앤조이 김승범
염 목사가 가정교회로 돌아 설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모임에 앞서 만났던 염 목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사람은 늘고 교회는 커가는데 정작 목사인 저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와 다른 이상한 교회였습니다. 1995년 미국 버클랜드침례교회에 갔다가 비로소 거기서 참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후 몇 년의 고민 끝에 저는 가정교회로 돌아서야 했습니다. 교회 같은 교회가 아니라 성경 속의 바로 그 교회, 가족으로서의 교회공동체, 그 실체를 보고 싶었습니다. 교회는 가족이고 몸이며, 하나님나라인데 그렇게 정의된 성경의 교회를 찾아야 했습니다.

가정교회로 전환하면서 마치 교회를 새롭게 시작하듯이 모든 구성원들이 자신의 직분이나 교회에 대한 기존관념들을 내려놓도록 했습니다. 결국 이런 생각을 함께 갖지 못한 많은 분들(150여 명)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절반이 넘는 인원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내 이념보다 영혼에 대한 애착이 우선인데 '다른 교회'를 향한 열정이 더 컸기 때문이에요."


그들과 함께 그의 말처럼 "똑똑한 엄마보다 사랑 많은 엄마가 자식을 잘 기른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헌신했다. "사랑으로 자기를 낭비하고 허비하고 뜯어먹히면서"(염 목사) 여기까지 왔다. 이런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켰고, 사랑은 또 전염병처럼 다른 이들에게 퍼져 나갔다. 지금은 결국 이런 사랑과 변화 만큼 동심교회는 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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