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는 '하느님'이라 표기돼 있지만 글에서는 '하나님'으로 모두 맞췄습니다. 발췌한 경우에는 '하느님'으로 표기했습니다. - 필자 주

"전쟁 반대로 충분한가? 나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아시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갈 때 북아메리카와 다른 곳에서 수백만 톤의 밀을 비축하고 있다면 전쟁이 아닌가? 수많은 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몸을 팔고 어린 인생을 파멸시키며 수많은 생명이 낙태되는 상황은 전쟁이 아닌가? 누군가 기본 생활비에도 못 미치는 돈을 벌 때 또 다른 누군가는 엄청난 은행 예금을 갖고 있다면 이것은 전쟁과 같은 상황이 아닌가?" (21~22쪽)

책 표지에 적힌 글이다. 필자의 마음을 확 사로잡았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는 정치적인 전쟁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고 있는 모든 상황을 전쟁이라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히브리어 단어 '샬롬(shalom)'이다. 샬롬은 단순히 전쟁과 갈등이 끝난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정, 만족, 건강, 번영, 풍요, 평안, 자연과의 조화, 구원까지 포괄하는 평화로운 상태가 샬롬이다. 샬롬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실현된 것이며, 모든 이들에게 허락된 것이다(24쪽). 이 기준으로 봤을 때 현재 세상은 샬롬하지 않다.

배신감이 드는 '평화의 역설'

▲ <평화주의자 예수> /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 이진권 옮김 / 샨티 펴냄 / 270쪽 / 1만 2,000원

그래도 우리는 모두 '샬롬한 세상'이 올 것을 늘 갈망한다. 예수께서는 평화를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예수는 평화 대신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다(마 10:34). 당연히 평화를 주러 오셔야 할 것으로 생각했던 예수께서 칼을 주러 왔다고 했다니, 배신감마저 느껴진다. 특히 예수가 말씀이 오용되어서 생기게 될 일을 생각하니 끔찍할 뿐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폭력을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을 읽는 순간 성경을 덮어 버리고 싶다. 더 놀라운 것은 '칼을 주러 왔다'는 말 뒤에 있는 예수의 발언이다. "내가 온 것은 (중략)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 10:35)라는 말씀까지 하셨다. 평화는커녕 세상에 칼과 불화를 주러 오신 분이 예수시란다.

요한 크리스토퍼 아놀드는 이런 예수의 말씀을 '역설적'이라고 했다. 예수가 하신 말씀하신 칼은 진리를 뜻한다. 진리를 따르려는 그 삶이 예수가 말씀하신 칼이다(42~43쪽). 그리고 예수께서는 '세상적인 평화'를 깨시려고 하셨다.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은 고난이 될 수가 있다. 안락하고 편안한 삶 대신에 십자가를 져야 하는 힘든 길이 될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러니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이 땅의 기준'으로 봤을 때에 평화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봤을 때의 평화가 예수가 말씀하셨던 평화다. 말뿐 아니라 예수의 삶에서 이 역설이 더 잘 드러난다. 예수가 평화를 주러 온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였기 때문이다.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 예수가 보여 준 평화

"예수는 정치법으로 처형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제국의 악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탐욕에, 그리고 당시의 죄악과 부정에 맞서서 싸웠기 때문이다. 예수는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 병든 자와 억압받는 자를 변호했다." (246쪽)

평화 대신 칼을 주러 왔다는 이 역설은 예수의 삶을 통해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예수는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이셨다. 트러블 메이커는 우리말로 '말썽꾼'이다. 예수는 도발적인 발언과 행동으로 사회에 온갖 말썽을 일으켰다.

예수의 모습은 다른 성인들과 달랐다. 독사의 자식(마 3:7, 눅 3:7)이란 욕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독사의 자식은 한국식으로 번역하면, '개새끼'가 아니겠는가).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엎어 치워 버리기도 했다(눅 19:45-48, 요 2:13-25).

그뿐 아니다. 바리새인들과는 온갖 논쟁을 하며 당시 금과옥조로 여겼던 유대교 율법도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엘리트들과의 인맥을 만드는 것을 포기해 버리셨다. 하층민조차 미워했던 죄인들과 먹고 마셨다. 가장 비천한 자들을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으로 세우며 당대 질서를 무너뜨렸다. 예수는 트러블 메이커 그 자체였다. 그런 예수를 당대에는 '평화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썽꾼 예수'의 삶을 따르는 것이 기독교인이다. 옳지 못한 세상에 대한 투쟁이 평화를 누리기 위한 방법이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를 우리의 온몸으로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예수가 말씀하신 평화가 시작된다. 예수가 '세상이 말하는 평화'를 택하셨다면,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거나 당시 기득권층과 맞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과 타협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사회와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셨다. 마태복음 말씀처럼 평화 대신 칼을, 불화를 일으키러 온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를 가로막는 모든 것과의 투쟁이 예수께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택한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저자는 "평화가 투쟁을 요구한다"(31쪽)고 말한다. 그 결과로서 예수는 정치범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진리를 따랐던 예수의 삶이 세상적 기준으로 평화로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평화로운 삶일지 모른다. 하나님나라의 평화를 실현하고자 일평생 치열하게 살다 돌아가신 분이 예수다. 예수가 치열하게 추구했던 평화는 후에 성경에 기록됐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많은 이가 하나님나라에 대해 알고, 믿게 됐다.

연약함 인정하고 이웃과 함께해야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는 평화를 얻기 위한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이웃과 함께해야 한다고 말한다.

연약한 이들이 투쟁에 동참할 수 있다. 투쟁하라고 하다가, 갑자기 연약함이라니. 투쟁은 강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 같다. 누군가와 싸울 힘과 용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연약한 이들이 평화를 위한 투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약한 이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가 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투쟁에 참여하는 것은 쉬운 일이 결단코 아니다. 자신이 가진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개신교 공동체 리더인 저자조차도 여러 번 흔들렸다. 한 예로 저자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 물신(物神)을 숭배하는 것 사이에서 흔들렸다(206쪽)"고 고백한다. 인간은 평화를 누리기 위한 과정에 쉽게 동참할 만큼 강하지 못하다. 동참하더라도 우리는 해결책을 제대로 제시치 못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연약함을 인정함으로 평화에 다가갈 수 있다. 물론 저자는 평화를 위해 치열하게 맞서라고 말한다. 맞서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찾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한 투쟁에 참여해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사는 과정에서 우리는 연약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88쪽).

평화는 함께 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는 평화를 누릴 수 없다고 말한다. 대신 이웃에 대한 헌신으로 평화를 맛볼 수 있음을 말한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자신의 소풍만을 위해 기도하고 비가 필요한 농부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예수가 가르친 것과 정반대로 행하는 셈이다." (106쪽)

저자는 예수의 평화가 자신이 내일 소풍을 가기 위해 농부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가 가르치셨던 평화를 위해서는 이웃과 공존해야 함을 의미하는 말이다. 자신만을 위한 평화를 누리기를 거부하는 삶 역시 예수가 말한 평화의 길을 위한 싸움이다. 내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남과 공존해야 함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함께해야 한다고 말한다.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가 이웃 간의 사랑이기에 그렇다.

연약함과 이웃과 함께하는 것은 자신의 평화를 깨는 과정이다. 세상이 주는 안락함을 포기할 때, 마음속에 솟구치는 욕심과 싸워야 한다. 다른 이들의 슬픔을 외면할 때 누릴 수 있는 평화에 트러블을 일으켜야 한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이렇게 트러블 메이커가 된다.

평화는 트러블 없이 사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세상은 전쟁 중에 있다. 문제는 악한 세상에 순응하는 것이 평화라는 착각 속에 사는 것이다. 악에 대한 아무런 트러블 없이 사는 것은 평화가 아니다. '평화주의자'인 예수가 다시 이곳에 왔다면,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세상의 평화에 트러블을 일으켰을 것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영적 전쟁'도 각오해야 한다.

이 전쟁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예수의 평화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저자는 이 일은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는 게 아니라고 설명한다). 이 평화를 위한 전쟁을 치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예수를 닮은 '트러블 메이커'가 될 것이다.

예수는 세상 속에서 트러블 메이커(말썽꾼)였을지 모르나, 하나님나라 관점에서는 평화주의자였다. 하나님나라의 평화를 짓밟는 모든 것에 트러블을 일으켰고, 이를 통해 평화를 추구했다. 그랬기에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가 예수의 평화가 '역설적'이었다고 표현한 듯하다.

지금도 예수의 삶처럼 사는 트러블 메이커들이 있다. 가난한 정의의 길을 걷다가 외톨이가 된 사람, 강자의 부당함을 지적하다가 곤란해진 사람, 예수 믿고 자발적 가난을 택한 사람, 하나님과 이웃에게 헌신하기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한 사람 등이다. 이러한 트러블 메이커들의 삶은 세상이 주는 평화하고 거리가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얘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간증되고 회자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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