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 공간이 협소한 우리 아파트 주차장으로 밤늦게 들어갈 때, 마음을 졸였다. 제발 내가 주차할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어두컴컴한 밤. 안쪽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을 때 아무 데도 주차할 공간이 없으면 후진으로 나와서 주차 공간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안쪽에 주차 공간이 하나 비어 있었다. 쾌재를 부르면서 후진으로 차를 세우려는 순간, 뒤쪽에 다른 차가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먼저 주차 공간을 보고 깜빡이등을 켜고 주차하겠다는 신호를 보냈으니 그곳은 내가 선점한 주차 공간임이 틀림없었다.

다른 차에 대해 약간의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밤중에 그분이 헤매며 주차 공간을 찾을 것이라 생각하니 연민도 느꼈다. 한편으로는 운 좋게 주차를 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교차하면서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내 차창 옆에 한 사람이 서서 문을 두드리는 게 아닌가.

창문을 열고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내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운전을 그런 식으로 하느냐며 항의했다. 술기운 가운데 하시는 말을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략 어느 시점에 내가 운전을 잘못해서 위협적으로 느꼈고, 내 차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거칠게 항의하는 게 아닌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 운전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신호에 따라 운전했고 항상 그렇듯 상대 차량들에 양보하면서 운전해 왔다. 도대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다는 말인가. 아무리 문제될 만한 상황을 생각하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나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내 앞에 서 있으니 말이다.

'혹시 이분이 다른 사람과 나를 혼동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이분이 잘못해 놓고 나에게 덮어씌우는 것은 아닐까'. 별별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한 채 이분에게 큰 실수를 했을 가능성 말이다.

이분이 지금 술기운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그 상황에서 그분이 100% 잘못했고, 내가 100% 옳았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었다. 특정 상황에서 잘하고 잘못했는가는 당사자가 평소 착한 사람이었나, 아니었나 여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듯이 말이다.

한국에 살면서, 특히 대구에 살면서 이런 순간 큰소리치는 게 유리하다는 말을 계속해서 주입받아 왔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죄송하다고 했다. 적어도 현상학적(現象學的)으로(phenomenologically) 그분을 화나게 만들 만한 무엇인가(Ding an sich)가 내게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일이 있어도 이해해 주는 게 성숙한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겠지만, 그건 그 사람 문제일 뿐이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운전했는지 전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선생님을 화나게 만든 그 무엇이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너그러이 이해하시고 마음 푸이소."

그분은 같이 있던 일행 손에 이끌려 다시 돌아갔다. 그제야 나와 내 아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참 많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했는데, 오히려 그게 아이들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선한 의도로 한 일인데, 결과적으로 화재 원인이 되기도 하고 재앙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별 악한 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가 가정을 무너뜨리고, 심심해서 던진 돌에 연못 안 개구리는 목숨을 잃는다. 알지 못하고 행했다고 해서 잘못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의로 지은 죄에 대해서만 속죄제를 드리면 된다고 하지 않는다. 부지중 지은 죄도 이렇게 규정했다.

"회중이 부지중에 범죄하였거든 온 회중은 수송아지 한 마리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고 규례대로 소제와 전제를 드리고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라." (민 15:24)

매일 밤마다 주님 앞에 엎드린다. 주여, 부지중 지은 죄도 용서해 주시고, 이로 인해 고통받은 자들 마음도 위로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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