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만큼 열매가 없다

▲ <영혼의 밤> / 최호진 지음 / 홍성사 펴냄 / 224쪽 / 1만 3,000원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으며, 기도회와 교회 여러 가지 공부나 봉사 활동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을 우리는 믿음이 좋은 분으로 생각한다. 분명 겉모습은 흠잡을 데 없는 믿음의 모델이 될 만한 분이다. 그런데 그가 믿을 만한 사람에게 자기 마음의 상태를 쏟아 놓았다. 17년 동안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문제였다.

기도도 해 보고, 목사님이나 권사님께 고민을 살며시 상담하려고 하면 돌아오는 "기도하라"는 말에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말 못 하며, 새벽 기도회, 금요 기도회, 각종 예배 시간에 눈물을 훔쳤는데, 목사님과 다른 성도들은 은혜를 받는구나 착각을 한다. 그녀가 그렇게 새벽부터 밤이 늦도록 매일 교회에 나가는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고통을 하나님으로부터 해결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렇게 17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독자 중에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태도이다'라는 식으로 섣부른 판단을 하시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위의 내용은 필자가 요지를 드러내기 위해 상담 내용 중 고통의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그녀의 신앙관은 매우 건강했다. 또한 그녀가 다니는 담임목사님과 모든 성도들로부터 신임과 모범이 되는 신앙인이다. 필자는 이러한 내담자들을 계속적으로 만나고 있다.

본서에서 "전도의 열정만큼 내적인 열매는 없다"는 언급은 성도들 내면을 들여다본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교회에서 열심을 내는 성도들 겉모습을 보고 그들 내면이나 믿음이 건강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입을 다문 성도들

목회자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목사님 앞에서 하는 말은 앵무새가 주인의 말을 반복해 복창하는 것과 유사하다. 목사님이 가르치고 원하는 말을 반복한다. 그들의 마음을 솔직하게 쏟아 놓을 때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판단받을 것을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거나 교과서(성경)적(기도하라)인 답이 돌아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원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성도들도 답은 알고 있다. 성도들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 그 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이다. 수학 문제를 풀 때 풀이 과정과 답을 함께 요구하는 문제에, 풀이 과정은 적지 않고 정답만 기록하는 꼴이다. 이러한 목사님의 답은 '나의 믿음이나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다'라는 죄책감만 키워 간다.

하지만 그들 삶에서 풀어 가야 할 문제들은 기도만 한다고 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더 많이 한다고 그들이 놓치거나 모르고 있는 문제를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각한 것은 성도들 삶의 현장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삶의 현장을 외면하거나 회피하고 종교적으로 접근하게끔 한다는 사실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목사님과 교회에서 입을 다문 성도들은 혼자서 기도하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상담소'를 찾게 된다. 적어도 상담소에서는 그들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그들의 고통을 판단하지 않고 공감해 준다. 신학을 하신 목사님들은 이제 인간학을 공부하셔야 한다. 지금의 교회는 상담소를 설치해야 한다. 비전문적인 신앙심이 높은 분이 아니라, 비싼 급여를 주더라도 기독교 상담 전문가를 양성해야 하고 전문 상담소를 설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기독교 상담소로 성도들을 내몰아 신앙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영혼의 밤의 정의

본서는 '영혼의 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영성학이나 신학에서 '영혼의 밤'이라는 용어를 이미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본서가 의미하는 '영혼의 밤'은 영성학이나 신학에서 의미하는 것과는 다르다. 저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듯한 절망의 시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말은 포괄적으로 표현한다면 아무도 없는 자기 홀로 있는 듯한 절망감을 느끼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듯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본서가 비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두고 있다는 것이고, 겉보기로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는 그리스도인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생의 고난', '인생의 문제'로 표현하지 않고 '영혼의 밤'이라고 표현한 것은 본서가 다루고 있는 주된 대상이 '마음', '심리', '정신'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저자는 목회자는 아니지만 신앙적으로, 학문적으로 그 내공이 범상치 않다. 심리학적 방법과 이론을 베이스로 하고 있지만, 그것을 신앙생활로 변환하고 적용하는 능력을 보여 준다. 심리적, 정신적 문제가 신앙생활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는 현재 교회의 외적 편향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인위적(人爲的) 신앙과 신위적(神爲的) 신앙

저자는 본서에서 '인위적 신앙'과 '신위적 신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기독교 교육학에서 사용하는 '인본주의', '신본주의'라는 용어와 구별하기 위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필자가 이해하기로 '인위적 신앙'은 자기중심적 신앙, '신위적 신앙'은 하나님 중심적 신앙으로 이해된다.

즉, 저자는 현재 교회 안에 믿음이 좋아 보이는 성도들 중에도 자신의 믿음이 자기중심적 믿음인지 아니면 하나님 중심적 믿음인지를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영혼의 깊은 밤'을 만나는 원인 중 하나가 '자기중심적 믿음'의 열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본서가 기록된 목적이 '인위적 신앙'에서 '신위적 신앙'으로 변환하게끔 도와주는 데 있다.

믿음과 심리학의 만남

심리학을 진지하게 공부해 보지 않은 그리스도인들 중 심리학을 세상의 학문으로 여기고 있거나, 반기독교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필자는 이러한 선입견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한다. 이미 우리가 접하고 있는 대중매체 모두가 기독교적 기반이 아니다. 또한 토크쇼 패널에 참여하는 사람이 교회에 다니는 분이라고 하여 그 프로그램에서 기독교적 관점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들의 전문 지식과 관점을 부분적으로 참고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전문성이다. 교회에서 배우지 못하는 여러 이론이나 관점, 방법을 접하고 수용할 때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 식으로 수용한다. 필자는 여기에 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전문가가 말을 할 때 거부하거나 그 말을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 자신이 그것을 정말 정확하게 분별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전문가들이 전문 지식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가 그들의 말을 정확하게 분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다.

그리스도인이 심리학적 지식을 사용한다고 하여, 하나님의 방법 외에 세상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식의 편견은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그 분야에 대해 이해가 어렵다면 배척이 아니라 연구를 해야 한다. 그래서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본서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심리학적 전문 지식이 이루어 낸 훌륭한 결과물이다.

본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열렬히 주님을 믿고 따르고자 하지만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육신의 문제로 더 이상 신앙 성장을 멈추고 있는 이들을 조명한다. 정체된 신앙을 성장하기 위해 외적인 성경 공부와 봉사로 발버둥을 치는 성도들을 상담하면서, 그들이 빠져 있지만 모르고 있는 '육신'의 함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종속 의존 육신', '성과주의 육신', '종교 중독' 등으로 진단하고 있다.

위 네 개 용어 또한 필자가 처음 접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훌륭한 정의라 생각된다. 만약 저자가 이러한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를 계속 발전해 가기를 바란다.

50대 이상인 그리스도인의 필독서

개인적으로는 본서를 학술적 논문에는 조금 못 미치고, 그러나 매우 전문적이고 새로운 관점을 시도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쉽게 읽어가기는 어려운 내용과 전개 방식을 보이고 있는 책이라고 평가한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영혼의 밤'을 대비하거나, 과정 중에 본서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어느 정도 인생을 경험한 40대 후반, 50대 이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발달심리 관점에서 이보다 더 이른 나이에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은 큰 외상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너무 이른 나이에 '신위적 신앙'으로 들어서게 될 경우, 그 이후 삶이 '심각한 종교 중독'으로 치우쳐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욕구'가 '육신'이 아니라 생각하기에 '인위적 신앙'에서 '신위적 신앙'으로 전환할 시기를 최소 40대 후반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인위적 신앙'에서 '신위적 신앙'으로의 전환은 매우 중요하고도 힘들고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다. 자신을 성찰하기보다 외적 성장에 익숙한 한국교회 성향을 볼 때 이러한 전환 과정을 놓치고 인생을 마치는 성도가 절대다수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인생의 후반기에는 생명을 연장하거나 많은 업적이나 성과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주님 만날 준비에 충실해야 한다. 그 준비에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깊은 밤'으로 우리를 초청하시는 게 아닐까? 그러한 준비를 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본서가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강도헌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제자삼는교회 담임목사, 프쉬케치유상담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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