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A는 여느 때처럼 집을 나와 독서실로 향했다.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뒤에서 한 남성이 갑자기 달려와 A의 가슴을 움켜쥐고 도망쳤다.

그 찰나의 순간, A의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이런 건 뉴스에서 보는 것처럼 "야한 옷차림"이나 "밤늦은 귀가길"에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대낮에 평범한 옷차림으로 다니는데 왜 이런 일을 당했을까. A가 고등학생 때 일이었다.

오토바이를 탄 한 남성이 B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유유히 지나갔다. B는 그저 집에 가는 길이었다. 오토바이는 벌써 사라졌고, B는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이게 뭐지? 성추행을 당했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서 있다는 게 너무 분하고 수치스러웠다.

경찰에 신고할까? 그 남자가 날 찾아오면 어떡해. 지인들에게 털어놓으니 말한다.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다음부터 조심해." 똥 밟았다고 생각하면 잊혀지는 걸까? 그런데 이제 오토바이만 봐도 움츠러든다.

▲ 여성들의 '말하기'가 시작됐다. (사진 제공 한국성폭력상담소)

일상적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입을 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9월 21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길거리 괴롭힘 성폭력 성희롱 말하기 대회'(말하기대회)를 열었다. 여성 6명이 각각 5~10분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당한 일을 말했다.

70여 명이 모여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오픈 채팅방에서도 대화가 활발했다. 자신이 겪었던 길거리 괴롭힘, 성폭력을 토로했다. 경험을 털어놓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분노와 억울함으로 떨렸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그날 그들을 덮쳤던 수치심과 무력감, 모멸감은 여전히 생생하다.

사전 신청해 참석한 사람 외에도 지나가다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서서 여성들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있었다. 젊은 여성과 중년 여성이 많았고 젊은 커플, 중년 남성도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용기 있게 자기 경험을 꺼낸 사람들을 지지해 주었다.

여성에게 이런 경험은 '흔하다'. 너무 흔해서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던 일이다. 그러나 아무 이유 없이 당하는 성폭력이 흔하다고 해서 당연한 일은 아니다. 피해자가 잠깐 기분 더럽고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벌어진 강남역 살인 사건. 경찰은 이 사건이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했다. 강신명 당시 경찰청장은 "아직 대한민국에는 혐오 범죄가 없다"고 단언했다. 이번 말하기 대회 오픈 채팅방에는 학창 시절 겪었던 '바바리맨'에 대한 경험담도 쏟아졌다. 채팅방에 있던 한 남성은 "바바리맨이 진짜 있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없다고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은 그런 피해를 입어 본 적이 없으니까.

여성들은 "혐오 범죄가 없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여태껏 자신들이 직접 겪어 온 일이기 때문이다. 토론자로 참여한 한 패널은 말했다. "집에서 엄마에게 말하기 대회를 한다고 하니까 '요즘에도 그런 일이 있느냐'고 하시더라. 엄마도 젊었을 때 그런 일을 겪으며 자랐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일상적인 성폭력이 대를 이어 계속된다. 여기는 강간의 왕국인가?

'엉만튀' '슴만튀', 폭력은 유희가 아니다

A가 겪은 일은 요즘 말로 '슴만튀'라고 한다. '가슴 만지고 튀기'의 약자다. B가 겪은 일은 '엉만튀'다. 뭔가 재밌는, 세련된 말처럼 보이지만 엉만튀, 슴만튀는 폭력이다. 말하기 대회에 모인 여성들은 이런 표현이 범죄를 마치 놀이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이야기했다.

'바바리맨'도 그렇다. 범죄라기보다 '웃기다'는 느낌이다. 최근 한화 불꽃 축제 광고에 '여고 앞 바바리맨'이 들어간 걸 보면, 광고 제작자들이 바바리맨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 수 있다.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엉만튀, 슴만튀는 하나의 놀이 문화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여성들 몸을 강제로 추행한 게 영웅담이 된다. 잠깐 만지는 게 무슨 범죄냐고, 장난인데 뭐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냐고 말한다. 자신들이 만지는 시간이 짧은 것처럼, 여성들이 느끼는 수치와 더러운 기분도 잠깐이면 지나갈 것이라 생각한다.

말하기대회에 나온 C는 "화가 나는 건, 내 엉덩이를 만진 그 사람이 느꼈을 짜릿함이 지속되는 시간보다, 엉만튀를 당한 내가 느낀 이 부정적인 기억과 감정이 아마 훨씬 오래갈 것 같다는 예상 때문이다. 이건 불공평하다. 그들을 찾아서 '그때 나한테 왜 그랬느냐'고 물어봤을 때, 그 사람들이 '그냥 하고 싶어서 그랬는데' 같은 허무한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아서 차마 물어보지도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A는 성추행을 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나가는 여성들이 모두 고깃덩어리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자기보다 완력이 강한 사람에게 언제든지 만져질 수 있는 육체라는 사실에 허탈하고 화가 났다고 했다. 엉만튀, 슴만튀는 여성을 인격체가 아니라 가슴과 엉덩이로, 욕정을 푸는 물체로 대상화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패널 넷이 대회를 진행했다. 왼쪽부터 <계간홀로> 발행인 이진송 씨, 한국성폭력상담소 잇을 활동가, <이기적 섹스> 저자 은하선 씨, 싱어송라이터 신승은 씨. (사진 제공 한국성폭력상담소)

지속적으로 성폭행 당한 사람은 인생이 뒤틀린다. 말하기 대회에는 8살 때부터 친아버지에게 상습적으로 학대를 받은 사람도 나왔다. 그 여성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는 아버지를 처벌하고 싶지만 법적으로는 어렵게 되었다며, 자기 스스로 아버지에게 120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주변의 모두를 돌아봐 달라. 모두가 폭력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가해자를 똑바로 노려봐 달라"고 호소했다.

여성들은 이런 경험을 말하기가 쉽지 않다. 어렵게 경찰서에 신고해도 "빨리 신고하지 왜 이제 왔느냐", "그런 경우 잡기가 쉽지 않다", "그냥 한번 봐 줘라"는 말을 듣기 일쑤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왜 상황을 복잡하게 하느냐는 뉘앙스를 준다.

가족이나 친구도 마찬가지다. "그러게 왜 여자 혼자 다녀", "네가 예뻐서 그런 거야"라는 말을 건넨다. 마치 범죄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는 것처럼. 이런 말을 들은 피해자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검열하게 된다.

말하기 대회 중간에도 술에 취한 듯한 중년 남성이 시비를 걸어 스태프들은 그와 실랑이를 해야 했다. 아저씨는 뒷짐을 지고 삿대질을 하며 훈계하듯 여성 스태프에게 뭐라 뭐라 소리쳤다. 한 스태프가 아저씨를 데리고 가 큰 소요가 일지는 않았지만,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말하는 게 아직도 이렇게 힘들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오픈 채팅방에는 "이렇게 길거리 성폭행이 흔하고 비슷한 패턴인데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무도 안 알려 주죠"라는 성토가 이어졌다. 여성들은 연대하기로 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피해를 당한 사람 옆에 있어 주고 증인이 되어 주자고. 가해자를 향해 질타의 시선이라도 보내자고 했다. 또 이렇게 모여 어떻게 조치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여성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상상하고 이야기하자고 했다.

이번 말하기 대회는 오픈 라디오 형식으로 진행됐다. 녹음본은 10월 중 팟캐스트로 공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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