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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미래와 교회의 대응
[서평] 진중권 <진중권의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창비)
  • 이원석 (dkdndn2@naver.com)
  • 승인 2016.09.2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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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여기에서 다룬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창비)을 가지고 9월 26일(월) 오후 7시 30분부터 2시간에 걸쳐 빅퍼즐문화연구소에서 독서 모임(톨레레게)을 진행합니다. 톨레레게는 독서를 통한 성장과 자유를 바라는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오시는 길은 아래 링크에 안내되어 있습니다. 참가비는 5,000원입니다.

링크 바로 가기: http://bigpuzzle.co.kr/xe/map_contact

진중권은 내게 선생님이다. 한동안 그에게 수업을 들었고, 학점을 받았다. 과제를 제출하고, 소감을 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나의 글 선생이다. 그를 만나기 전, 나는 오랫동안 글을 써 왔다. 내 글에 대한 외부 평가는 좋았으나, 나 자신은 만족할 수 없었다. 지금보다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내가 쓴 글을 그는 한마디로 평가했다. 그 한마디에 내 글이 나아갈 방향이 담겨 있었다. 그동안 찾던 글쓰기 선생을 마침내 만난 것이다. 이미 그때는 내 문체가 나름 형성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하나 그의 고언은 나의 글쓰기를 밑바닥에서 돌아보게 만들었다. 아마 언어와 사고 패턴이 유사한지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벌써 10년이 지난 이야기이다.

나는 여전히 진중권을 선생님으로서 존경하며, 그로부터 배운 바로 인해 깊이 감사한다. 여전히 그의 글을 읽고 계속 배우고 있다. 그러니 '공부의 시대'라는 창비의 시리즈 기획물 중 하나로 나온 진중권의 책을 읽은 것은 당연하다. 이 시리즈는 강만길, 김영란, 유시민, 정혜신, 진중권 등이 공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강의한 것을 다듬어 책으로 펴낸 것이다.

시장의 인문학

   
▲ <진중권의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 / 진중권 지음 / 창비 펴냄 / 160쪽 / 7,000원

서문에서 인문학 붐을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소개되는데, 그 가운데 나의 책(<인문학 페티시즘>)도 언급되었다(5쪽). 여기서 나는 인문학의 본질에 대해 언급하였다. "문제는 인문학의 본령, 즉 무용성이 배격되고 실용성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인문학 페티시즘>, 16쪽) 비판의 날을 앞세운 나머지 순수 본질을 강조하는 플라톤주의자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진중권의 반응은 다음의 문장에 담겨 있는 것 같다. "인문학을 상품화하는 광대들의 페티시즘보다 나를 더 불편하게 하는 것은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려 드는 이들의 플라톤적 독단이다."(5~6쪽) 내가 인문학의 본질에 대해 떠들고 있는 태도를 꼬집으시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자의식과잉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여전히 나의 선생이기 때문일 게다.

나는 이를 시장과 인문의 관계로 풀었다. "자본이 인문학의 유용성을 묻기 때문이다. '과연 인문학은 돈을 벌 수 있는가' (중략)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궁색해진 인문학은 본격적으로 시장 안으로 들어왔으니, 자연스런 적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문학이 상품이 된다는 것은 실용성을 추구한다는 것과 동일한 뜻을 가진다." (<인문학 페티시즘>, 16~17쪽)

그의 답변은 아마도 이게 아닐까 싶다. "시장의 인문학은 피상적이다. 하지만 나는 그 피상성을 예찬하는 편이다. (중략) 그 피상적 표면이 인문학과 대중이 만나는 인터페이스다. 나는 그 시장의 광대들의 상업적 성공에서 외려 많은 것을 배운다."(7쪽) 이는 위악적 수사가 아니라 빌렘 플루서의 <피상성 예찬>(커뮤니케이션북스)을 염두에 둔 이론적 언술이다.

인문학의 본령

사실 진중권도 나름의 방식으로 인문학의 본질에 대해 말한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인문학의 본령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인문학은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묻는 학문입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삶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에 대한 물음입니다."(104쪽) 그가 말하는 새로운 인문학은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대응이다.

나는 프롤로그에서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것이 인문학이 처한 현실이다"(17쪽)라고 현실을 평가하고, 에필로그에서 "인문학의 '공부는 다른 삶, 다른 세상을 꿈꾸'며, '현실화하는 일'이다"라고 본질을 규정했다. "그 자체를 위해 존재"(17쪽)하는 인문학의 무용성은 진중권이 말한 "삶의 '목적'"에 상응하는 존재론적 차원을 염두에 둔 것이다.

나의 책(<인문학 페티시즘>)은 비판이다. 대화를 시도하되, 부정적 현실을 비판하였다. 선명성을 부각하고자 날을 세워 표현한 것이 독단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진중권의 책(<테크노 인문학의 구상>)은 대안이다. 비판을 수용하되, 긍정적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대화적 접근, 가령 자본주의의 어떤 측면에 대한 언급은 변질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

이는 인문학의 위기에 대응하는 서로 다른 방식이다. 나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에 가깝고, 진중권은 긍정의 길(via positiva)에 근접한다. 그러나 인문학의 위기는 오래된 현상이다. 더욱이 현재는 (기업과 대학의 결착으로 드러나는) 거시적인 사회변동과 (인터넷에서 대중이 소통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미디어 패러다임의 변화로 인해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제 좀 더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에 집중하기로 하자. 진중권이 생각하는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은 미디어적 전환의 문제의식에 따라 존재론과 인간학과 사회학의 세 가지 방면으로 새롭게 구성된다. 여기서 일단 전제될 것은 디지털 테크놀로지 중심의 우리 시대 특유의 미디어 패러다임 변화와 더불어 미디어 자체에 대한 관심의 증대이다.

"옛날에는 세계가 의식에 주어진다고 믿었는데, 그 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고, 그 언어도 결국 매체에 따라 상이한 효과를 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매체를 알아야 한 거죠. 바로 이런 인식에서 21세기에 들어와, 아니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미디어적 전회라는 것이 일어납니다." (59~60쪽)

진중권의 인문학 작업 또한 이런 매체적 전회 안에서 진행된다. 디지털의 존재론은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현실의 개념을 어떻게 바꿔 놓고 있는가?"를, 디지털의 인간학은 "디지털 혁명 이후 사회의 이상적 인간형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디지털의 사회학은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인간이 협업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가?"를 묻는다(60쪽).

디지털의 존재론, 파타피직스

디지털 시대의 존재론은 파타피직스(pataphysics)이다. 이는 두 권으로 나누어 출간된 <이미지 인문학>(천년의상상)에서 이미 강조되었다. 원래 20세기 중반 유럽에서 유희적으로 사용되던 개념인데, 이를 통해서 진중권은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 AR)과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 등의 방식으로 가상과 현실이 서로 중첩되는 상황을 지칭한다.

비트(디지털 가상)와 아톰(물리적 현실)이 중첩되고, 양자의 차이가 소실된다. 아톰에서 비트로의 흐름과 비트에서 아톰으로의 흐름의 결합을 넘어서 비트=아톰, 즉 정보와 사물이 중첩된다.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로 존재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마냥 그가 "'파타피직스'라 이름 붙인 오늘날의 디지털 세계는 양자역학적 상황의 패러디인지도"(77쪽) 모른다.

디지털의 인간학, 호모루덴스

디지털 시대 인간학으로 진중권은 호모루덴스를 제시한다. 이는 네덜란드 문화사가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의 개념인데, 그는 이것을 호모사피엔스의 시대, 즉 근대 이후 시대의 인간형으로 내세운다. 근대 자본주의의 인간형으로서의 경제인(=지성인+직업인)을 대신하여 새로운 유희인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 성격 자체의 변화가 자리한다.

"산업혁명으로 시작하여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던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생산 자본주의'였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 자본주의는 급속히 소비 자본주의로 모습을 바꿔갑니다. (중략) 이 소비자본주의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만나 '기호 자본주의'(semio-capitalism), '미적 자본주의'(aesthetic capitalism), '유희 자본주의'(ludo-capitalism)의 형태로 전개됩니다." (85쪽)

"정보화사회에서는 노동과 여가가 시간적·공간적으로 명확히 구별되지 않습니다. (중략) 디지털 시대에 노동의 수단과 오락의 수단은 일치합니다. 오늘날 대중은 컴퓨터로 일하고, 컴퓨터로 놉니다." (92쪽)

디지털의 사회학,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디지털 시대의 사회학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밝힌다. "제가 아직 건드리지 못한 것은 디지털의 사회학입니다."(61쪽) 그래서 현재는 저술을 통해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강연을 통해 부분적으로 건드리는 중"이다. 바로 이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과 같은 강연에서 그는 대중을 향해 단편적인 방식으로 잠정적인 아이디어를 던지고 있다. 가령 이렇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본주의의 성격 자체가 미학적·유희적 자본주의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 변화에는 물론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겠지요. 좋은 면이라면 노동이 유희가 되고 생산이 예술이 되는 오랜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실현되고 있다는 측면이겠지요. 그리고 나쁜 면이라면, 그 공산주의적 유토피아가 인간들의 자유로운 결정의 결과가 아니라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인간에게 강요되고 있다는 점이겠지요." (99쪽)

진중권이 전제하는 것은 무언가. "자본주의의 성격이 변한다는 것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의 양상, 특히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93쪽) 이러한 관계 양상의 변화는 바로 사회구조의 변화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게임이 되어 가고" 있는 유희 자본주의 사회로서 "새로운 노동자 계층이 발생"(97쪽)하고 있다.

노동이 유희가 되고, 미학이 윤리학이 되는 미학적·유희적 자본주의사회는 (유희로서 노동을 하는) 인지 노동자나 (고객에게 감동을 제공하는) 감정 노동자와 같은 새로운 노동자를 필요로 한다. "창의성이 자본주의적 정언명법이 되어 버린 이 새로운 상황"(102쪽)은 (노동이 유희가 되는) 유토피아인 동시에 (이 상황을 자본주의가 강요하기에) 디스토피아다.

세계의 제작학

이렇게 창의성이 강제되는 사회에서 인문학은 세계의 해석학을 넘어서 세계의 제작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진중권의 판단이다. 인문학이 공학적 프레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제작에 콘텐츠를 제공하고, 인터페이스 디자인에 개입하고, 과학 연구의 철학적 전제를 교정하고, 나아가 실험을 위한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이는 사실 상보적이다.

"이를 뒤집으면, 인간의 의식과 심리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철학이 인공지능 실험에 모델을 제시해줄 수가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거꾸로 과학 실험은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제까지는 불가능했던 철학적 명제의 진위 검증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115쪽)

이런 맥락에서 진중권이 기대를 거는 대상은 시장의 인문학, 대중화한 인문학이다. 물론 기대에는 요구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는 대중화한 인문학이 내용에 대해 고민할 것을 주문한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이 모든 기술적 발전들, 그것들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며 거기서 어떤 문제가 제기되는지를 논의해야 합니다." (104쪽)

진중권이 기대하는 것은, 그리고 우리 시대에 필요하다고 확신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인문학, 즉 테크놀로지와 연동된 미래학적 성격의 인문학"(104쪽)이다. 그는 형식(새로운 플랫폼에서의 텍스트와 사운드·이미지 사이의 관계와 글쓰기 자체의 급진적 변화)과 내용(다양한 과학의 분과와 인문학 사이의 접점 마련), 양 측면으로 고민을 심화하고 있다.

진중권은 급변하는 사회와 전통적인 인문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그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인문학의 미래는 희망찬 기대라기보다 열린 가능성으로 특징된다. 이는 인문학이 방향을 제시하고, 또한 질문에 답해 줄 사회의 미래 또한 마찬가지다. 이 사회가 유토피아로 나아갈지, 디스토피아로 전락할지를 단언할 수 없다. 이는 결국 우리의 책임으로 귀결된다.

기독교와 인문학

이런 맥락에서 볼 때에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 말미에 첨부된 질의 및 응답 부분이 흥미롭다. 다른 여러 질문에 대한 답변들도 유익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관심을 모으는 건 마지막 두 질문이다. 먼저 "인간이 신의 영역을 넘보려고 할 때 생겨나는 문제"(150쪽)에 대해 묻고, 다음은 "과학의 시대에도 종교가 살아남을 수 있을"(155쪽)지를 질문한다. 

첫 질문인 "인간이 신의 영역을 넘보려 할 때 생기는 윤리적 문제"(151쪽)는 결국 "기술의 사용을 통제할 윤리적 기준을 제시할 책임"으로 귀결되고, 이는 곧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문학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 외려 요청하고 있음을 보여"(154쪽) 주는 것이다. 도르래를 타고 오는 문제 해결사로서의 신(deus ex machina)을 거부하는 본회퍼의 문제의식이 엿보인다.

"종교와 과학의 전쟁"을 반영하는 다음 질문은 예전에 "두 상징 형식이 각자 제 영역을 찾았"(156쪽)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이 과학기술의 시대에도 처녀가 단성생식으로 득남을 했다는 황당한 믿음이 유지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이유란, 종교는 과학이 답할 수 없는 문제에 답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155쪽) 과학은 사실을, 종교는 가치를 다룬다.

그렇기에 인공지능 연구자들에 따르면, 인공지능이 현존하는 인간의 직업을 기계로 교체하더라도 마지막까지 남는 두 직업 가운데 하나가 목사라는 것이다. 하지만 진중권은 삶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신이라는 가설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해결하자는 것입니다."(159쪽) 본회퍼의 신학적 문제의식이 인본주의적으로 종결된 셈이다. 

진중권은 인문학 자체가 "인본주의, 즉 휴머니즘의 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159쪽) 강조하며, 이를 위해 중세의 신본주의(theism)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인본주의(humanism)으로 변모해 갔다고 하는 역사적 맥락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흐름이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기독교의 인간론이다. 기독교는 인류에 대해서 매우 높은 신학적 평가를 내린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명제가 기독교 인간론의 토대를 이룬다. 원래 왕과 제사장에 적용되던 호칭을 모든 인간에게 적용한 것이다. 그 함의를 간단하게 파악하려면, 제임스 패커의 <인간을 아는 지식>(아바서원)이 유용하다. 그의 기본 주장을 다소 순화시켜 표현하자면, 진실한 기독교인들도 휴머니스트라는 이름에 합당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앞서 진중권의 인본주의적 입장은 간격을 메우시는 문제 해결사로서의 하나님을 배척했던 본회퍼의 문제의식에 닿아 있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우리는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자로 부름받았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주로 인간을 통해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계신다. 매순간마다 하나님나라가 현현하는 것은 바로 교회와 신자 개개인의 실존적 선택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지금 디지털 시대에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내가 보기에 진중권이 이 조그만 강의록에서 인문학의 처지와 역할에 대해 논의하는 바가 기독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매체 전환의 시기에 교회가 어떻게 대중과 소통하고, 그들의 문제를 파악하며, 또한 답할 것인지 고민하는 분들에게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은 길을 헤매지 않게 도와줄 나침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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